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가장 재미있던 한국 영화 중 하나는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였다. 영화가 특별히 재미있었던 이유는 예전 어린아이의 눈으로 목격했던 한국 사회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했기 때문이다.
내가 초중고 학생으로 살았던 80~90년대는 정말로 ‘나쁜놈들 전성시대’였다. 조폭들만 나쁜놈이 아니었다. 영화에서 최민식이 그렸던 공무원, 경찰, 회사원들이 일상 속에서 저지르는 자잘한 비리들은 그 시대엔 생활의 일부였다. 과속 단속에 걸리면 1만 원짜리 한 장 쥐여주는 것으로 넘어갔었고, 아이들이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맞고 돌아올 때면 엄마들은 하얀 봉투를 책 속에 꼬옥 넣어 건네야 했다.
우리 동네에는 한국에서 그 당시 샐러리맨으로 살았던 분들이 여럿 계시다. 이분들의 샐러리맨 ‘활약상’들을 들을 때면 흥미진진하다. 대기업 말단 사원을 불러 수백만 원짜리 양복을 맞추어주던 하청업체의 접대와 고스톱판에서 잃어주는 돈으로 은근히 전달하던 뇌물 이야기 등. “그땐 참 모두들 나쁘게 살았지…” 이렇게 말끝을 흐리시는 추억담을 듣곤 한다.
상아탑에도 나쁜놈들 전성시대가
대학교 버전의 <나쁜놈들 전성시대>역시 크게 다를 바 없다. 용돈으로 나오는 몇십만 원 월급을 고스란히 교수님에게 상납해야 했던 대학원생들 사이에선 다양한 ‘학교 전설’들이 구전되었다.
해외 연수를 가면 학생들의 여행경비를 압수해 가족 동반 여행 여비로 활용하던 사람도 있고, 연구 장비로 책정된 예산으로 본인 집 냉장고를 산 교수 이야기는 전설의 레전드였다. 신임 교수 자리가 나오면 모집 요강의 내용까지 바꿔가며 자기 사람을 불러주고, 신임은 선배의 은혜가 고마워 교수 계급사회의 아래에서 묵묵히 선배 교수에게 프로젝트, 논문의 한자리를 상납하곤 했다. 계급의 맨 바닥에 깔려 있는 대학원생은 자기가 쓴 논문의 앞자리 이름을 지도 교수에게 양보하면서 “내가 졸업만 해봐라. 이쪽으로는 오줌도 안싼다” 다짐을 하던 그런 시대가 있었다.
조폭들에겐 범죄와의 전쟁을 선언했다면, 부패한 학교들에게 가해진 조치는 ‘규칙’과 ‘정량 평가’다. 교수를 임용할 때 돈이 오가거나 선후배 끌어주기가 심하다는 지적에 “오케이, 그럼 신임교수 뽑을 때나 교수 평가할 때는 SCI 논문 개수로만 합시다.” 하면 깔끔한 승부가 이루어질 거라 생각했다. 교수들이 연구비를 임의 전용한다면, “오케이, 그럼 연구 제안서에 회식비 등 자잘한 항목까지 정확하게 적게 하고 나중에 다 영수증을 검사합시다.” 범죄와의 전쟁에서 경찰과 검사가 활약했다면, 학교에는 이렇게 ‘규칙’과 ‘정량평가’라는 객관적인 감시자를 붙여놓았다.
국가에서 SCI라는 규칙을 정하니 학교들은 군말 없이 잘 따른다. 아니 사실은 잘 따르는 게 아니라, 새 규칙에 잘 적응해가는 것이다. 프로젝트 제안서에는 몇 개의 SCI 논문을 쓸 것인가 약속해야 한다. 정교수로 승진하기 위해서 몇 편 이상의 SCI 논문을 써내야 한다. 둘 다 논문의 품질은 상관이 없다. 그게 이 바닥의 새로운 룰이니 최민식이 그랬듯 적응하는 자가 살아남는다.
그런데 문제는 SCI 논문이라는 이 기준이 어떤 분야에는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전공하고 일하는 컴퓨터 과학 (혹은 컴퓨터 공학) 분야에서 SCI 논문으로 연구를 평가하는 것은 정말 ‘불 쉿’이다. 그냥 ‘불 쉿’이 아니고 진짜 큰 소의 ‘불 쉿’이다.
SCI는 책으로 발간되는 논문집 말고 컨퍼런스에서 발표되는 논문들은 포함하지 않는다. 하지만 컴퓨터 분야의 발전 속도는 너무 빠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연구 결과들을 대부분 컨퍼런스에서 발표한다. 단언컨대 컴퓨터 연구계의 ‘일진’들은 SCI로 분류되는 논문집에 결과를 발표하지 않는다. 심사하는데 1~2년 소비하고 학회지에 논문이 출판되면 이미 흘러간 옛 이야기가 돼버리고 마니까.
좀 더 구체적으로 사례를 들어보자. SOSP와 OSDI라는 두 개의 학회는 운영체제, 시스템 분야에서는 넘사벽의 학회다. 매년 100편 이상의 논문이 제출되지만 약 20편 정도만 학회에서 발표할 수 있다.
그렇게 논문을 제출해보기라도 하는 학교들이 보통 MIT, Berkeley, CMU 와 같은 곳들이고, 평범한 미국의 주립대학들은 사실 논문을 내 볼 엄두도 잘 못 낸다. 두 학회에서 논문을 한 편이라도 발표한 사람 만나면, 이 바닥에서는 형님 대접 해드려야 한다. 미국의 아무 학교에 지원서를 내도 서류 심사에서는 특별 대우를 받는다.
그런데, 두 학회에 논문을 10편을 쓴 가공의 인물이 있다고 하고, 이 사람이 정신이 나갔는지 한국 학교의 교수 임용에 신청서를 냈다고 해보자. 하지만 이 사람은 SCI 점수가 0점이라 서류 심사를 통과하지 못한다. 어디 아프리카에서 발행되는 학회지라도 SCI에 낸 게 있는 사람보다 낮게 평가받는다. 이거 말고 더 큰 ‘불 쉿’이 어디있단 말인가?
나는 미국에서 박사과정 중 2008년에 ‘슈퍼컴퓨팅’ 컨퍼런스라는 곳에 논문을 냈다. OSDI, SOSP까지 수준은 아니지만 내 분야에서는 최고이고 컴퓨터과학계에 가장 유명한 컨퍼런스 중 하나다. 그런데 소가 뒷걸음치다가 개구리 밟듯 운이 좋았는지 ‘최고논문상’ 후보에 올랐다. 내공이 모자라 상은 받지 못했지만, 후보에 오른 것만으로 자랑할만한 성과다. 컨퍼런스의 경쟁율이 5:1 정도 되고, 약 30개 논문 중 4편이 후보에 올랐으니 40:1 정도의 경쟁이었을 것이다. 그 이듬해 한국에 갈 일이 있어 모교에 들렀다. 예전 교수님을 만난 자리에서 그 논문에 대해 이야기를 꺼냈던 것 같다. 이런 대화가 오갔다.
나: “교수님 저 이번에 이런 논문 썼습니다…”
교수님: “응… SCI를 써야 해… 한국에 교수로 오고 싶으면 SCI를 써야지 아님 서류심사에서 통과를 못 해.”
나: “미국 학교들에선 SCI에 안 내는 거 아시잖아요…”
교수님: “으응… 나도 알고 과에서도 알지… 근데 규칙이야… SCI를 써야 해…”
SCI도 쓰면서 좋은 연구를 할 수 있을까? 어떤 분야에서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컴퓨터과에서는 전혀 아니다. 허접한 SCI 학회지들에 일 년에 몇 개의 논문을 내기 위해선 ‘일진’ 수준의 연구는 현실적으로 포기해야 한다. 일진 수준의 연구를 하기 위해선 일진들이 노는 물에 가서 놀아야 하는데, 그 사람들은 SCI에서 놀지 않는다.
그들만의 리그를 위한 불합리한 잣대들
사실 미국의 컴퓨터과 교수들은 SCI라는 평가 기준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졸업을 2년 정도 앞둔 내게 선택은 “한국에서 교수하고 싶으면 타협하고 SCI 방식으로 연구하거나”, “진짜 일진이 되고 싶으면 SCI는 무시하고 수준 있는 학회들에 논문을 내거나” 둘 중 하나였다. 나는 후자를 선택하는 게 옳다 여겼다. 주변에 전자를 선택하는 사람도 여럿 보았다. 똑똑해서 일진 될 재목 같았던 분들이 전자를 선택할때는 좀 안타까웠다.
내가 가장 ‘불 쉿’이라고 느끼는 것은 “응. 나도 알고 과에서도 알아. 근데 규칙이야.”이 대목이다. 몇 해 후 모교를 방문해서 다른 교수님과도 대화를 나눴다. 나이 지긋하시고 학교에서도 파워 있으신 교수님 역시 같은 이야기 “자네 발표 잘하던데… SCI는 좀 썼나? 나도 알고 과에서도 아는데… 규칙이라서…”
컴퓨터과의 얼마나 많은 재능있는 사람들이 이 멍청한 규칙에 세계적인 연구자 되기를 포기해야 하는지 모른다. 교수도 알고, 학교도 알고, 심지어는 교육계의 관료도 문제를 안다고 생각한다. 부패를 막으려고 만든 규칙이 독이 되어 개인과 시스템을 서서히 죽이는 걸 알지만, “근데 규칙이라서…”를 위선적으로 되뇌어야 한다면 얼마나 우리는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다는 이야기인가?
이것이 단순히 학교 안에서만 벌어지는 현상은 아니다. SCI 못지않은 초대형 불 쉿 ‘공인인증서’를 보자. 1999년 막 인터넷이 한국에 보급되면서 제정된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는 국가 ‘공인인증서’. 본래는 처음 인터넷을 접하는 국민들에게 해커들의 해코지를 막아주려 한 선한 의도의 ‘규칙’이다. 지금껏 15년 세월이 지나는 동안 인터넷 기술은 완전히 달라졌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공인인증서 불 쉿!”을 외쳐왔는지 모른다. 공인인증서가 있건 없건 상관없이 수백만 건의 개인정보는 유출되고 있다.
오히려 공인인증서의 본 의미도 모르는 채 무조건 클릭하게끔 사람들을 적응시켜 보안을 악화시키는 주범으로 전락했다. 인터넷 회사들의 결제 과정에 등장해서는 사용자 경험(UX)을 똥칠해 버리지만, 법률이라 스타트업, 인터넷 기업들이 혁신할 기회가 없다.
그 사이 미국에서는 아마존이 ‘원클릭’이라는 인터넷 상거래의 혁신으로 전 세계를 먹어가고 있는데도, 아무리 목이 터져라 “공인인증서 불 쉿!”이라고 외쳐대도 변화가 없다. 늘 되풀이된다. “공인인증서가 아닌 건 너도 알고 나도 알지만, 근데 규칙이야.”
법은 양심이 작동하지 않는 곳에서 어쩔 수 없이 발휘돼야 하는 필요악이다. 우리는 사회가 성장하면서 겪은 <나쁜놈들 전성시대>에 질린 나머지 ‘너도 알고, 나도 아닌 걸 알지만 어쩔 수 없는 규칙’의 노예로 살고 있다. 교수들의 양심을 믿고 SCI 규칙을 풀었다가는 학교들이 또 부정하게 신임 교수들을 뽑을까봐. 교수들의 연구 관리를 자유롭게 풀어주면 또 세금으로 자기 집 냉장고 살까봐. 국민의 인터넷 실력을 믿고 공인인증서 규칙을 풀었다가는 전부 해킹당할까봐서.
그래서 아무리 “불 쉿!”, “불 쉿!” 대도 규칙을 풀지 않는다. 그 사이 학교와 인터넷은 세계에서 경쟁력을 잃어가지만, ‘나쁜놈들’의 기억이 얼마나 강력한지 좀처럼 자유를 허락치 않는다. 그러나 어쩌면 사회가 생각하는 것보다 우리 개개인은 훨씬 더 많이 발전했는지 모른다. 급격한 성장의 마약에 취해 한때 양심을 잊은 적이 있지만, 지금은 그보다 훨씬 나은 직업적 양심, 소명, 능력을 갖춘 사람이 많을지 모른다. 양심에 의한 자율이 다스리는 사회가 법치국가보다 훨씬 더 나은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