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다. 책장을 정리하다 우연히 발견한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다시 읽으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 책장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책을 끄집어내기도 하고, 중고서점에서 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사 모으기도 한다. 다시 읽기 위해서다.
읽었던 책 중엔 내용이나 느낌을 잃어버린 것들이 부지기수다. 온전히 읽었다고 말하기 힘들다. 이미 읽었다는 그 생각이 책에 대한 왜곡과 몰이해를 낳기도 한다. 그래서 다시 읽는다. 다시 읽기야 말로 책읽기의 진정한 즐거움이라는 걸 이즈음 새삼 느낀다. 오늘은 예전에 읽었던 우리나라의 중·단편소설들 중에서 ‘내 맘대로 베스트 10’을 뽑아본다. 개인적인 취향일 뿐이다. 객관적인 기준이란 없다.
1. 이범선, <오발탄>
쿼바디스(신이시어, 어디로 가시나이까?), 노예들이 일으킨 반란을 상징하는 말이다.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반란, 아니 혁명을 일으켰지만 막상 그들은 가야할 바를 모르고 방황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패배가 예견된 반란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네 삶 역시 그와 다르지 않다. 척박한 현실, 그 현실 속에서 끝없이 주어지는 책임의식. 그 책임의 무게에 짓눌린 어느 중년은 마침내 ‘쿼바디스’를 외친다. 작가 이범선 혹은 소설 속 철호의 쿼바디스는 ‘오발탄’이라는 이름이었다.
한 가정의 가장인 철호는 끝내 가야 할 방향을 잡지 못하고 스스로를 ‘조물주의 오발탄’이라 뇌까리며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절망과 좌절 속에서 정신적 중심을 잃은 불행한 인간들에 대한 고발이자 아픈 증언이다.
2. 김승옥, <무진기행>
순천만의 갈대숲을 거닐며 <무진기행>의 윤희중과 하인숙을 떠올리곤 했다. 작가 신경숙은 스무 살 무렵 이 소설을 대학노트에 필사했다고 한다. “문장 하나하나를 짚어가며 대학노트에 옮겨 써내려가다가 슬며시 눈시울이 젖기도 했다.”고 고백한다.
내가 생각하는 <무진기행>은 이별노래다.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남녀는 자신의 욕망을 가린 채 상대의 욕망을 탐닉하다가 예정된 이별을 맞게 된다.
둘의 마음이 일치하는 지점은 사랑이 아니라 속물근성일 뿐이다. 뻔히 알면서도 그걸 감추려니 이별은 당연한 귀결일 뿐이다.
계절이 다 가기 전에 순천만, 아니 무진기행에 나서보고 싶어진다.
3. 이순원, <은비령>
남녀의 사랑을 다룬 소설이지만 불꽃 튀는 청춘남녀의 뜨거운 사랑이 아니다. 여자는 과부, 남자는 별거 중인 중년이다. 그들 사이에는 죽은 친구에 대한 심적 부담이 가로막고 있다. 남자는 심적인 부담을 벗어버리기 위해 길을 떠난다. 강원도 산자락의 깊은 계곡, 은비령에서 영원한 사랑의 의미를 곱씹는다.
별들은 자기 궤도를 가지고 있어서 다시 만나는데 2,500만 년이 걸린다. 인간들 역시 자기 궤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이 만나는 지점이 바로 은비령이다. 그러나 그 만남은 곧 이별을 맞는다. 행성이 그러하듯 궤도가 끌어당기는 힘에 의해 관계에서 튕겨져 나가게 되는 것이다. 은비령은 만남과 헤어짐의 상징이다.
4. 윤대녕, <상춘곡>
<상춘곡>은 윤대녕 문학의 집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탁월한 작품들이 실려 있는 소설집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에 수록된 작품이다. “‘소설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계속 소설을 쓰기 위해’ 등단했다.”는 작가의 말이 인상적이다.
시적 상상력과 회화적인 감수성, 여성 못지않은 섬세한 문체가 어우러진 현대 단편문학의 진수라 할 작품들이다.
5. 김연수,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김연수의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에 실린 작품이다. 여자 친구가 죽었다. 자살한 것이다. 그런데 그의 유서의 어디에서 나의 얘기는 없다. 나는 그녀에게 무엇이었을까. 사랑하긴 했던 걸까.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 것으로 그녀의 죽음을 잊으려 한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책읽기의 끝에서 그녀가 죽기 전 마지막에 읽었던 책을 발견한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다.
그녀를 잊기 위해서,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서, 그도 아니라면 나도 그녀의 뒤를 따르기 위해서 낭가파르바트 원정대에 참가한다. 그리고 마침내 깨닫는다. 다시 한 달을 가서 설산을 넘으면, 바로 거기 문장이 끝나는 곳에서 나타나는 새로운 시작, 니르바나, 이로써 모든 여행은 끝나고 세계의 끝에 선다.
6. 천운영, <바늘>
소름 끼치도록 날카로운 묘사가 빛나는 소설이다. 동명 소설집에 실린 표제작이며 200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단편 부분 수상작이다. 추한 외모를 가진 여자는 남자들의 몸에 문신을 한다. 한 땀 한 땀 육체 위를 걷는 바늘은 그녀의 생에 있어 찰나이며 영원이다.
살에 꽂는 첫 땀. 나는 이 순간을 가장 사랑한다. 숨을 죽이고 살갗에 첫 땀을 뜨면 순간적으로 그 틈에 피가 맺힌다. 우리는 그것을 ‘첫이슬’이라고 부른다.
내게 바늘을 삼켜 문장을 지으리라 마음도록 했던 소설이다. 날카로운 바늘 끝의 통증을 수없이 겪고 나서야 비로소 문장을 지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새삼 청년기 ‘문청’의 감상을 자극한 소설이다. 이 글을 쓰고 난 뒤 다시 읽을 것이다. 다섯 번째쯤 될듯한 다시 읽기다.
7. 김훈, <화장>
김훈 소설집 <강산무진>에 수록된 작품이다. 작가의 첫 단편이자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다.
나이 어린 동료 직원에게 연정을 품은 초로의 사내의 떨리는 마음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뇌종양인 아내의 병수발을 하는 그녀를 보며 수줍어 어찌할 줄 모르는 주인공의 마음과 병들고 시들어가는 인간의 몸을 적나라하고 리얼한 묘사로 그려냈다.
“간호사가 물러갔다. 도뇨관을 따라서 오줌은 장난감 물총을 쏘듯 간헐적으로 흘러나왔다. 쪼르륵 쪼르륵… 침대 밑 오줌통으로 오줌이 떨어져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광의 압박이 서서히 줄어들면서, 몰아쉬는 숨이 쉬어졌다.(…) 쪼르륵… 쪼르륵… 오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소리는 멀고도 선명했다. 그 분홍의 바다 저쪽 끝으로 죽은 아내의 상여가 흘러가고 있었다.”
안타깝고 부끄럽지만 요즘 들어 실감하고 있는 나의 독백이기도 하다.
8. 김애란, <비행운>
김애란은 ‘문단의 차세대 대표주자’라는 수식을 달고 산 작가이다. 그러나 그 말의 의미와 의도를 실감하지 못했었다. 소설집 <비행운>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특히 눈에 띄는 작품은 <하루의 축>이다. 원형탈모를 감추기 위해 매일 모자를 쓰고 일하는 인천공항의 50대 청소부인 기옥 씨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소설이다. 외롭고 고단하게 살아가는 여자의 인생과, 그 여자의 눈에 비친 공항을 드나드는 사람들의 모습이 절묘하게 대비된다.
“딴에는 혼신의 힘을 다해 중력을 극복하는 중일 테지만 겉으로는 침착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얼마 뒤 녀석이 지나간 자리에 안도의 긴 한숨 자국이 드러났다. 사람들이 비행운이라 부르는 구름이었다.”
비행운(飛行雲)이란 ‘차고 습한 대기 속을 나는 비행기의 자취를 따라 생기는 구름’을 말한다. 늘 비행운을 바라보며 살지만 현실은 늘 ‘비행운(非幸運)’에 발목이 잡혀 있다. 험난한 현실을 살고 있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로 읽힌다.
9. 신경숙, <세상 끝의 신발>
신경숙의 소설집 <모르는 여인들>에 들어 있는 소설이다. “신발 이야기를 해야겠다.”로 시작되는 소설은 가슴 시린 과거의 기억을 되살려 놓는다.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신분의 차이에 따른 행동의 갈라짐. 희생과 부끄러움이 대조를 이루는 대목에서 왠지 가슴 한쪽이 아려오는 느낌을 받게 된다.
“나는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어지면 그 사람 신발에 발을 몰래 넣어보고 싶다. 소녀 시절엔 내 또래 여자아이들의 운동화 속에, 처녀 시절엔 그 남자들의 구두 속에 내 발을 몰래 넣어보았을 것이다. 여자든 남자든 젊은이거나 나이 든 사람이거나 가리지 않았다. 그동안 나와 친밀하게 지냈거나 지금 그렇게 지내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도 모르게 이미 내가 그들의 신발에 내 발을 가만 집어넣어 봤다는 것을 알는지.”
누군가의 신발에 발을 넣어 본다는 것, 남몰래 하는 일이지만 그를 알고, 이해하기 위한 작은 소망을 표현한 것일 테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의 신발에 발을 넣어 봤던 걸까.
10. 은희경,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작가가 은희경이라는 데야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 건가. 다만, 권두에서 소개하는 눈송이에 관한 에피소드를 그대로 옮겨 여러분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것으로 궁금증만 자아내려 한다. 궁금하시면 일독하시라!
수업이 심심하게 느껴지는 겨울날 오후에는 옆자리 애랑 같이 내기하며 놀았다. 그것은 이런 식으로 하는 내기다. 창문 밖에서 풀풀 나는 눈송이 속에서 각자가 하나씩 눈송이를 뽑는다. 건너편 교실 저 창문 언저리에서 운명적으로 뽑힌 그 눈송이 하나만을 눈으로 줄곧 따라간다. 먼저 눈송이가 땅에 착지해버린 쪽이 지는 것이다. ‘정했어’ 내가 작은 소리로 말하자 ‘나도’ 하고 그 애도 말한다. 그 애가 뽑은 눈송이가 어느 것인지 나는 도대체 모르지만, 하여튼 제 것을 따라간다.
잠시 후 어느 쪽인가 말한다. ‘떨어졌어.’ ‘내가 이겼네.’ 또 하나가 말한다. 거짓말해도 절대 들킬 수 없는데 서로 속일 생각 하나 없이 선생님께 야단맞을 때까지 열중했었다. 놓치지 않도록, 딴 눈송이들과 헷갈리지 않도록 온 신경을 다 집중시키고 따라가야 한다.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나는 한때 그런 식으로 사람을 만났다. 아직도 눈보라 속 여전히 그 눈송이는 지상에 안 닿아 있다. — 사이토 마리코, <눈보라>
원문: 대안미디어 너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