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날여왕 캐리건
블리자드가 스타2 홍보용으로 내놓은 ‘과거의 유령’ 영상을 보면 한국에서의 대립이 오버랩되는 상황이었다. 과거에 테란의 유령 요원이었던 캐리건. 작전 중에 상관으로 버림받은 그녀는 다들 죽은 줄로만 알았지만, 저그에게 사로잡힌 이후에 ‘칼날 여왕’으로 다시 태어나 테란 진영에게 가장 강력한 적으로 다시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스타2 싱글플레이 시나리오에 대한 이야기만이 아니었다. 게임 밖의 현실 세계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블리자드와 그래텍의 연합. KESPA는 스타2 리그를 열기 위해선, 아니 그 이전에 기존에 진행하고 있던 스타1 리그들을 합법적으로 지속해나가기 위해선 조금 물러나 협상을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수 많은 e스포츠 팬들 역시 지금껏과 같이 투닥투닥 다투기는 해도 결국은 화해를 하고 금방 스타2 리그를 온겜과 엠겜을 통해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택뱅리쌍의 스2에서의 새로운 활약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KESPA의 반응은….
야 이 반란군 놈의 시키야 역적 노무 시키들!
협상 그딴 거 없고 땅크로 밀어버리겠다는 것이 KESPA의 반응이었다. 그래텍은 자체적으로 GSL(Global Starcraft2 League, 곰티비 스타2 리그로 알고 있지만 정식 명칭은 글로벌이다.)을 개최하기로 하고 온겜과 엠겜과의 협상에 나섰다. 뭔가 얘기가 풀려나갈 듯 온겜에서 심야 녹화방송으로나마 GSL 오픈 시즌1을 방영하기로 되어 있었고 편성표에도 올랐으나 어떤 이유인지 방송이 취소되었다.(온겜에선 부인하지만 KESPA의 압박이라는 것이 중론.)
스타2 발매를 앞두고 블리자드의 마이크 모하임 대표가 한국을 찾아 국내 프로게임단 선수 및 관계자들에게 스타2 테스트 계정을 전달하려는 행사를 벌이려고 했으나 프로게임단 대부분이 초청에 응하지 않아 취소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수틀리면 리그 예선도 보이콧하는 KESPA인데 이 정돈 약과.)
KESPA의 구성원들이 대기업 스폰서들로 이루어진 까닭일까? 문제가 생겼을 때 조율하고 대화에 나서려기보단, 찍어누르고 언플을 하는 보기좋지 않은 모습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몇몇 e스포츠 언론은 배틀넷 약관이 불공정 약관이라고 주장하거나 스타2의 흥행실패를 미리 예단하는 등 적극적인 나팔수의 역할에 충실했다.
KESPA에선 양대 방송사를 손에 쥐고 있었지만, 스타2 리그 GSL이 다른 창구인 인터넷 방송, 곰TV를 통해 중계되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재를 뿌리고 똥칠할 수 있을까? 바로 소속 선수들의 통제였다.
GG 타이밍 보소
2010년 8월 21일 독일에선 IEM이라는 독자적인 스타2 리그가 열리고 있었다. 대회 흥행을 위해 이벤트 매치가 정해져있었는데, 그것은 본 경기보다도 더 관심을 모을 이벤트전이었다. 바로 [ReD]NaDa 이윤열의 스타2 시범경기였던 것.
스타판에서 가장 화려한 커리어를 지닌 이윤열. 스타1에서는 예선에서 번번히 물을 먹으며 부진하던 그였지만 스타2에서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 것인가. 편해진 인터페이스와 빨라진 진행에 적응한다면 그가 다시금 새로운 전성기를 보여주지 않을까? 아니 다 됐고 그 이전에 스타2에서도 ‘앞마당 먹은 이윤열’ 스타일이 나올 수 있을 것인가? 모두들 두근거리며 경기를 보고 있는 사이 이윤열은 1경기를 지고 2경기를 이긴 이후 3경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경기가 시작되고 교전조차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나온 이윤열의 GG.
당시의 경기. 11분 15초부터 보면 상대선수도 관객들도 당황하는 표정을 볼 수 있다
해당 11분 15초부터 보러가기
모두들 황당해하면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벙쪄있는 상황. 팀리퀴드(양키판 디씨 스타크래프트 갤러리라고 이해하시면 됩니다.)에서는 KESPA가 이윤열이 스타2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연락해서 그만두라고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VOD를 제공하던 ESL의 홈페이지에도 이런 문구가 적혀있었다.
Update: There will be no VoD of the match, since Kespa didn’t officially allow NaDa to play a showmatch.
KESPA가 이윤열의 경기를 허락하지 않아서 VOD도 제공할 수 없다는 것.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멘트마저 삭제되었지만 이미 기사화는 다 되고 볼만한 사람은 다 본 상황이었다.
KESPA의 마지막 발악.
선수를 내놓지 않을건데 그럼 니네들이 무슨 수로 리그 운영할래?
기존 스타1 프로게이머들이 KESPA에 종속돼있는 상황에서 KESPA의 이런 행동은 의미심장했다. 만약 선수가 스타2 경기에 나간다면 프로게이머 자격을 박탈당하고 게임단에서 쫓겨날 수 있다는 암시. 연봉과 연습실, 스타1 출전기회 그 모두를 버린 채로 새로 시작하는 게임에 나설 수 있는 프로게이머가 얼마나 될까?
초강수였다. KESPA는 아마 이 정도 했으면 그래텍이건 블리자드건 저자세로 나올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프로게이머들을 붙잡은 상태에서 리그를 시작한다면 아마츄어 리그가 될 수밖에 없는데, 야구로 치면 사회인야구. 왠만한 매니아가 아닌 이상은 관심도 보이지 않을 그런 리그엔 미래는 없을 것이었다. KESPA는 자신의 행동이 도를 넘었다는 것은 인식하고 있었을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그것이 신의 한 수라는 것도.
강행한다!
스타크래프트 캠페인 모드에서 저그를 보고는 미개한 종족이라며 비웃던 테란의 심정이 이러했을까? 그리고 이후 저그의 대 군단의 역습에 당황하던 테란의 심정도 이러했을까?
스타크래프트2는 출시 이후 24시간 만에 백만 장이 팔리며 2010년 가장 많이 팔린 PC게임이 되었다. 인터넷에선 스타2 관련 떡밥이 쉴새없이 돌았으며, 발매 후 2달 간 오픈베타로 무료체험을 가능하게 했기에 스타2를 즐기는 인구는 판매량 이상으로 급증했다.
그런 인기에 힘입어서였을까 그래텍은 KESPA가 배째라 식으로 나오자 굴하지 않고 자신도 배를 째는 수를 두었다.
만12세부터 접수 가능하며 사실상 연령제한, 신분제한, 국적 제한이 없는 대회. 어찌 보면 초심으로 돌아갔다고도 볼 수 있다. 스타1 리그가 태동할 때 협회 같은 게 있었나? 프로게이머는 자격을 얻기 전엔 아마츄어가 아니었던가? 프로게이머를 꿈꾸는 꿈나무들은 많지만 프로게이머가 되는 문은 좁디 좁았다. 양대리그와 한정된 게임단은 그런 이들을 소화해내기에는 너무나도 좁은 세상이었다.
그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준다면 새로운 스타가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것이 노림수. 2010년 8월 22일부터 접수하기 시작한 TG삼보-인텔 스타크래프트2 오픈 시즌1 예선은 무려 2천 명의 접수자, e스포츠 역사 상 외국인 선수의 비중이 가장 높아진 리그로 시작하게 되었다. 북미에서 가장 큰 스타 커뮤니티인 팀 리퀴드에서는 선수단을 따로 꾸려 접수를 하기까지 했다.
GSL 말 그대로 글로벌 리그에 걸맞는 출발이었다. KESPA의 계산대로 허접한 사회인 야구처럼 흘러갈지, 블리자드와 그래텍의 희망처럼 글로벌 리그로 거듭날 수 있을지는 뚜껑을 열어봐야 알 수 있는 상황, 리그 개막은 코 앞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