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괘장의 기원은 동해천(董海川, 1797年—1882年)이 여러 무술을 섭렵하고 창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글에서는 동해천이 섭렵한 무술은 과연 무엇이며, 어떤 무술이 팔괘장의 근본을 이루고 있을까를 탐구해 보고자 한다.
동해천이 팔괘장을 창시하기까지
동해천은 하북성 문안현 주가오촌이 고향이다. 문안현은 하북성 천진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이며 창주와도 한 시간 거리이다. (천진에서 창주는 2시간)
동해천의 아버지 동수업(董守業)은 3형제를 낳았는데 동해천은 그 중 둘째이다. 동수업도 동네에서 소림무술류를 배웠다 하니, 동해천 역시 아버지한테 무술을 배웠거나 동네에서 기타 무술을 배웠을 것이다. 동해천은 1824년경 남쪽으로 떠난다. 동해천은 이 여행에서 강서성, 산동성, 안휘성, 절강성 등지를 거치면서 여러 무술가들을 만나 팔괘장을 완성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해천은 13년간 외유를 하고 1837년경 고향으로 돌아오고 1850년경 북경으로 진출했으며 1882년 사망하였다.
남쪽으로 여행을 한 13년 동안 안휘성 구화산의 운반도인을 만나 팔괘의 원리와 팔괘를 응용한 무술은 팔괘장의 기초를 배웠다는 것이 정설이다. 또한 남방도교의 수행법인 전천존(轉天尊)에서 팔괘장 주권의 원리를 도출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전천존은 강강술래처럼 둥글게 모여 걷는 것일 뿐, 무술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지 않다. 좁은 실내에서는 둥글게 돌고 절의 길을 따라 걷기도 한다. 물론 돈 다는 행위에서 힌트를 얻어 주권을 만들었을 가능성은 있다.
먼저 동해천이 어렸을 때부터 배웠을 동네의 무술에 대해 알아보자. 천진의 위성도시 창주가 천진에 무술가를 공급하는 창고 역할을 했듯이 문안현 역시 창주와 가까워서 그 지역에 유행하는 무술을 손쉽게 접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지역에서 유행하는 무술은 북파장권이나 소림권 류의 무술이었겠지만, 나는 통배권에 주목한다.
통배권은 창시자가 따로 없이 오래전부터 하북성 천진과 창주 등지에서 널리 퍼진 권법이다. 통배권(通背拳)의 배(背)는 등의 힘이 아니라 척주의 굴신을 이용한다는 말이다. 통배권의 특징이라면 팔을 풍차처럼 휘두르고 권이 아닌 장(掌)을 많이 사용한다. 통배권의 솔, 박, 천, 벽의 기술들은 팔괘장에서도 똑같은 주요공방 기술이다. (북경의 통배권을 보면 북파장권의 냄새가 많이 나기도 한다.)
팔괘장의 특징이라면 손을 펴서 찌르는 천장을 많이 사용한다는 점인데, 창시자 동해천은 팔이 유난히 길어 이 기법을 많이 사용했다고 하지만 그가 어렸을 때부터 배운 무술이 통배권이며 팔을 휘두르는 공격이 많은 통배권은 동해천의 신체조건과 잘 어울렸을 것이다.
동해천이 남쪽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알 수도 없고 배웠다고 해도 그 흔적인 팔괘장에 남아있지 않다. 통배권류의 품격을 가지고 있는 무술이 기본인 동해천은 1850년 50살이 넘어 북경으로 진출하면서 그의 무술이 팔괘장으로 변화하게 된다. 진출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50살의 동해천이 숙왕부의 하인으로 근무했다는 이야기를 볼 때 무술사범으로 간 것이 아니다.
동해천이 북경생활을 하면서 당시 북경에서 유명한 무술이었던 형의권과 태극권을 접하게 되었고 그 무술의 공방의 원리가 아니라 북경에 보급된 방식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이때 통배권류 무술에 형의권이 섞이기 시작한다. 팔괘장은 주권을 돈다는 기본공을 빼면 대부분 형의권의 기술과 비슷하다. 특히 전승경로가 짧은 양파팔괘장의 팔괘연환장은 원주 상에서 투로를 할 뿐 형의권과 거의 유사하다.
중요한 것은 무술의 원리보다 전파방식이다
동해천은 북경에서 무술가들과 교류를 하면서 통배권에 형의권을 섞고 기본공으로 주권을 만들게 된다. 통배권은 장거리 권법이고 형의권은 단타 계열이라 두 가지가 합해졌을 때 시너지 효과는 매우 높다.
주권을 창안해 낸 이유는, 심의권의 계행보처럼 걷는 수련을 해야 하는데, 도시는 예나 지금이나 공터가 없다. 시골은 그냥 벌판에서 걸으면 되는데, 도시는 그런 공간이 안 나오니까 똑같은 수련효과를 얻기 위해 원주상을 걷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이때 남방에서 본 원주상을 걷는 전천존이 힌트를 주었을 수도 있는데, 굳이 거기에서 온 것이 아니라 누구나 상식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 나는 전천존의 영향이 없다고 보고 있다.
팔괘장의 가장 고유한 수련은 주권을 도는 것인데, 주권은 무술의 기본공으로도 훌륭하지만 운동이 필요한 귀족자제들에게도 좋은 피트니스가 되었을 것이다. 몸 쓰는 것이 싫고 본격적인 무술을 힘들게 배우기를 원하지 않았을 북경의 부자들에게 주권은 힘들지도 않고 무술을 배운다는 성취감을 줄 수 있는 대안이 되었을 것이다.
동해천이 주목한 것은 무술의 목적이 아니라 무술의 전파방식이다. 동해천은 유명한 무술가들을 데려다 팔괘장을 가르쳐주고 팔괘권사로 바꾸어버리는 단기연수의 대가이다. 팔괘장은 북파장권류의 모습부터 형의권의 모습까지 형태가 다양하다. 팔괘장이 유파마다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은 팔괘장을 배운 2세대들이 몸에 익힌 무술들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무술의 목적이 아닌 유통방식에 주목한 이유는 무술을 배울 대상들의 분석에서 오는데, 그들은 부자이며 고위층이며 힘든 운동을 할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강하고 실전적이며 배우기 힘든 시골의 무술들은 북경에서 쓸모가 없었다. 북경사람들은 강한 무사가 필요하면 돈 주고 고용하면 될 뿐 호신을 위해 무술을 배울 필요가 없었다.
북경 사람들이 필요한 것은 무술의 배운다는 환상을 충족시킬 수 있는 피트니스였다. 팔괘장은 초기에 전장(轉掌)이라고 불렸지만 팔괘장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는데, 북경의 지식인들의 도움을 빌려 주역의 이론으로 체계화하는 시점에서 이름이 바뀌었을 것이다.
현재 중국의 무술가들은 모두 자신의 무술이 내가권[1]이라 주장하고 있다. 모든 무술이 내가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내가권이라는 범주에는 태극권, 형의권, 팔괘장 3가지 무술만 포함되어 있는데, 다른 무술에는 이 3가지 권법의 기법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북경에서 유명해진 이 3가지 권법은 처음부터 무술적인 요소를 이용한 피트니스로서 출발한 것이다. 내가삼권이란 북경에서 무술이 아닌 피트니스로서 성공한 3가지 무술을 지칭한다. (무술로서 가치가 없다는 말이 아님.)
- [편집자 주] 외가권에 대비되는 것으로, 외가권이 주로 물리적인 힘을 통해 상대방을 제압한다면 내가권은 내면의 기를 단련하여 물리력을 넘어서는 다른 차원의 힘으로 상대방을 제압하는 권법이다. 따라서 내가권은 외가권에 비해 정신수양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