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인터스텔라>는 대단히 경이로운 역작이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뉴턴의 만유인력에서부터 빛과 시간, 빛과 공간에 대한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고전물리학의 법칙을 뒤집는 양자물리학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방대하고도 복잡한 내용을 영화로 완벽히 구현해내는 데 성공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를 100% 이해하지 못한다. 과학방면으로 완전한 ‘무식자’이니 영화의 내용을 이해할만한 배경지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의 대단한 점은 작품 그 자체에도 있지만, 나 같은 과학 ‘무식자’마저도 양자 물리학과 같은 첨단 과학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싱귤래리티(singularity). ‘특이점’이라고 번역되는 이 말은, 미래에 기술발전 속도가 급속히 변함으로써 그 영향이 넓어져 인간의 생활이 되돌릴 수 없도록 변화되는 기점을 말한다. 미래학자들은 2045년을 ‘싱귤래리티’로 전망한다. 대체로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 AI)이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시점이다. 공상과학영화에서나 가능했던 인간과 로봇의 공존 시대가 바로 턱밑에 와 있다는 사실은 여전히 실감 나지 않는 상상 속 얘기 같다.
경제학자 장하준 교수는 『그들이 말하지 않은 23가지』에서 “전기, 수도, 가스와 더불어 가전제품의 등장은 세상의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세탁기의 발명과 상용화는 여성들의 노동시장 참여 확대로 인한 경제적 생산성 향상뿐만 아니라, 여성 지위 상승과 남성 지위 변화, 여성의 경제활동으로 인한 자녀 양육비용 상승과 자녀 수의 감소, 전통적인 가족 내 역학관계 변화 등 사회 문화적인 변화를 몰고 왔다.
몇 가지 사례만 보더라도 과학은 단순한 ‘기술’의 영역이 아니다. 과학은 세상을 보는 눈이며, 세상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 있는 무기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시절, 인문·자연계의 갈림길에서 인문계를 택했던 순간부터 수학과 과학을 완전히 포기하고 살면서 특별히 사는 데 지장이 있다고 느껴본 적은 없었다. 오히려 올바른 세계관을 갖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인문학 교육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 확고했다.
그런데 지금, 이 믿음이 흔들리고 있다.
인문학 중시, 과연 올바르기만 한 것일까?
대안교육 현장에서 30년 넘게 활동해 온 교사 이철국은 『교육 빅뱅』에서 인문학 위주 교육에 문제를 제기한다. 나아가 인문학에 치우친 교육을 답습하며 복고적인 경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대안학교의 현황도 날카롭게 비판한다.
뒤늦게 자연과학에 눈을 뜨면서 1, 2차원에 머무르고 있었던 지적 수준을 벗어날 수 있었다는 그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이라는 두 개의 눈으로 세상을 봐야 하므로, 우리 사회의 심각한 지적 불균형과 편식을 바로잡아야 한다. 자연과학에 기초한 물리적 세계관과 인문학에 바탕을 둔 심미적 세계관이 만나서 조화로운 세계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127쪽)고 강조한다.
자연과학 공부는 단순히 어떤 공부를 한다는 의미 이상의 깊은 뜻을 갖는다.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는 우리 행성의 전 역사를 이해하는 것은 인간 사회를 잘 보전하는데 필수 조건이다. 자연과학으로 인해 넓어진 지평으로부터 인간과 다른 생명체들 간의 연대, 나아가 인간과 전체 자연계 사이의 연대라는 관점을 발견해나갈 수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과학이 할 일도 많다. 저자는 “점점 더 기승을 부리는 비열한 인종주의, 계층과 지역 간 불평등, 운명에 대한 체념, 그리고 기술의 악용에 맞서기 위해 과학의 엄정성은 가능한 한 빨리 시민사회가 손에 넣어야 할 필수 불가결한 무기”라며 “과학자는 정의와 평등의 파수꾼이 될 수 있고, 교사는 편견과 고정관념에 대항하는 전사가 될 수 있다”(139쪽)고 역설했다.
대안학교 교사이기도 한 저자는 자연과학 공부를 통해 비로소 아이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그는 “인문학의 눈으로만 바라본 교육과 아이의 모습은 뿌연 안갯속에 있었는데, 천체물리학, 생물학, 신경과학을 공부하면서 시야가 선명해지기 시작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두 눈으로 보게 되자 비로소 교육과 아이라는 상이 제대로 맺히기 시작한 것”이라며 “세계는 미리 결정되어 있고 아이들의 미래까지도 이미 정해져 있다고 보는 뉴턴식 세계관과 교육관을 넘어서고자 했다. 인간과 자연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아이들의 미래는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려 있다는 양자역학적 세계관이 오히려 교육을 새롭게 이해하게 한다”(5쪽)고 했다.
기초과학을 통해 학생들의 논리력이 향상되고 비판적 사고가 형성되면서 창의력이 나옵니다. 예를 들어 천체물리학은 우주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논리적 사고를 싹트게 합니다. 최근의 이슈인 환경이나 에너지 문제도 물리학을 알면 더 치밀하게 에너지를 관리하고 오염에 대처하는 방법을 알 수 있습니다.
교육에서 과학의 역할과 인문학의 역할 사이에 있는 해묵은 대립을 해소해야 합니다. 과학과 인문학의 통합된 지식은 우리가 사는 세상이 아름답고 놀라울 뿐만 아니라, 연약한 행성 지구라는 사실 속에 모든 젊은이를 융합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과학은 범세계적 문화며, 지구상 어느 곳에서도 똑같고, 우주 어디에 있든 간에 우리가 채택해야 할 교육의 주된 내용이어야 할 것입니다.
특히 과학을 잘 가르치면 학생들이 인류가 무엇을 발견해 왔는가를 놀라움 속에서 인정하고, 신비로움이 더 생기며, 아직도 무엇을 더 배워야 하는가에 대한 의문을 무럭무럭 자라게 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과학에 근거한 21세기 교육의 가장 깊은 목적입니다.
─ 2006년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조지 스무트, 129~130쪽
세상의 진리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인문학과 과학은 동일한 물음을 갖고 있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어색한 분리, 혹은 인문학으로 경도된 교육은 지적 불균형을 낳는다.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함께 수용해 지적 발전을 이루고 세계관의 균형을 찾아가야 한다.
대안학교는 진짜 ‘대안’이 되고 있는가?
<인터스텔라>에서 보여준 양자물리학의 문법으로 세상을 바라보면 기존의 관념을 뒤집는 지적 전복이 일어난다. 예컨대 양자적 사고로 교육을 바라보면 뉴턴의 이론에 근거한 고전물리학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기존 교육의 문제점을 읽어낼 수 있다.
이 세계를 정밀하게 조립된 시계 같은 기계로 인식하는 뉴턴식 고전물리학의 세계관에서 유래한 교육관이 지난 3백 년 동안 이 세상과 학교 교육을 지배해왔다. 학교에서 아이들은 위계질서와 확실성, 인과관계, ‘둘 중의 하나’의 사고방식, 이 아이는 이렇게 저 아이는 저렇게 될 것이다, 맞는 것 혹은 틀린 것 고르기 등 기계적 세계관을 받아들이도록 배우면서 자랐다.
저자는 “만약 교육에서 연관성보다는 개별성을 찾고, 과학과 예술이 별개라고 생각하고, 수업에 학생 참여를 배제하며, 둘 중 하나 식의 질문과 학습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면 그것은 여전히 뉴턴식 사고를 반영한 방식”(104쪽)이라고 본다.
그는 “고전물리학적 사고가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면, 양자역학적 사고는 ‘이것도 저것도’라고 보면 된다. 양자택일 혹은 ‘둘 중의 하나’에서 ‘양쪽 모두’로의 전환이다. 이제 우리 사고가 통합적이고 유연하게 확장될 수 있는 과학적 기반이 마련되었다”며 “선생은 가르치고 아이는 배운다는 일방통행에서, 선생과 아이가 함께 배우고 가르친다는 양방향 상호작용으로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111쪽)고 설명했다.
대안학교 교사이기도 한 저자가 보기에 제도권 학교 교육은 뉴턴식 세계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고, 대안학교는 인문학 교육에 비해 과학 교육 자체를 등한시 하는 편향적 경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대안학교에서 자연과학 공부의 필요성을 역설해 온 저자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융합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대안학교에 왜 이과 출신 교사가 적을까? 왜 대안학교에서는 자연과학 전공 교사를 적극적으로 모집하지 않는가? 내 생각으로는 개념이 없었고 인식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대안학교는 인문학으로 심하게 경도된 한국 사회의 정확한 축소판이었다. 학교에 과학 교사가 없는데 어떻게 과학 수업이 이루어지겠는가? 교사회와 부모는 이런 문제의식을 확실히 가져야 한다.(125~126쪽)
뿌리 깊은 인문학 편향과 자연과학 전공 교사의 부족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대안학교는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균형 있게 공부할 수 있는 좋은 토양임이 분명하다. 대안교육은 본질상 틀에 갇히지 않는 자유로운 탐구를 지향하는 교육이기 때문이다. ‘틀을 깨는 교육’이라는 측면에서 진정한 학습이란 인문학과 자연과학을 비판적이고 균형 있게 가르치는 교양교육이면서 배우는 자가 주체가 된 학습(224쪽)이어야 한다.
또한 대안학교 학습의 중요한 특징은 ‘지식의 재구성’이다. 완성된 교육 과정이란 없다. 시대에 뒤진 낡은 것은 빼고, 새롭고 이로운 것은 보태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교사의 역할이다. 저자는 “좋은 뜻을 품고 교육에 몸담은 사람이라면 어떤 일이 있어도 피해야 하는 것이 있다”며(265쪽) ‘자신의 정신세계에 갇히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본인은 진보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정신세계가 10년, 20년 전에 고정되어 있다면 본인은 물론 주변도 힘들다. 배움이란 끊임없이 인간과 세계에 대해 알아가는 것이다.
저자는 “때로는 무모해 보이고 때로는 고집스러워 보였지만 불안과 설렘 속에서 흔들리며 내디는 그 한 걸음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안교육도 없었다”며 “지금 변화된 환경은 새로운 낯섦 속으로 우리를 집어 던질 것을 요구한다. 보다 각성된 용기와 겸손함 속에서 대안교육의 이상과 가치까지도 공론의 장에 노출시켜 단련 받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고(270쪽) 충고한다.
세상에 눈감고 귀를 막으며 자신의 성을 쌓는 사람은 세상을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반드시 파멸한다. 자신의 성을 부수고 이웃과 마주앉는 것이 곧 살아가는 힘이다. 나와 타인이 분리되어 있지 않음을 아는 것, 그것이 배움이다. 살아가는 힘은 역동성과 유연함에서 나온다.
살아가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을 확장시켜서 이웃과 접속하는 것, 그리고 시야를 넓히고 경계를 넘나들 수 있는 용기다. 낯설음과 마주하는 건 불편한 일이지만, 그 불편함을 감수할 때 배움과 각성이 찾아오는 경험을 했다. 자연과학을 공부할 때 처음엔 낯설었지만, 그 낯섦이 오래가지 않았다. 그동안 잊었던 나, 오래된 나의 진짜 모습을 찾아내고 만난다는 즐거움이 해일처럼 다가왔다.(269~270쪽)
원문: 시골아낙의 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