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래 국정원 직원의 유서를 읽으며
원장님 차장님 국장님께
동료와 국민들께 큰 논란이 되어 죄송합니다.
업무에 대한 열정으로, 그리고 직원의 의무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어떤 나라든 권력자든 정보기관을 필요로 한다. 러시아 짜르의 비밀 경찰에 지긋지긋하게 시달리던 레닌이 혁명이 성공하자마자 폴란드인 체르진스키에게 혁명 정부의 정보기관 체카를 만들게 한 것은 일례에 불과하다.
실제 적국이든 가상 적국이든 동맹이든 혈맹이든 자국과 이해관계가 있는 모든 나라의 정보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자국의 안전과 이익을 침해하려는 타국과 그와 연계된 자국 내 인사들에 대해 방첩 활동을 벌이는 것은 정보기관의 임무이자 존재 가치다. 다시 한 번 정보기관은 필요하다. 그리고 그 기관원들은 대개 열심히 일한다. 사명감과 헌신성을 지니고.
지나친 업무에 대한 욕심이 오늘의 사태를 일으킨 듯합니다.
대개 정보기관의 문제는 ‘업무에 대한 욕심’ 때문에 발생한다. 원래 점잖지 못한 직업이고 첩보전의 한가운데에서는 목숨을 내놓는 일도 발생하는 현실에서 업무에 대한 욕심과 사명감과 열정 없이 버티기는 힘들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항상 ‘무엇을 위한?’이라는 질문에서 발생한다. 국정원 직원에게 묻는다면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대한민국을 위해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대한민국의 가치를 지켜야 한다. 대한민국에서 정보기관은 국가에 충성하는 집단이지 정권이나 개인에 충성하는 집단일 수 없다. 그것이 대한민국의 가치고 중앙정보부라는 수족 같은 정보기관을 운용하다가 그 수장에 의해 죽음을 맞은 전직 대통령이 주는 교훈이다.
하지만 국정원은 지난 선거 때, 그리고 타국 정상과의 대화를 ‘조직의 명예’를 위해 까발리던 순간 그 가치를 초저녁에 상실했다. 가치를 상실한 정보기관의 ‘업무 욕심’이란 결국 죄와 사망을 낳는 욕심일 뿐이다. 이 불행한 누군가의 아버지이자 남편일, 내 또래 정보기관원의 등을 떠민 것은 다름 아닌 국정원 자체라는 뜻이다.
정말 내국인에 대한, 선거에 대한 사찰은 전혀 없었습니다. 외부에 대한 파장보다 국정원의 위상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혹시나 대테러, 대북 공작활동에 오해를 일으킨 지원했던 자료를 삭제하였습니다.
죽음 앞에 선 사람의 말을 어찌 함부로 부인하랴. 내국인에 대한 사찰, 선거에 대한 사찰은 전혀 없었다는 말을 입술 깨물며 믿어 보지만 유서의 다음 구절에서 나는 고인의 고백을 안타깝게 부인할 수밖에 없다.
우선 외부에 대한 파장보다 국정원의 위상이 중요하다는 것은 조직원의 조직 이기주의에 불과하다. 그는 국정원 직원이기 이전에 대한민국 공무원이고 ‘나랏밥’ 먹는 이였다. 그가 말하는 ‘내국인’에는 과연 북한과 연계됐다고 그가 의심한 내국인은 포함될까 그렇지 않을까.
명색 국회의원이라는 작자가 “대북 용의자는 순수 민간인이 아니라”는 해괴한 발언을 일삼는 나라이니 순수한 내국인과 비순수한 내국인을 이미 분리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비순수한 내국인에 대해서도 대한민국 법은 절차를 밟아 감청하고 수사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그걸 어겼다면 처벌받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건 물론 ‘들켰다면’이겠지만.)
이제 북망산에 든 이를 탓해서 무엇하겠냐마는, 안타깝게 고인에게 묻고 싶다. “왜 삭제하고 죽었는가.” 판단은 당신이 하는 게 아니라 남은 이들이 하는 것인데.
책임감 강한 공무원의 마지막 울분이 아니었을까
저의 부족한 판단이 저지른 실수였습니다. 그러나 이를 포함해서 모든 저의 행위는 우려하실 부분이 전혀 없습니다. 저와 같이 일했던 동료들께 죄송할 따름입니다.
아마도 고인은 책임감이 보통 사람과 비교가 안 될 만큼 강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이런 사람 주위에서도 종종 본다. 물론 무책임한 자들보다는 귀하지만 그렇다고 아주 드물지도 않다. 자신의 책임을 넘어서는 일인데도 그에 민감하고 자신이 모든 것을 안고 가겠다며 그로써 사태의 해결을 바라는 이들이다.
자신이 다 짊어지고 가면 비판의 칼끝은 무뎌지고 태풍의 풍속은 낮아지리라 기대하면서 자신의 희생을 기꺼이 자처한다. 그들의 책임감은 존중받아 마땅하다. 자기가 똥을 싸놓고도 남을 그 위에 눌러 앉히고 이놈이 똥 쌌다고 소리 지르는 무뢰한들을 어디 한 두 번 보았던가. 그들에 비하면 백배 천배 나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책임감 있는 사람들의 희생이 되레 “똥 싸놓고 남한테 미루는” 놈들의 밑씻개로 쓰이는 일이 흔하다는 것이다. 자기 편의 권력 쟁취와 유지를 위해 정보기관을 손발로 이용한 사람들은 그 죽음 뒤에서 한숨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저와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잘 조치해 주시기 바랍니다. 국정원 직원이 본연의 업무에 수행함에 있어 한치의 주저함이나 회피함이 없도록 조직을 잘 이끌어 주시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그의 유서 중 핵심이다. 나에게 이 고지식하고 책임감 강한 공무원의 마지막 말은 바로 국정원을 이 모양으로 만든 사람들에게 보내는 울분이고 화살로 보인다. 차마 윗사람들을 공격하지 못하고 자신의 동료들을 비난조차 할 수 없는 사람의 마지막 ‘부탁’으로 들린다. ‘조직을 이끄는’ 사람들이 국정원 본연의 업무에서 벗어났으며, 결국 업무를 할 때 주저함이나 회피함을 가져 왔다고 말하고 싶었던 한 공무원의 항변으로 들린다.
왜 주저함이 없었겠는가. 명색 대한민국 최정예 정보 기관원으로서 골방에 들어앉아 ‘좌익 효수’, ‘전라도 홍어’를 지껄이는 댓글을 달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얼마나 그 짓이 하기 싫었겠는가. “핸드폰은 감청이 안 됩니다.”고 태연히 말하던 간부가 “내일까지 걔들 통화 풀어서 가지고 와. 영장? 자네 하루 이틀 이 일 하나?”라고 말했다면 어찌 회피함이 없었겠는가.
결국 이 공무원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건 국정원이다. “국가 안위를 위해서는 해킹을 못 할 이유가 뭐냐?”고 하는 여당 대표이고 “인터넷에서 우리가 밀린다.”며 ‘원장님 말씀’을 지껄이던 원세훈이고 그 짓 끝에 당선됐으면서도 그에 대해 유감 표명 한 번 하지 않은 뻔뻔스런 이 나라 대통령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그 정도 직무상 책임감이면 천직이라고 해도 좋았을 텐데 다음 생에 태어나면 제대로 된 나라의 정보기관원이 돼서 책임을 지면 질망정 이렇게 허무하게 목숨을 스스로 앗아가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원문: 산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