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별이 남긴 먼지입니다』
단순한 진리지만 번역서의 생명은 ‘번역’이다. 누가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책의 무게와 감동이 달라진다. 문학서도 그렇지만 교양이나 전문서적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지금이야 번역 수준도 꽤 높아졌으나 한때 ‘차라리 원서로 읽는 것이 낫겠다’라는 불만과 비난을 들어야 했던 책이 적지 않았다. 그런 불만을 거침없이 토로할 수 있는 사람은 형편이 나았다. 형편없는 영어 실력으로 ‘원서 독파’는 꿈도 꾸지 못했기에 고작 책을 덮는 것이 전부였다.
이번에는 옮긴이의 말을 먼저 인용해야겠다. 이유가 있다. 일단 들어보자.
“소설이나 시가 아니라 과학을 번역하다가도 북받치는 감동에 목울대가 뻑뻑해질 때가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솔직히 그런 경우는 드물다고 고백하겠다. 하지만 과학에도 나름의 감동이 있다. 물론 북받침과는 다르지만, 피타고라스 정리의 증명 앞에서, 맥스웰의 전자기학 방정식 앞에서, 현미경으로 본 뉴런들의 연결망 앞에서 느끼는 서늘한 고요는 ‘감동’으로 칭하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다.”
이런 대목도 있다.
“책을 번역하면서 두어 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노벨상을 받은 화학자이자 시인인 로알드 호프만이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쓴 시에서 ‘바람이 무엇인지 잊어버린 꼬마’가 등장할 때도 그랬고, 독한 마음으로 가족까지 속이고 독일로 건너와 성공한 뇌과학자 한나 모니어가 사라져버린 고향을 그리워하는 대목도 그랬다. 돌이켜보니 두 경우 모두에서 내가 느낀 감동의 원천은 과학자 개인의 기구한 삶, 더 정확히는 과학의 보편성과 과학자의 개별성이 이룬 팽팽한 긴장이었다.”
“책을 번역하며 두어 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슈테판 클라인이 쓴 『우리는 모두 별이 남긴 먼지입니다』에 눈길을 준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과학교양서이면서도 시 구절 같은 제목, 다른 하나는 책에 대한 기대감을 갖게 한 옮긴이의 말. 자기가 번역한 책에 찬사를 보내고, 저자에게 존경심을 표하는 경우가 드물지는 않지만, 옮긴이의 칭찬은 이 책이 어떤 내용일지 충분히 짐작하게 한다. 각설하고 옮긴이의 말을 먼저 인용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생물물리학을 전공한 저자 슈테판 클라인은 “사람들에게 어떤 추리소설보다 흥미진진한 현실을 감동적으로 전하고 싶어” 연구자에서 과학칼럼니스트로 전향한 인물이다. 그가 전 세계 최고의 과학자 13명을 만나 나눈 대화(레오나르도 다빈치 등 일부는 가상대화)를 책으로 묶었다. 인터뷰는 무려 3년간 진행됐으며 그 내용은 한 독일 주간지에 연재됐다.
이 책에서 소개한 13명 가운데 어떤 과학자는 우리에게 낯설지만, 관련 분야에서는 이름 석 자로 통하는 최고의 석학들이다. 노벨상 수상자도 다수 포함되어 있다. 『총.균.쇠』의 저자로 국내에서도 다수의 팬을 확보하고 있는 제레드 다이아몬드, 장면이나 냄새, 느낌 등을 통해 사람의 기억을 연구하는 한나 모니어, 인간의 게놈지도 완성 결과를 발표했던 크레이그 벤터, 빅뱅 직후를 다룬 『최초의 3분』으로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오른 스티븐 와인버그 등이 과학과 인생, 존재와 삶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이들과 나눈 대화의 연결고리는 ‘과학’이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에게 던지는 궁극적인 질문은 하나다. “우리는 누구이고, 어디에서 왔으며, 인간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눈썰미 좋은 독자는 이미 눈치챘겠지만, 그들은 비단 과학적 업적만 뛰어난 사람들이 아니다. 일부는 철학자이기도 하며 또 일부는 시인이다. ‘과학적 삶’을 살지만 그들의 인생에서 우연히 만나게 된 ‘과학’을 바탕으로 인간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 책은 과학적 담론을 다루면서도 아름다움(로알드 호프만), 기억(한나 모이어), 정의(에른스트 페르), 공감(비토리오 갈레세), 모성(세라 하디), 역사(제레미 다이아몬드), 세계의 시작과 끝(마틴 리스), 이타심(라가벤드라 가닥카), 인간 유전체(크레이그 벤터), 통증(발터 치클겐스베르거), 의식(빌라야누르 라마찬드란), 종교(스티븐 와인버그), 사랑(레오나르도 다빈치) 등 삶과 존재에 대한 13가지 화두를 다룬다.
“과학자의 가장 큰 특징은 지능이 아니라 끈기”
저자가 이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발견한 사실은 ‘우연성’이었다. 과학사를 바꿀 만한 대단한 업적을 남겼지만 태어날 때부터 과학자였던 이는 드물다는 것이다. 실제 세라 허디는 마야인에 대한 장편소설을 쓸 요량으로 자료를 수입하다가 인류학에 눈을 뜨고 인류학자가 되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경제학자로 거론되는 에른스트 페르는 당초 성직자가 꿈이었다. 가닥카는 인도의 한 기숙사에서 들끓었던 말벌을 만나지 않았다면 행동과학자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총.균.쇠』와 『문명의 붕괴』로 잘 알려진 제레드 다이아몬드는 원래 ‘쓸개’ 전문가였다.
세계적 과학자들을 만나 대화를 나눈 저자는 과학자에 대해 이렇게 정의한다.
“미디어는 늘 성공한 연구소식만 전하기 때문에 한 번의 성공을 위해 얼마나 많은 실패와 실망을 대가로 지불해야 하는지 아는 일반인은 극히 드물다. 자연의 수수께끼는 미로와 같다. 모든 틀린 길 각각을 최소한 한 번씩 거치고 나야 비로소 해답이 보인다. 과학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지능이 아니라 끈기다. 고집에 가까운 끈기, 후퇴와 자기 회의에 굴하지 않는, 특히 경쟁에 아랑곳하지 않는 끈기 말이다.”
그렇다면 과학자를 움직이는 가장 큰 힘은? 이에 대한 가장 오래되고, 가장 아름다운 대답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대화에서 발견된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은 앎에서 싹트며 앎이 확실해질수록 더 깊어진다.”
레오나르도가 보기에 앎의 욕구는 자연에 대한 사랑, 삶에 대한 사랑의 한 형태였다. 그래서 냇물 속 자갈을 휘감아 도는 물살도, 천체의 운동도 그에게는 모두 관심 대상이자 연구의 대상이었다.
이 책의 제목으로 사용된 『우리는 모두 별이 남긴 먼지입니다』는 우주론자 마틴 리스와의 대화에서 인용된 문장이다. 물리학과 철학을 전공하고 시인으로 등단까지 한 옮긴이 전대호는 이 문장 옆에 이런 말을 나란히 놓고 싶단다. ‘과학은 우리 모두의 삶이 남긴 흔적입니다.’ 그 옆에 또 빈자리가 있다면 어떤 문장을 놓을 것인가. 책을 덮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이 던지는, 간단하지만 쉽지 않은 숙제다.
원문: 책방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