롯데가 일본 우익 영웅의 비호를 받았다?
롯데그룹 명예회장인 신격호의 일본 이름은 시게미츠 타케오이다. 그의 둘째 부인의 이름은 시게미츠 하츠코. 이걸 두고 최근 민족주의 계열 글쟁이들 사이에서 그가 태평양전쟁/일제강점기 당시 토죠 히데키 내각과 코이소 쿠니아키(小磯國昭:조선총독부 9대 총독) 내각 당시 외무성 장관을 역임했고, 전후 미해군 전함 미주리호 함상에서 이루어진 항복문서 조인식에서 사인을 했던 시게미츠 마모루(重光 葵)의 조카딸과 결혼했다는 주장을 하는데, 이거 구라일 가능성이 아주 높은 이야기다.
일단, 신격호가 이런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실수하는 부분 중에 하나가, 그가 19살에 부산에서 밀항하여 일본에 ‘돈’을 벌러 가서 사업을 계속 말아먹다가 시게미츠 마모루의 조카딸과 눈이 맞았다는 주장을 펼치는 부분부터 시작하는데, 신격호가 일본에 간 것은 돈 벌러 간 게 아니라 와세다대학의 부속학교 중 하나인 ‘와세다실업학교’에 입학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은 쏘옥 빼먹고 이야기한다. 그냥 무일푼으로 가서 맨땅에 헤딩하면서 비즈니스를 시작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건 신격호 한양하는 사람들이 좋아라 하는 이야기인데, 이 또한 구라라는 것도 알아두시길.
신격호의 둘째 부인인 시게미츠 하츠코(重光初子)의 본명은 타케모리 하츠코(竹森初子)이다. 신격호와의 사이에서 장남인 신동주(1954년생)와 차남인 신동빈(1955년생)이 태어났다. 신격호는 결혼 전까지는 자신의 한국식 이름을 사용하다가 결혼 후에 개명하는데, 시게미츠라는 성 하나 가지고 일본 우익 최대의 영웅취급을 받는 ‘시게미츠 마모루’의 조카와 결혼해서 그 후광을 입었다는 이야기는 사실 여러 가지 사실관계를 확인하지 않고 그냥 입맛대로 끼워 맞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시게미츠 마모루 정도의 거물 인사의 비호를 받았으면 회사가 설립 당시부터 미친 듯이 잘나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오히려 신격호와 롯데가 급속도로 성장하게 된 원동력은 시게미츠 마모루가 아니라, 다른 인물들에게 있다. 게다가, 나중에 또 언급하겠지만 그 정도의 빽을 둔 남자가 일본에서 귀화를 안 해?
자칭 민족주의 계열의 글쟁이들이 간과하는 인물이자, 롯데그룹의 설립 배경에는 빼놓을 수 없는 엄청나게 중요한 인물이 하나 있는데, 바로 재일대한민국민단(줄여서 민단)의 초대회장이자, 부관페리주식회사의 회장직을 역임했던 정건영(일본명 마치이 히사유키:町井久之)의 존재이다. 동경에서 태어난 정건영은 절은 시절 “긴자의 호랑이”라고 불리운 일본 내 조선인 깡패이자, 반공계열의 재일한국인 조직폭력단인 동아우애사업조합(東亞友愛事業組合, 줄여서 東亞會. 설립 당시의 명칭은 東聲會)를 창단했던 인물이다.
한일국교정상화와 롯데그룹
신격호는 1947년에 당시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정(GHQ)의 병사들이 껌을 씹는 걸 보면서 일본에서 ‘껌 장사’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1948년에 롯데를 설립하는데, 사실 출발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일단, 당시 일본에 ‘껌’하면 누구나 다 알아주는 ‘하리스’라는 기업이 시장을 거의 독점하다시피 했다.
신격호가 본격적으로 장사에 힘을 얻게 되는 건 바로 1954년, 정건영의 소개로 당시 일본에 월드컵 축구예선전을 치르기 위해 방일했던 대한민국 대표팀을 후원하며 이승만 정권의 후원을 받으면서부터이다. 신격호는 국가대표팀을 후원하는 한편, 이승만 정권과 정건영의 활동을 중재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러던 신격호에게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는데, 바로 기시 노부스케와의 만남이다. 이는 이승만이 하야하고 윤보선 대통령이 쿠데타로 실각하면서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게 되자 손바닥 뒤집듯 후원자를 갈아 탄 정건영이 신격호에게 이후락을 소개하게 되면서 이루어진 만남이다. 기시 노부스케는 일본 자유민주당(자민당) 초대 간사장을 지내고,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일본 총리를 지낸 인물이다. 임기 중, 한일국교정상화에 힘을 기울인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태평양전쟁 당시 토죠 히데키 내각에서 상공대신과 국무대신을 맡았던 인물이며, 전후에는 A급 전범으로 체포되었으나, 전시 중 토죠 내각에 대해 “미국에게 즉시 무조건 항복할 것”을 진언했다는 이유로 무죄방면된 사람이다. 일본의 비핵화 정책에 상당한 일조를 한 사람이고, 평화 헌법 유지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인물이며, 역시 일본 총리이자 노벨 평화상을 받은 사토 에이사쿠의 친형이고, 요시다 시게루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인물이다. 노벨 평화상 후보에 오르기도 하고, 이후 노벨 평화상 심사위원을 역임하기도 했다. 뭐 여기까지는 뭐 그럭저럭 긍정적인 인물일 것 같은 데…
그는 극동전범재판 당시, “우리는 전쟁을 일으키고 진 결과에 대해 일본국민에게 큰 폐를 끼쳤지만, 미국에 대해서는 어떠한 책임도 없다”고 발언하거나, 혹은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켰다는 부분에 대해서는 “물론 정신 나간 일부의 극단주의자들 중 그런 행위를 실행하려 한 자들도 있으나, 당시 일본은 전쟁을 하지 않으면 생존할 수 없었다”라고 주장하는 등, 우리에게 있어선 그다지 반길 이유가 없는 인물이다.
그러나 무죄방면되기 이전, 옥중에서는 “조국을 이런 지경에 빠트리게 된 책임자 중에 한 명으로서, 혹시 기회가 된다면 다시 한 번 정치의 무대에 올라, 남은 생애 동안 얼마만큼의 일을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일본의 그릇된 정치와 그간의 잘못을 속죄하고 싶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어디까지가 본심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후 기시 노부스케는 미국의 반공정책을 열렬히 환영하며, 반일 일색인 이승만 정권(이승만은 인선에선 절대 반일주의자가 아니었지만)에 대해서도 비교적 유화적인 태도를 취했고, 이후 한일국교정상화를 꾀하는 박정희 정권에 대해서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며, 박정희 정권과의 교섭 상대로 주로 일본의 재일한국인 단체나 기업들을 이용했다. (기시 노부스케는 그래서 현재 자민당에 그 명맥만 느슨하게 남아있는 이른바 ‘친한파’ 파벌의 총수로 불리기도 한다)
1958년에 이승만 정권을 방문한 일본의 야츠키 카즈오 특사가 기자회견에서 “기시 노부스케 총리는 이토 히로부미와 동향인데, 총리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한국에 범했던 과오를 유감으로 생각하고 있으며, 동향 선배인 이토 히로부미가 저지른 과오를 씻고 한일관계를 정상화하고 싶어한다”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
뭐 이게 어디까지 진심인지는 모르겠으나, 미국의 대세 하에서 쓸데없는 트러블은 일으키지 않겠다는 것만은 확실했던 것 같다. 한일국교 정상화 역시 아무래도 미국의 실질적 지배하의 체제를 확고히 하기 위해서였을 거고. 그런데 그의 외손자인 아베 신죠가 자신의 외조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건 꽤나 흥미진진한 이야기다.
박정희 정권의 후원을 받다
신격호 이야기로 돌아가서, 정건영과 이후락(그리고 박정희)을 등에 업고 자금을 후원받아 롯데는 당시 일본에서 ‘껌’의 대명사로 불렸던 ‘하리스’라는 기업에 대한 비방광고를 거의 신문지상에 도배하다시피 했고, 또 이 자금을 국가대표팀에 환원하는 방식으로 박정희 정권과의 관계를 돈독히 해나간다. 아시아 야구 선수권, 월드컵, 그리고 동경 올림픽에 출전한 대한민국 국가대표팀의 메인 스폰서까지.
정치 자금이 기업에게 유입되고 다시 그게 정치자금으로 세탁되는 그런 과정 속에서 롯데가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박정희와 정건영, 기시 노부스케의 후원하에 한국 롯데가 1967년에 설립하게 되고, 1969년에는 역시 기시 노부스케의 소개로 현재의 치바 롯데 마린즈의 전신에 해당하는 다이에이 도쿄 오리온즈의 스폰서가 된다.
단, 치바 롯데 마린즈에 관해서는, 1969년 메인 스폰서가 되었지만 “세간의 반감”이 있을 수 있다 하여, 운영 자체는 다이에이(大映)체제가 그대로 유지되었다. 원래는 1949년에 마이니치신문사의 야구팀으로 발족했다. 이후 1957년에 다이에이 유니온즈를 합병하면서 다이에이-마이니치 오리온즈로 발전. 1960년에 도쿄 오리온즈로 개명하기 전까지를 다이에이 시대, 혹은 다이마이 시대라고도 한다.
도쿄 오리온즈는 1960년 개명 당시 이미 경영난에 빠져 있었고, 경영악화로 인한 피해를 두려워한 마이니치 신문이 파트너십 계약을 파기하면서 다이에이 체제로 유지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이에이 도쿄 오리온즈를 이끌던 사람은 바로 다이에이 영화사의 사장이었던 나가타 마사이치(永田雅一). 어릴 적부터 기시 노부스케와 절친이었던 그는 “자금을 대줄 인물”이 필요했고, 1969년에 기시를 통하여 신격호를 만나게 된다.
이후 1971년에 롯데가 정식으로 구단을 ‘인수’하기 전까지, 다이에이 체제가 그대로 유지된다. 이 기간 동안 신격호는 오리온즈에 정말 ‘돈’만 대준다. 그런데 정식으로 인수한 다음 해부터 문제가 속출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해방 이후 한일관계 및 롯데그룹 스토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또 다른 요상망측한 거물이 등장한다. 바로 코다마 요시오(児玉誉士夫)다.
극우 야쿠자와 롯데 오리온즈
코다마 역시 일본의 극우파 야쿠자 두목이었는데, 이 인간은 중일전쟁 당시 관동군과 일본 해군 항공대에 납품하면서 토죠 히데키 내각에 해군의 정황을 보고하는 스파이짓(당시 일본 해군은 육군과 철천지원수 사이였다)을 하다가 일본 패망 이후에 역시 A급 전범으로 체포된다. 이후 CIA에 포섭되어 미군정 참모 제2국(GHQ G2)에 일본 정계의 움직임과 좌익세력의 동향을 보고하는 스파이짓을 하면서 우익 야쿠자를 운영하고 일본 정계에 “미국을 등에 업고 막대한 부를 챙긴다.
우리나라의 노근리 사건이나 제주 양민학살 사건 등과 비교되는, 미군정과 일본 우익 단체들에 의한 ‘유우바리 탄광 노조 탄압 사건’을 주도한 이도 바로 이 코다마 요시오다. (타나카 카쿠에이 시절까지 잘 나가다가, 록히드 사건 때 비리에 연루된 점이 드러나면서 인생에 亡자를 쓰고 강제 버로우되었다. 84년에 사망했는데, 죽기 전에 “나 사실 CIA 스파이짓도 함”이라고 밝히고 죽는다.)
코다마 요시오 이야기를 왜 하냐면, 신격호가 도쿄 오리온즈를 정식으로 인수를 했을 당시, 도쿄 오리온즈의 홈그라운드가 바로 도쿄 스타디움이었는데, 이 구장의 오너가 바로 코다마 요시오다. 근데 뭐, 정계의 거물이라고 해봤자 결국 야쿠자가 운영하는 구장이니, 그 운영체계나 재정상태가 좋을 리 없다.
그래서 코다마 요시오가 신격호에게 “야구팀은 홈 구장을 소유하는 게 더 좋은 듯하다”며 구장 매입을 제안 하는데, 일단 너무 비싸게 불러서 타결이 안됐고, 또 당시 오리온즈의 감독이었던 카네다 마사이치(金田正一: 이전에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선수였다)가 “도쿄 스타디움은 좌우로 너무 넓어서 안타가 너무 쉽게 들어간다. 우리 투수진들한테 불리”라고 하는 바람에 협상이 결렬된다.
결국 롯데 오리온즈는 1991년, 치바에 롯데 스타디움을 건설하고 팀 명을 “마린즈”로 개명할 때까지 약 20년간 센다이와 카와사키를 전전하면서 “프로팀인데 홈 구장이 없는 조낸 불쌍한 팀”으로 전전한다. 여담이지만, 치바로 본거지를 옮기면서 팀명을 오리온즈에서 마린즈로 바꿀 때 명칭을 팬들에게 공모했는데, “미 해병대 같은 강인함을 가진 팀으로 성장하길”이라는 게 채택돼서 마린즈다.
작년에 소공동 롯데 호텔에서 ‘자위대 창설 60주년 기념행사’가 개최될 뻔하다가 시민단체들과 위안부 할머니들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한 것을 가지고 “기시 노부스케랑 각별한 인연이 있는 친일파 기업이라서 롯데호텔로 정해진 거다”라고 이야기를 하는데, 그보다 앞서 10년 전인 2004년에는 ‘신라호텔’에서 개최되었다. 새누리당 나경원이 “난 자위대 행사인지 몰랐어용~”드립을 친 그 사건이다. 뭐 신격호와 기시 노부스케가 나름 각별한 사이인 것은 맞는데, 그렇게 각별했으면 10년 전에도 롯데호텔에서 했어야지. 안 그래?
일본에서는 반일기업 취급
재미있는 사실이 하나 있는데, 최근 일련의 삼류 월화 드라마 같은 사태로 인하여 다시금 부각되고 있는 이 ‘롯데’라는 업체, 자칭 민족주의 계열 글쟁이들 사이에서 ‘친일기업’ 혹은 ‘친일파와 결탁한 집안’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인데, 정작 일본에선 신격호를 비롯, 그 아들들이 귀화하지 않았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반일기업’으로 일본 우익들에게 상당히 비난받는다.
일본을 대표하는 제과류 기업이 바로 에자키 그리코(글리코), 모리나가제과, 그리고 롯데인데, 롯데가 일본에서 잘나가는 기업 중 하나이다 보니 그리코와 모리나가 역시 재일한국인들이 세운 기업으로 오해를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국뽕을 말아 드시는 국내 자칭 우파들부터, 재일한국인이라면 모두 싸잡아서 ‘죠센징’이라 멸시하는 일본 우익들까지 이 웃기는 이야기에 자주 낚인다. (가끔 모리나가 제과 본사 건물이나 그리코 본사 사옥 앞에서 “조센징 카에레~”하면서 시위하는 정신나간 것들도 있음.)
그 출신이 어찌 되었든, 일본의 우파 정치인이자 철두철미한 반공주의자로 변모한 기시 노부스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사실은, 6~70년대 일본에서는 “롯데=재일한국인이 세운 한국기업이지만 일본 우익을 서포트하는 기업”이라는 인식에서 최근에는 “귀화도 안 하고 친한파 정치인들을 아우르는 게 아주 망할 반일기업인이야”라는 인식이 일본 우파 사이트들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다. 혐한류의 대표주자 중에 하나이자 고마니즘 선언으로 유명한 코바야시 요시노리 같은 사람들이 종종 “롯데=반일기업”이라는 논리를 세우는데, 그 이유가 바로
A. 일본에서 장사하는데 귀화를 안 했다는 것
B. 친한파 수장 기시 노부스케를 밀었다는 것
C. 호텔 및 리조트 사업을 일본에서 추진하지 않았다는 것
D. 일본기업의 유명 과자들을 베낀 상품이 많은 것(가령 빼빼로라든가 혹은 빼빼로라든가 아니면 빼빼로라든가)
등이다.
롯데가 박정희 정권을 등에 업고 본격적으로 한국에서 장사를 시작할 무렵, 롯데 번영의 일등공신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한 일조를 했던 정건영은 외환은행의 투자를 받아서 일본 내에서 리조트 사업을 펼치는데 그다지 신통치 않았다. 다만 그의 조직인 동아회는 한때 일본 관동지방을 아우르는 20개의 야쿠자 단체 중에 하나로 이름을 떨치기도 하고, 국내 조폭들과도 꽤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도 하지만, 서서히 세를 잃고 3년 전에 완벽하게 와해되었다. 의외로 오키나와에 그 잔당들이 꽤나 많은데, 최근 수년간 오키나와에서 일어나고 있는 우익단체들의 시위는 대부분 동아회 떨거지들이 일으키는 것이다.
신격호가 시게미츠 마모루라는 거물의 조카랑 결혼했다고 주장하는 측의 의견은 “시게미츠 마모루 정도의 거물과 연관이 없이 어찌 기시 노부스케 같은 인물과 인연을 맺을 수 있었겠느냐”라는 것이다. 그런데, 1954년 당시 기시 노부스케는 시게미츠 마모루와 같은 민주당 소속이긴 하지만, 시게미츠 마모루와 같은 파벌이 아니다.
기시 노부스케는 ‘반공이념’을 자신의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삼고 어떻게든 미군정의 환심을 사려 애쓴 반면, 시게미츠 마모루는 미군정에 사사건건 반대를 하다가 결국 맥아더에 의해 실각하고 말년을 상당히 불우하게 지낸다. 이런 사람의 조카와 결혼했다는 게 사실이라고 가정하면, 기시 노부스케가 신격호를 밀어줄 이유가 없어진다. 그냥 시게미츠라는 성을 가지고 뭔가 끼워 맞추려고 하다 보니 이런 오류가 발생하는 거다.
어쨌든 간에 신격호라는 기업인, 이승만 정권 중기부터 세를 불리기 시작해서 박정희 말기에 거의 집대성을 이룩한 기업인이고, 요즘 송파구에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사우론의 탑’을 세우려고 정치인들을 구워삶아 대북 안보체계에 상당한 흠집을 낸 장본인이기도 하니 그다지 좋게 볼 이유가 없는 기업인인 건 맞다고 볼 수 있겠다.
추신. 한 가지 덧붙이자면… 시게미츠 마모루는 미주리호 함상에서 항복문서에 사인할 적에 다리를 심각하게 절었는데, 그 이유는 상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행사에 참석했다가 윤봉길 의사가 던진 폭탄에 한쪽 다리를 잃어서이기 때문이다. 이런 인물이 뭐 좋다고 ‘죠센징’이 지 조카랑 결혼하는 걸 허락했겠냐.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원문: 김찬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