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4년 12월 1일 작성된 글입니다.
종편채널의 대부분이 그렇거니와 여러 명의 패널이 출연해 왕성한 입담을 뽐내는 소란스런 수다 프로그램이 인기다. 그중에서도 종편 MBN의 <동치미>가 인기 상종가다. 말로만 듣다가 어느 날엔가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마침 사회자가 패널들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이었다.
“나이 들어 제일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세요?”
제법 고상한 대답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질문 끝나기가 무섭게 한 패널의 입에서 ‘돈’이라는 대답이 나온 것이다. 더 놀라운 건 그의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패널이 한 명도 없는 것이었다.
“열심히 일해 이 자리까지 와서 생각해 보니 돈이 전부는 아닌 것 같아요. 그보다는 사람에 대한 배려나 관용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어요.” 뭐 이런 말 정도는 나오지 않을까 싶었지만, 현직 변호사와 기자, 원로 배우, 목사, 한의사, 의사, 탤런트 등 그럴싸한 직업의 패널들 중 누구의 입에서도 그런 말은 나오지 않았다. 이구동성으로 ‘돈돈돈’을 연호했을 뿐.
세월호 참사 이후 우리 사회의 민낯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생명보다 돈을 중시하는 기업과 기업인들, 국민의 안전보다 조직의 안위를 먼저 생각하는 정부와 공공기관들, 공공의 가치를 추구하기보다는 잇속 챙기기에 혈안인 정치권, 시쳇말로 어느 곳 하나 정상인 곳이 없다.
종교계 역시 관용의 미덕을 설파하는 대신 궤변과 막말을 쏟아내기 일쑤였고, 급기야 단장(斷腸)의 고통을 겪고 있는 유가족들 앞에서 ‘폭식’ 퍼포먼스를 벌이는 괴물이 출현하기에 이르렀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할까. 참사 초기 터져 나왔던 “이게 국가인가.”라는 탄식은 일순 “도대체 여기가 사람이 사는 세상이 맞는 건가.”라는 절망적 절규로 바뀌고 말았다.
참사 이후 모 방송과 서울대 사회발전연구소(소장 장덕진 교수)가 공동 연구한 바에 의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공공성’(공익성, 공정성, 공개성, 공민성)에 대한 인식수준은 그야말로 처참한 수준이다. 공공성에 대한 인식수준은 물론이거니와 자녀에게 ‘관용’의 소중함을 가르치는 부모가 비교 대상 33개국 가운데 가장 적었다는 대목에선 아연 어이 상실이다. 대체 우리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있는 걸까?
새삼 물어볼 필요도 없을 테다. 앞서 종편 프로그램에서 확인했듯 그저 아이들에게 경쟁, 성공, 돈을 좇기 위한 수단만 가르쳤을 테니 말이다. 그 부모에 그 자식이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돈만 아는 부모로부터 오로지 돈 잘 버는 직업과 직장을 얻기 위해 경쟁에 매진하라는 요청만 받은 아이들, 그 아이들이 만들어낼 미래는 과연 현재보다 더 나은 세상이 되겠는가.
‘지금, 여기’에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숱한 가치들이 쏟아질 테지만 필자 생각에 그 무엇에 앞서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차이를 인정하는 문화, 더불어 사는 삶의 가치를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관용 말이다!
관용이라는 가치는 하루아침에 학습되고 주요 덕목이 되는 것이 아니다. 더구나 평화로운 시대에는 관용의 소중함을 알기 힘들다. 그래서다. 우리보다 앞서 관용의 가치를 발견한 서구유럽은 종교전쟁이라는 광증의 회오리 속에서 관용의 꽃을 피워냈다.
우리 사회에 관용이라는 말이 소개된 건 불과 20여 년 전의 일이다. 그러니 아직은 낯설고 입에도 잘 붙지 않는 말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로, 이토록 참혹한 불관용과 폭력이 판치는 현실을 방치할 수는 없는 것. 지금, 관용의 담론을 끄집어내는 이유가 그것이다.
20여 년 전 우리 사회에 관용이라는 화두를 던진 사람, 정확하게는 그 사람이 쓴 책이 있었다. 향수병에 시달리던 망명객, 홍세화의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그것이다. 책에 이런 문장이 나온다.
“존중하시오, 그리하여 존중하게 하시오(respectez, et faies respecter).”
관용, 즉 ‘똘레랑스’의 의미를 맞춤하게 설명하는 문장이다. 이 문장에 빗대 말하건대 관용은 그리 어렵고 복잡한 개념이기만 한 게 아니다. 흔히 볼 수 있는 공원의 푯말에 등장하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 “존중하시오, 그리하여 존중하게 하시오.”는 우리 식으로 말하자면 “잔디를 밟지 마시오.”의 의미이다.
“당신이 존중받기를 원하면 우선 남을 존중하며, 당신의 정치적 이념과 종교적 신념이 존중받기를 원하면 우선 다른 사람의 정치적 이념과 종교적 신념을 존중하며, 당신과 다른 인종과 국적을 가진 사람을 존중하며, 그리고 당신과 다른 생활방식과 문화를 존중해야 합니다. 한마디로 ‘당신 것’이 존중받으려면 ‘남의 것’부터 존중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인간이 모두 똑같이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평등 개념이 창안되어야 했던 것이며, 인간이 모두 같은 이데올로기를 갖지 않기 때문에 인권 개념이 창안되었어야 했던 것입니다.”
홍세화의 잔잔한 외침이 우리의 막힌 귀를 뚫어주고, 감긴 눈을 뜨게 했다면, 하승우는 거기서 한 발짝 더 나아간다.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책세상 간)는 홍세화가 전파한 똘레랑스의 한계를 지적한다. ‘상대에 대한 건전한 비판과 토론의 규칙을 지키자’는 홍세화식 똘레랑스는 의도의 순수성은 인정할 수 있지만, 실천의 문제가 되었을 때는 명확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순진한 똘레랑스’일 뿐이라는 것이다.
허버트 마르쿠제의 입을 빌린 하승우는 “우리 사회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홍세화식 ‘순진한 똘레랑스’가 아닌 ‘차별하는 똘레랑스’”라고 주장한다. “비판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선전할 수단을 갖지 못한 채 기성 사회의 규칙을 따르는 것은 패배가 예정된 게임을 하는 것”에 진배없다고 단언한다.
이쯤 똘레랑스의 사전적 의미에 대해서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 고명섭은 <지식의 발견>(그린비 간)을 통해 똘레랑스를 ‘관용’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한다. “똘레랑스는 라틴어 ‘tolerare’에 기원을 두고 있는데, ‘참다’ ‘견디다’를 뜻하는 것으로 ‘관용’이라는 다소 권위적인 뉘앙스가 깃든 말보다는 ‘견딤’이나 ‘용인’으로 옮기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주장이다.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의 설명을 덧붙여 보면 의미가 더 선명해진다.
“똘레랑스는 극단주의를 받아들이지 않는 앵똘레랑스(intolerance)와 짝을 이루고 있다. 똘레랑스는 극단을 부정하는 앵똘레랑스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인종주의나 종교적 광신을 거부한다. 그래서 똘레랑스는 차이를 ‘긍정하는’ 논리일 뿐 아니라 극단을 ‘부정하는’ 논리이기도 하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똘레랑스를 비판하는 것은 극단주의나 이기주의로 오해받기 쉽다.”
하승우는 똘레랑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잘못된 인식을 가차 없이 질타한다. “자신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히고 이성적으로 논쟁할 것을 요구하는 똘레랑스가 논쟁을 얼버무리거나 대립하는 가치를 받아들이라고 강요하는 것으로 변했다. 나를 다스리는 기준이어야 할 똘레랑스가 남을 비방하는 기준으로 변질되었다.”
똘레랑스의 역사는 일단의 인문주의와 종교 간 대립으로 점철되었던 16세의 유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관용적 사고의 탄생은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며 지긋지긋했던 종교전쟁과 숱한 갈등의 역사 속에서 그 의미를 확장해 온 살아있는 역사교과서에 다름 아니다.
종교개혁이 몰고 온 반목과 대립의 광증의 시대에 꿋꿋하게 인문정신과 관용의 미덕을 옹호했던 에라스무스, 카스텔리오, 몽테뉴를 비롯한 인문주의자들(슈테판 츠바이크 <위로하는 정신>), 명예혁명을 경험했던 존 로크, 억울한 죽음을 변호(칼라스의 억울한 죽음)했던 볼테르(공공의 질서와 안전을 해치지 않는 한 다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산업 혁명기를 살았던 존 스튜어트 밀(여론의 억압을 비판하고 소수의 권리를 옹호했으며 언론, 사상, 표현의 자유를 주장), 혼란스러운 1960년대(68혁명)를 살았던 카를 포퍼(비판의 자유, 사상의 자유, 인간의 자유를 보존하는 사회제도를 건설하는 것)가 바로 그 역사의 현장에서 똘레랑스의 의미를 심화·확장한 사람들이다.
마르크스 역시 <고타강령 비판>에서 “양심의 자유가 종교 영역을 넘어서 사회영역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종교라는 도깨비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똘레랑스를 역설했다.
똘레랑스를 실천적 과제로 부각시킨 사람은 그람시였다. 시민 사회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진지전(반대 ‘기동전’)을 주장했던 그람시는 “진지전에서 주도권을 잡는 길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대중의 상식에서 출발해 그 상식을 극복해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진보적인 사람은 논쟁 상대의 견해를 받아들일 필요가 있음을 인정하는 사람이며, 상대의 입장과 논리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것이 맹목적인 이데올로기의 광신에서 벗어나는 길”이라 주장했다.
서양 철학사를 수놓은 숱한 사상가들의 ‘똘레랑스’론(論)을 되짚던 하승우는 다시 홍세화로 돌아와 그의 ‘순진한 똘레랑스’의 가치와 한계를 새롭게 조명하기도 한다. 일정 부분 홍세화의 차분한 주장에 수긍하면서, 요는 거기서 멈추지 말고 새로운 대안을 모색해 보자는 것이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자치’의 기치하에 뭉친 다양한 시민사회의 대안공간들이다. 얼핏 아나키즘을 연상케 하는 자치공간의 전범은 우연찮게도 다시, 프랑스에서 발견된다. 프랑스인들에게 성인의 칭호까지 들었던 피에르 신부의 ‘에마우스Emmaus운동’이 좋은 예다.
“자치는 대중으로 하여금 외부의 도움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권력과 맞서게 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진보운동은 대중을 지도하고 그들을 장악하려 했다. 하지만 그런 운동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 대중의 생각을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 활발히 전개되고 있는 극빈자를 위한 ‘에마우스Emmaus’운동을 창시한 피에르 신부는 절망에 빠진 한 살인자와의 만남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다. 피에르 신부는 그에게 ‘세상이 그를 필요로 한다’는 것을 확신시켰고, 그 살인자는 신부에게 ‘남에게 뭔가를 주는 것’만이 아니라 ‘뭔가를 해줄 것을 요구하는’ 법을 가르쳤다.만나서 대화하고 서로의 필요성을 인정함으로써 희망을 만들어낸 것이다.”(시어도어 젤딘, <인간의 내밀한 역사>에서 재인용.)
프랑스 사람이면 누구나 즐긴다는 와인, 그 와인의 달콤쌉싸름한 맛을 뒤로 물리고 대신 손에 망치와 삽을 든 빈자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빈집과 공터를 찾아다니는 피에르 신부의 표정은 종래 해맑은 천사의 웃음이다. 또한 그 웃음이야말로 <희망의 사회 윤리 똘레랑스>를 쓴 하승우가 천착하는 ‘실천적 똘레랑스’의 참모습이기도 하다.
“진보는 불편하고 귀찮은 것이다. 똘레랑스는 앵똘레랑스와 맞서는 부담을 감수해야 하고 듣기 싫은 목소리도 들어야 하는 것이다. 대중은 그런 진보적인 삶이 불편하고 귀찮아 피하려 하고, 지식인은 그것이 옳다며 강요하려 하니 둘 사이에 틈이 벌어진다. 그 틈을 단단히 밀착시키는 힘은 웃음이다.”
지난했던 2014년의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세월호 참사로 표상되듯 우리의 2014년은 상처와 분노, 갈등과 저항의 한해였다. 와중에 잃어버린 것은 신뢰이며 가없이 멀리 달아난 것은 소통이다. 신뢰와 소통의 바탕은 관용이다. 차이를 인정하고 상대를 먼저 존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잃어버린 신뢰를 회복하고 새로운 소통의 길을 뚫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제 다시 2015년의 새해를 맞게 될 것이다. 무엇으로 맞을 것인가. 2014년의 상처와 상실, 불신과 갈등을 재연할 것인가, 용서와 화해의 새로운 시대를 맞을 것인가. 바라기는, 관용의 미덕이 튼실하게 뿌리를 내리는 원년이거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