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드라마를 본 후 현지에서 느낀 공포의 경험
미국에 유학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텔레비전을 틀면 온갖 범죄수사물에서 총격신과 피 튀기는 살인 장면이 끊이지 않았다. 한국에야 불륜드라마가 주류를 이루지만 미국드라마의 주류는 역시 범죄물이다. 처음에는 한국과 너무나 다른 미디어 환경에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그 탓인지 잠재의식 속에서 나도 모르게 지나가는 누군가가 갑자기 총을 꺼내 나에게 쏠 것만 같았다.
거리를 돌아다닐 때 항상 주위를 살피는 습관도 생겼다. 길을 걸을 땐 갑자기 차가 다가와 창문을 내리고 길을 물어보는 사람조차 무서웠다. 시간이 흐르고 미국생활에 어느 정도 적응하게 되자, 내가 느꼈던 공포는 텔레비전에서 본 폭력의 재현을 실제 현실과 착각한 것이 원인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미디어학자 조지 거버너(George Gerbner)가 “사람들이 오랜 시간 텔레비전에서 그려진 현실을 보다 보면 그걸 실재 현실로 점차 믿게 된다”라며 주장한 배양이론을 실제로 몸소 느끼게 되었던 것이다. 사실 우리 동네는 텔레비전에서 보던 갱들이 밀집한 위험지구와는 거리가 먼, 범죄율이 낮고 평화로워 살기 좋기로 소문난 대학도시였기에 내가 느낀 공포는 더더욱 비현실적이었다.
미디어 못지 않은 블록버스터 총기 난사 살인사건의 출현
블럭버스터 액션영화는 말할 것도 없었고,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도 폭력적인 이미지는 흘러 넘친다. ‘로 앤 오더’ (Law and Order), ‘씨에스아이’ (CSI)는 아주 양반이고, ‘덱스터’ (Dexter), ‘크리미널 마인드’ (Criminal Minds)나 ‘더 팔로잉’ (The Following) 같은 작품은 잔혹한 연쇄살인범의 이야기가 극의 중심을 차지한다. 총기는 드라마에서 갈등을 표현하는 데 없어서는 안될 주요 소도구이다. ‘콜 오브 듀티’ (Call of Duty) 같은 게임에도 총기는 빠질 수 없는 아이템으로서 유저에게 오락을 제공한다. 이처럼 미디어로 소비하는 가상의 총기가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스트레스와 불가분의 관계인 현대사회에서 게임이나 비디오는 생활에 활력을 주는 효과가 있다. 무자비한 악당에 맞서 총질하는 주인공에 잠시 감정이입을 하거나, 직접 게임 속 캐릭터가 되어 전투에 참여하는 동안 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속 시원한 짜릿함을 느낄 수 있다. 게임을 사고, 영화티켓을 구매하고, 케이블 요금을 지급하고 얻는 정당한 스트레스 해소에 누가 참견할 수 있는가. 스트레스를 타인에게 풀지 않고 미디어 속의 캐릭터에게 푸는 행동. 이보다 더 건전하고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방법이 또 있을까?
그러나 2012년 7월 20일 금요일 밤 콜로라도의 한 극장에서 일어난 영화광팬의 총기 난사는 미디어 속 폭력의 영향력에 관한 논의를 다시금 불러일으켰다. ‘다크나이트 라이즈’ (The Dark Night Rises)의 개봉일, 심야상영을 보려고 많은 사람이 극장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콜로라도 대학교 대학원 중퇴생이자 배트맨의 열광적 팬이었던 제임스 이건 홈즈(James Eagan Holmes)가 방독면과 방탄 옷으로 중무장을 한 채 최루탄 던지면서 극장 안으로 들어왔다.
이때까지만 해도 극장 안의 관객들은 영화의 개봉을 위한 극장 측의 이벤트쯤으로 여기고 있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홈즈는 갑자기 소총을 꺼내 들고, 사람들을 향해 난사하기 시작했다. 이 사건으로 12명이 죽고 58명이 부상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영화의 폭력과 실제의 폭력이 교차했던 사건으로 미디어의 폭력성에 대한 의례적인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건이 일어난 직후, 극장에서 총격전이 벌어지는 장면이 우연히도 미리 포함되어 있었던, 라이언 고슬링 (Ryan Gosling), 엠마 스톤 (Emma Stone), 숀 펜 (Sean Penn) 등의 초호화 캐스팅의 영화 ‘캥스터 스쿼드’ (Gangster Squad)는 총격 장면을 대체하기 위해 재촬영을 감행했고, 예정된 개봉일도 미뤄야만 했다. 실제로 일어났던 끔찍한 사건을 그대로 연상하게 하는 장면이 정서상 맞지도 않을뿐더러 영화 흥행에도 도움이 될 리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을 벗어나 꿈을 꾸는 극장도 폭력으로부터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총기규제에 대한 논의가 일어나는 듯했으나, 언제나 그러했듯이 총기규제에 관한 이야기는 미디어에서 다시 수면 아래로 내려가 버렸다. 미디어는 정신병자 한 명에 초점이 맞추었고, 총기사고가 일어나는 구조적 문제를 깊이 다루지는 못했다.
그러던 2012년 12월 14일 또 다른 총기 난사 사건이 총기규제 이슈에 기름을 들이부었다. 코네티컷주 초등학교에서 어린아이 20명을 비롯하여 모두 28명의 목숨을 앗아간 대형참사가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을 계기로 조 바이든 부통령이 직접 나서서 각계 인사들을 만나 의견을 수렴하고 있으며,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총기 규제에 관한 법안을 제정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총을 문제삼지 않고 게임, 영화, 드라마를 문제삼는 이상한 미국총기협회
결국, 문제는 가상의 폭력이 아니라, 그것이 현실 속에서 발생하는 폭력에 영향을 미치느냐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총기사고로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가고 있다. 쇼핑몰, 학교, 극장, 식당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발생하는 총기사고에 속수무책이다. 테러나 전쟁이 미국 바깥에서 안으로 들어온 것만 같은 세기말적 불안이 미국 전역으로 퍼지고 있다.
총기 난사에 사용된 무기 중에 대부분은 합법적으로 구매된 것이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반자동 소총을 비롯한 군대 무기를 누구나 구매할 수 있는 시장이다. 강도와 도둑으로부터 목숨과 재산을 지켜야 했던 서부극 시대가 100년도 넘게 흐른 21세기에 저런 무기까지 왜 필요한 걸까. 미국이 멕시코나 캐나다와 전쟁을 치러야 하는 것도 아니잖나. 2011년 갤럽 조사에 의하면, 미국 가정의 45퍼센트가 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한 집 건너 하나씩 총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웃과 다툼은 삼가는 게 좋을 것 같다.
2010년 총기사고로 숨진 미국인은 9,960명에 이른다. 온두라스, 엘살바도르, 자메이카 같은 남미의 위험국가에 비하면 적은 비율이지만 비슷한 경제수준의 선진국 사이에서는 최악이다. 총기문제는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사회 파괴적 수준이 되었다.
오바마의 총기규제에 관한 찬성 여론은 높은 편이지만, 미국 총기협회의 반대에 부딪혀 쉽지 않을 것 같다. 4백만 명의 회원과 막강한 로비력을 가진 총기협회와 그 뒤에는 무시무시한 무기산업이 버티고 있다. 이들은 무기규제보다 더 많은 총으로 무장하기를 권하는 어이없는 판매전략을 쓰고 있다.
이 농담 같은 상술이 오히려 먹혀서 실제로 대량학살 이후 총기판매가 늘어나는 효과를 톡톡히 보았다. 총기협회는 코네티컷 사건으로 나빠진 여론에 반발하며, 영화, 텔레비전, 게임산업에 모든 책임을 떠넘기려 한다. 실제 총을 가지는 것은 문제없고 가상의 총이 더 큰 문제라는 황당한 주장이다.
빵과 우유처럼 마트에서 총을 살 수 있는 미국, 공포는 계속된다
가상의 폭력이 실제 폭력을 조장한다면, 폭력 게임을 더 많이 즐기는 한국, 일본, 영국 등의 나라에서 더 많은 총기사고가 있어야 한다. 게이머가 스타인 나라는 마땅히 위험한 나라로 분류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나라들은 총기를 쉽게 살 수 없으니 그로 말미암은 살인도 적을 수밖에 없다. 수사물을 즐겨보는 나 같은 사람이 더 폭력적으로 변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다. 주마다 법이 조금씩 다르지만, 얼마 전에 월마트에 장을 보러 갔다가 사냥총을 팔고 있는 걸 보고 무척 놀랐다. 한국으로 치면 대형 마트에서 총을 팔고 있는 셈이다. 우유와 빵을 사듯이 총을 고르고 살 수 있는 환경이라니.
총을 사는 사람의 정신병 기록을 조회하고 군대식 공격무기를 규제하는 것조차 반대하는 총기협회의 입장은 이성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총기협회 부회장인 웨인 라피에르(Wayne LaPierre)의 “미디어가 삶을 농담처럼 보며 살인을 삶의 방식으로 묘사하면서, 이를 버젓이 오락이라고 부른다”라며 연예산업 종사자들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은 자신들에게 향한 사회적 비판과 규제의 움직임을 미디어 산업을 희생양으로 삼아 교묘히 피해 가려는 전략인듯하다. 사람들의 주목을 집중적으로 받는 연예인이나 연예산업으로 화제를 몰고 가서 자신들은 그 뒤에 숨으려는 것이다.
물론 미디어 속 폭력이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면죄부를 주려는 의도는 아니다. 그러나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총 쏘는 장면이 안 나오면, 실제로 총기 사고가 사라질까? 화면에 나오는 총격전이 사라져, 대형 총기난사 사건들이 사라질 수 있다면 얼마든지 찬성할 수도 있겠지만, 이에 대해 많은 사람이 회의적인 입장이다. 진짜 총을 지금처럼 쉽게 구할 수 있게 두면 텔레비전이나 영화에 총이 나오던 나오지 않던 상관없이 더 많은 진짜 사람이 죽어갈 것이다.
해마다 늘어나는 총기판매량과 비례해서 총기사고로 인한 인명피해도 커지고 있다. 죽음의 산업이라고 불리는 총기시장이 성장은 인명의 희생이 따라올 수밖에 없다. 총기협회에서 문제로 삼고 있는 미디어 속 생명경시 풍조가 현실에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확증은 없다. 총기협회의 주장을 따르면, 사람들은 오락으로 즐기는 것과 현실 속의 폭력을 구별하지 못하는 정신병자여야 한다.
누군가를 죽일 수밖에 없는 운명을 타고난 총기를 총기협회는 방어용이라고 말하는데, 그것 자체가 언어도단이다. 총기 난사를 하는 범인의 손에 군사용 총이 들려있지 않았다면 그 많은 사람이 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국 드라마에서 담배 피우는 장면이 금지된 이후, 실제로 사람들이 담배를 안 피우는 건 아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