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꽃샘추위가 물러가면 농촌은 본격적인 ‘농번기’ 채비로 한창이다. 겨우내 꽁꽁 얼었던 땅을 갈고, 김을 매고, 퇴비를 뿌려 작물을 재배하기 좋은 땅으로 만든다. 도시의 봄은 개나리나 벚꽃과 함께 오지만, 농촌의 봄은 마을 구석구석까지 번지는 진한 퇴비 냄새와 더불어 온다. 귀농 7년 차인 나는 손바닥만한 텃밭 하나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해 농사를 망치기 일쑤인 ‘얼치기 귀농인’이다. 그저 우리 가족 먹을 제철 채소 정도를 길러 먹겠다는 수준이지만 그것도 ‘농사’라고 헥헥거리다 보면 농부에 대한 경외심이 절로 솟아난다.
그동안 내가 겪은 농촌은 전원의 ‘낭만’과는 거리가 멀었다. 계속되는 인구 유출로 이미 고령농이 다수인 현실에서 농사는 그야말로 ‘뼈 빠지게’ 일해봤자 제대로 건지지도 못하는 ‘계륵’이 되어 버렸다. 계속하자니 들이는 노력에 비해 소득은 턱없이 부족하고, 그렇다고 평생을 해 온 생업을 쉽게 포기할 수도 없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3년 기준 전체 농가의 월평균 농업소득은 84만 원이다. 이는 1인당 최저임금과 가구당 최저 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다. 농사만으로는 생계유지가 불가능하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농업을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아야 하는 참담한 수준이다.
‘돌아오는’ 농촌 아닌 ‘도로 나가는’ 농촌
그렇다고 농업을 포기할 수 있나. 농부가 없고 농업이 사라진다는 건 그야말로 ‘재난’상황이다. 밥상에서 신선한 먹거리가 사라지는 것은 물론, 먹거리를 둘러싼 사회적 갈등이 증폭되고 나아가서는 식량 안보도 파탄 날 것이다. 농업과 농촌이 붕괴한다면 이런 극단적인 시나리오가 현실에서 재현될 수 있다. 그만큼 절대 포기할 수도 없고 포기해서도 안 되는 것이 농업, 농촌이다.
농촌을 살리기 위해 귀농을 장려한다고 한다. 지자체별로 정착을 위한 지원 제도들을 내놓고 있다. 안타깝지만 효과는 별로다.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일자리 부족(34.6%)과 부족한 소득(26.9%)으로 인해 무려 71.5%가 정착에 실패하고 도시나 타 지역으로 빠져나갔다. ‘돌아오는’ 농촌이 아니라 ‘도로 나가는’ 농촌인 셈이다. 결국 농촌에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농업은 갈수록 줄어들고 인구는 계속 빠져나가 농촌이 점점 사라져 가는 흐름을 되돌릴 수 없을 것이다.
정기석 마을연구소 소장은 “농민의 힘만으로는 절대 농촌을 살릴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는 최근작 『농부의 나라』에서 “농업은 이미 초라하다. 농민의 수는 5% 남짓하고, 농업생산액은 GDP에서 3%에 불과하다”며 “‘기업천하지대본’의 세상에서 정부는 휴대폰이나 자동차를 내다 팔아 식량을 사 먹으면 된다는 궤변으로 국민들을 호도하고 있다”(9쪽)고 성토했다. 정 소장이 보기에 농정의 진실은 가려져 있고 국민들은 ‘긴가민가’하고 있다.
나는 『농부의 나라』를 읽고서야 농촌에 살면서도 ‘코끼리 코 만지듯’ 경험적으로나 알고 있었던 내 삶터의 실상을 바로 볼 수 있었다. 농촌이라는 ‘삶터’를 살리기 위해서는 농업, 경제, 복지, 교육, 문화, 노동의 ‘통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는데도 전적으로 공감이 갔다. 심지어 농업을 국유화하자거나 농민들에게 월급을 주어 기본소득을 보장하자는 ‘파격적인’ 주장에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은 농촌의 실상이 생각보다 피폐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전부 갈아엎고’ 새로 시작하겠다는 과감한 전환이 없고서야 농업, 농촌을 살릴 길은 요원하다.
새로운 농정의 틀로 논밭을 갈아엎자
책의 제목이기도 한 ‘농부의 나라’는 농민만의 고립농정, 한계농정을 넘어 국민 모두가 ‘조금씩’ 농부인 나라라는 의미다. 정 소장은 ‘국민농업’, ‘공익농업’, ‘지역농업’이라는 세 가지 길을 제시한다.
우선, 5%밖에 안 되는 ‘농민만의 농정’이 아니라 소비자인 95%의 노동자와 도시민, 국민이 협동하고 연대하는 100% 국민농정으로 만들어야 한다. 국민농정은 생산자인 농민(단체)와 소비자인 노동자(노동조합)의 연대를 기본 틀로 한다. 정 소장은 ‘도농 교류’나 ‘도농 상생’이라는 구호에 담긴 불특정 다수를 향한 애매모호하고 공허한 정책 대신, 농민과 노동자가 유기적·지속적으로 협동하는 구체적인 연대의 틀을 만들어보자고 제안한다.
이를 위해서는 농민운동도 ‘농민만의 농민운동’을 벗어나 먼저 노동자와 도시민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 농민은 물론 노동자와 도시민, 국민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사회혁신적이고 협동연대적인 농정과 지역공동체 사업을 펼치자는 것이다. 정 소장은 “상층 지도부와 일부 활동가 중심으로 정치투쟁으로 아스팔트 농사로 매도되는 외양부터 고쳐야 한다”며 “농민운동이 스스로 동력을 새롭게 충전해 활동의 지평을 넓혀 나가야 한다”는(33쪽) 쓴소리도 아끼지 않는다.
다음으로, 농업을 국가기간산업, 생명산업으로 지위를 격상하고 농민들을 ‘공익농민’으로 대접하는 과감한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는 농업의 공익적 가치를 분명히 하고 농민들에게 ‘기본소득’을 지급해야 한다. 정 소장은 ‘공익농민 기본소득제’가 시행되어야 농가 소득이 안정되고 신규 농업 인력이 유입되며 농촌 지역 공동체의 삶의 질도 높아질 수 있다고 본다.
‘공익농민 기본소득제’를 제안했을 때 예상되는 반발에 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문제, 구체적인 실행안과 재원을 마련하는 문제 등은 여전한 과제로 남는다. 다만, 현재 우리 농업과 농촌의 현실은 ‘공익농민 기본소득제’에 대한 전파와 공론화가 필요할 정도로 심각하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결국 정치의 몫이다.
다음으로, 중소농을 중심으로 지역 단위, 마을공동체 단위에서 자급하고 유기적으로 순환하는 ‘지역농업’이 살아나야 지속가능한 농정이 가능해진다. 대기업의 농업진출은 출혈경쟁과 농가 소득 감소를 초래하고 돈 되는 품목에 집중하면서 농업 생산기반도 붕괴될 것이다. 농민은 대기업에 종속된 농산업 노동자로 전락하며 ‘슈퍼 갑’ 대기업은 시장 교섭력이 없는 생산 농가를 자기 통제하에 두려고 할 것이다.
정 소장은 중소농 중심의 마을 공동농업이 대안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개별 경영의 한계를 보완하기 위한 마을 단위 영농 활동을 조직화하고, 공동 경영을 통해 범위 규모의 경제활동이 가능해지면 개별 경영체의 영세상이 극복될 수 있다(92쪽)는 것이다.
국민 모두가 ‘조금씩’ 농부인 나라
몇 년 사이에 유기농 라이프, 웰빙 라이프 열풍이 불었지만, 이것이 농업의 재생과 농촌의 부활로 이어지지 못한 것은 의아한 일이다. 지자체들이 경쟁적으로 뛰어들고 있는 마을공동체 사업도 마찬가지다. 일부 모범적인 사례를 제외하고는 한탕주의 사업으로 변질돼 주민들에게 상처만 남긴 경우도 허다하다. 농촌경제를 살려야 한다면서 중앙 정책 기조는 ‘개방농정’을 고집하고, 지역에서는 협동조합과 같은 지역순환경제 대신 여전히 외부 기업 유치에 열을 올리는 모순된 행태도 바뀔 것 같지 않다.
나는 이 책을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유기농, 웰빙 밥상에는 관심이 많으면서 정작 그 먹거리를 생산하는 농촌 문제에는 둔감한 도시민들이 봤으면 좋다. ‘전문가주의’, ‘행정편의주의’의 틀에 박혀 농촌의 현실을 입체적으로 보지 못하는 관료, 학자들도 읽었으면 좋겠다. 농촌 이슈를 적극적으로 제기하고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며 변화의 새로운 동력을 만들어낼 농민운동, 사회운동 활동가들이 적극적으로 읽고 토론했으면 좋겠다. 농촌 문제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높아져야 새로운 농정 전략에 대한 사회적 논의의 가능성도 열릴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5% 농민의 힘만으로는 절대 농촌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농민과 나머지 국민은 국가적, 사회적 합의를 상호 호혜적으로 유기적으로 이루어야 한다. 그러면 생산자로서 농민은 소비자인 국민의 생명을 책임지고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소비자로서 국민은 생산자 농민의 생활을 든든하게 지키게 될 것이다. 비로소 국민 모두가 함께 식량주권과 국가주권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이다. 농민과 국민이 아름답게 상생하는 나라, 서로 돌보고 나누는 맑고 밝은 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런 ‘농부의 나라’에서 살고 싶다. 그 사람 사는 나라에서, 우리 모두 함께 살고 싶다.(10~11쪽)
원문: 시골아낙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