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이런 당돌한 말을 한 사람은 누구일까. 죽음을 초월했다는 걸까, 그 의미를 깨달았다는 걸까. 기원후 1세기경의 로마 시인 루크레티우스가 한 말이다. 에피쿠로스 학파의 영향을 받은 로마 시인 루크레티우스는 “인류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죽음을 극복하고 우리가 살면서 마주치는 모든 것들도 덧없는 것임을 인정하면서 세상의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며 “덧없는 인생에서 아름다움을 찾기 위해서는 ‘일탈 (Swerve, 라틴어 Clinamen)’이 필요하다”(<1417년 근대의 탄생>중에서)고 주장한다.
삶의 덧없음을 인정하는 한편, 죽음을 극복하는 행위로서의 일탈. 그러한 행위를 일러 예술 활동이라 하면 나름 그럴듯한 예술론이 되는 걸까. 미술평론가 박영택은 “미술은 애도에서 시작되었다”고 단언한다. <애도하는 미술>에서다.
예술, 죽음을 극복하는 행위로서의 일탈
이전에도 죽음에 대한 담론은 넘쳐났다. 가라타니 고진은 “죽음은 물리적인 문제도 아니고 관념의 문제도 아닌 제도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어떤 인간의 죽음은 그가 차지하고 있던 관계의 공백이고, 살아남은 자는 그것을 메우고 관계를 새롭게 재편성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했다.
베레나 카스트는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우리는 그의 죽음에서 자신의 죽음을 미리 맛볼 뿐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든 그와 함께 죽는다” (베레나 카스트 <애도>중에서)고 했다. “죽음은 한 개인의 소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사회 집단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므로 그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 ···중략···죽음은 늘 사회적이고 공적인 사실이었다”라고 말한 이는 필립 아리에스 (<죽음 앞의 인간>, <애도하는 미술>에서 재인용)였다.
<애도하는 미술>은 그러한 죽음의 담론들을 밑그림 삼아 그 위에 죽음을 주제로 다양한 방식으로 열정을 쏟고 있는 작가들의 작업장과 창작실을 찾아다니며 색을 입히는 방식으로 미술의 근원적 의미를 재구성한다.
한 사회, 공동체 안에서의 치명적인 상처인 죽음은 오랫동안 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였다. 네안데르탈인들은 무덤을 만들어 죽은 이를 애도했고, 무덤 주변에 꽃을 뿌리기까지 했다. 추모의 감정이 싹텄으며 죽은 이를 기념하기 위한 매개가 요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인류의 가장 가까운 조상인 크로마뇽인들은 동굴벽화에 주음을 묘사했다. 그것은 죽음의 공포를 이기고 불멸을 욕망하는 가운데 탄생한 것이었다. 제의이자 주술이었던 것이다.
살아남은 자가 망자와의 관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행위, 자신의 죽음을 미리 맛본 사람으로서의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행위로서 천착한 것이 예술이다. 그러한 의미의 예술로서 가장 오랜 방식이었던 것 즉, ‘이미지를 통해 죽음을 표상’하는 것이 바로 미술이다.
미술, 이미지를 통해 죽음을 표상하는 것
애초에 미술 즉,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행위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출발했다. 그것은 부재에 저항하고자 하는 심리적 욕망이다. 이미지는 시간의 힘과 죽음에 대항하고 저항하려는 인간의 의지였다. 죽음을 피할 수 없다면 이를 받아들이되 대신 이미지를 빌려 그 죽음에 저항했던 것이다.
“이미지의 어원은 ‘이마고Imago’로 귀신, 유령이라는 뜻이다. 죽은 이의 얼굴을 밀랍으로 떠낸 것을 지칭하는 이마고는 장례식에서 마치 영정사진처럼 내놓거나 자기 집 안마당 벽감 또는 비밀 창고나 선반에 모셔두는 것이기도 했다. ‘피구라 Figura’는 원래는 귀신이라는 뜻이었다가 나중에 형상이라는 말이 되었다. 우상 Idol은 ‘에이돌론 Eidolon’, 즉 사자의 망령이나 유령을 뜻하는 말에서 나왔다. 또한 ‘기호 Sign’라는 말은 묘석을 뜻하는 ‘세마 Sema’에서 왔다. 아울러 종교 의례에 쓰는 말이었던 ‘재현 Representation’은 ‘장례 의식을 위한 검은 포장이 덮인 텅 빈 관’을 가리킨다. (<애도하는 미술> 서문)”
자기 치유의 미술 감상, <나의 서양미술 순례>
박영택이 죽음에 대한 애도로서 미술의 근원적인 의미를 좇는다면, 재일조선인 서경식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그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의미로서 미술감상의 전범을 보여준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에서다.
“솔직히 고백을 하자면 나는 이 그림(헤럴드 다비드 <캄비세스왕의 재판>)에서 곧바로 아버지의 죽음을 연상하고 있었다. 시뻘건 왼쪽 발목을 꽉 잡고 마치 양말을 벗기고 있는 듯한 형리刑吏의 손놀림을 보고 있으며, 나 자신이 직접 듣지는 않았지만 “여기가 나른하다니까”하고 중얼거렸다는 아버지의 목쉰 음성이 귓속에서 낮게 울리는 듯하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 13쪽)”
<나의 서양미술 순례>는 그 자체로 아름답고 수려한 수필집이다. 고백컨대, 서양미술에 문외한이었던 필자는 이 책을 읽고 난 뒤 서양미술에 급격하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얼추 20년 전쯤의 일이다. 이후 미술 관련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중 인상 깊었던 책이 시인 최영미의 시적 감성이 돋보이는 에세이집 <시대의 우울>과 <화가의 우연한 시선>, 이주은의 심리치유 에세이 <그림에, 마음을 놓다>, 그리고 앞서 언급한 박영택의 <미술전시장 가는 날>, <예술가의 작업실>등이 그런 책들이다.
이주은의 심리치유 에세이 <그림에, 마음을 놓다>가 그림과 글을 읽는 감상자 혹은 독자의 마음을 치유하는 따뜻한 에세이라면 서경식의 <나의 서양미술 순례>는 철저하게 저자 자신의 심리를 다독이며 스스로 치유의 길을 걷는 과정을 보여준다. 온전히 개인만의 고뇌일 수 없었던 서경식과 그의 형제들[1]의 고생담은 읽는 이로 하여금 고스란히 그 고통을 체감하게 한다. 그만큼 그의 글은, “(미술관 순례를 통해 마침내) 조금씩 표현의 형상을 갖게 되”는 과정을 애절하게 보여준다.
대학 3학년이 되었을 뿐인 스무 살 때에 형들의 투옥사건을 만난 나에게는, 형들을 구출하기 위한 모든 노력을 하는 것이 그 후의 생활로 되었다. 그것은 좀 더 보편적인 대의에 이어지는 길이기도 할 터이었다. 허나 그것은 또한 스스로의 무력함과 왜소함을 알게 하는 나날이기도 했다.
나는 단지 두 눈 똑바로 뜨고 이 운명의 행태를 속속들이 지켜보도록 스스로에게 명령해왔을 따름이지만, 그 과정에서 역사와 인간, 민족과 개인, 고향과 유망 그리고 고독과 죽음 같은 것들에 대해서 거듭거듭 많은 것을 느끼기도 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특히나 죽음이란, 그것이 내 자신의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언제나 내 몸 가까이에 있다는 느낌이었다. 그러한 느낌이나 생각은 모름지기 명확한 언어로 표현되기에는 너무도 불분명한 ‘응어리’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예상치도 못한 일이 일어난 것은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유럽을 여행하면서 온갖 종류의 서양미술에 접하고 그것들과 마음속에서 대화를 거듭하는 가운데, 내 속에 있던 불분명한 ‘응어리’가 조금씩 표현의 형상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의 서양미술 순례> 에필로그
그런 마음, 그런 심상 때문이었을까. 빡빡하기 이를 데 없는 일정으로 여러 곳의 미술관을 순례하는 강행군을 거듭하는 속에서도 서경식의 발걸음을 지체시켰던 그림들이 있었고, 그 그림들은 고스란히 그의 심리상태, 혹은 당시 우리나라가 처했던 현실을 맞춤하게 표상한다.
“프라도 미술관에는 마드리드를 점령한 나폴레옹 군의 시민학살을 고발한 고야 Francisco Jose de Goya의 <1808년 5월 3일, 프린시페 피오 언덕의 총살>이 있다. 피카소는 이 그림의 구도를 빌려, 조선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에 <조선에서의 학살>을 그렸다.” (89쪽)
“프라도 미술관이 내 마음을 암담하게 만드는 것은, 벨라스케스나 고야를 바라보고 있는 중에 본 <물살을 거스르는 개> 또는 <모래에 묻히는 개>였다. 보기에 따라서 급류를 허겁지겁 헤엄쳐 건너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유사流砂의 개미지옥에 삼켜져 구제불능의 상태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이 개는 고야 자신이다.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이 개는 나라고 생각했다.” (110쪽)
홍세화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마치 후일담 소설처럼 읽혔듯이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읽는 서경식의 <나의 서양미술 순례>는 다시금 나를 과거의어느 한 때로 인도해준다. 그 치기어린 청춘의 시간들, 그 속에 웅크리고 있던 편견과 속단과 극단의 감정들. 문화적 사대주의 아닌가? 그의 형들이 옥고를 치르고 있는 사이 그는 왜 하필이면 유럽의 미술관을 순례하는 사치를 부리고 있는 건가.
조선에는, 한국에는 미술이 없단 말인가.
나의 그 20년 전의 치기와 곡해와 어리석음을 읽기라도 했다는 듯 서경식은 최근 <나의 조선미술 순례>를 펴냈다. 책은 우리의 현대미술 속에 스며든 절망의 나날과 사회적 죽음, 그에 대한 애도의 실천으로서의 미술 작업에 매진하는 작가를 찾아 나서고 있다.
80년 광주는 진행형, 세월호 참사는이제 시작
어떤 죽음은 안타깝고 어떤 죽음은 억울하며 어떤 죽음은 아름답기도 하다. 이토록 죽음은 저마다 다른 톤의 소리를 가졌으며 다른 빛깔의 스펙트럼을 형성한다. 본질적으로 같은 죽음이 이리 다를 수 있는 것은 그 죽음을 바라보는 산자들의 시각이 제각각으로 나뉘기 때문일 것이다. 304명의 생명을 앗아간 세월호 참사만 해도 그렇다.
대통령과 정부가 보는 그 죽음은 그저 사고사에 불과하지만 양심을 가진 사람의 시각에서 보면 그건 분명한 사회적 타살이고, 학살이다.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말마따난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이지만, 여러 사람이 그것도 권력과 결탁한 기업의 비인간적 행태로 인해 죽었다면 그건 분명 국가가 저지른 학살에 다름 아니다.
안타까운 건 그러한 학살에 대한 예술의 모호하고도 소극적인 태도와 반응이다. <애도하는 미술>에서 박영택이 지적하는 점이 그것이기도 하다. 80년 광주 민주화운동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제도와 형식으로서의 치유는 그럭저럭 이루어졌다지만, 그 억울한 죽음을 달래줄 씻김굿판은 제대로 열리지 않았고, 그 죽음은 지금껏 문학의 소재[2]로, 다양한 화가들의 그림의 제재로 형상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죽음과 형들의 옥고가 서경식으로 하여금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쓰게 했듯이, 2014년 우리 사회의 다양한 죽음들, 특히 참담하고 원통하기 이를 데 없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예술적 형상화와 재구성, 재해석 작업은 이제부터 시작해야 할 일이다. 그것이야말로 살아있는 우리의 존재 이유이자 책무일 것이다.
죽음에 대한 사유는 불가피하게 근대성 자체에 대한 반성의 측면을 요구하게 되었고, 사회적·정치적·인문적 문제로 부상했다. 당연히 미술이 자신의 삶에서 유래한 모든 문제를 시각적으로 해명하는 작업이라면 한국 사회에서 빈번한 여러 죽음에 대해 작가들이 고민하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애도하는 미술>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