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라를 좀먹는 조선놈들은 물러가라!” “벌레같은 놈들” “불만 있어? 어쩔 건데?” “일본에서 떠나라!” “한국인들을 때려서 쫓아라!” “타케시마는 일본의 영토다”…
증오와 분노에 가득한 말들이, 욱일승천기와 욕설이 적힌 플래카드, 욕설을 적어놓은 한국 국기를 든 무리들로부터 쏟아져 나왔다. 한국어로 적힌 간판과 한국 음식을 파는 상점이 가득한 일본의 신오오쿠보 거리를, 그들은 한국을 소리높여 욕하며 행진했다. 한국인으로 보이는 행인, 혹은 한국 가게를 이용하고 있던 행인들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도발하는 일도 서슴치 않았다.
질서 유지를 위해 투입된 경찰은, 시위대와 행인의 물리적인 충돌을 방지할 뿐 시위대의 노골적인 차별적 발언, 언어 폭력에 제재를 가하지는 않았다.
2.
‘재일특권을 허하지 않는 시민의 회’, 약칭 ‘재특회’가 중심이 된 우익집단 ‘신국가운동’이 펼친, 2월 9일 열린 반한(反韓) 데모의 풍경이다.
재특회는 재일조선인(재일한국인)을 비난하는 유명한 극우단체의 하나로, 전후 일본에 잔류한 재일조선인에게 “특별영주권”을 부여하고, 기초생활보호를 하는 등의 정부 정책, 즉 외국인의 ‘재일 특권’에 대해 강도 높은 비난을 일삼아왔다. (물론 당연히 이게 ‘특권’은 아니다. 후에 기회가 되면 관련글을 쓰겠지만) 그리고 2월 9일, 약 200명 규모의 행진 시위를, 일본 도쿄의 가장 유명하고 큰 코리안 타운에서 연 것이다.
이들은 심지어 “나쁜 조선인이든 좋은 조선인이든 다 죽여라”라는 발언까지 하며, 일본인들 사이에서도 반감을 샀으나, 한편으로는 그 데모의 양상이 니코니코동화나 2ch등, 인터넷에서 상주하는 젊은 우익층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었고, 심지어는 커뮤니티를 만들어 데모를 생중계하기까지 했다.
한 시간 반에 걸친 집회가 끝났지만, 신오쿠보에서는 시위대에 의한 크고 작은 충돌이 이어졌다. 지난 총선으로 보여진 일본의 우경화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듯 했다. 각종 재일 한국인 커뮤니티에서는, 시위시간대에 신오쿠보로의 외출을 자제하자는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3.
한편, 트위터에선 이런 극우들의 움직임에 맞서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차별이나 노동문제 등에 대해 목소리를 높여왔던 트위터리안 키노 토시키(@Kino_Toshiki)씨는, 반한 데모로 나타난 일본의 인종차별, 국적차별에 대한 반대 행동이 필요함을 역설하며, 반한 데모에 맞서는 “반한 데모에 대한 의견 표시” 행동을 계획했다. (2月17日予定の新大久保「反韓デモ」に対し、差別反対の意思表示をしませんか。; 2월 17일 예정인 신오쿠보 ‘반한 데모’에 대해, 차별반대의 의사표시를 하지 않겠는가?)
방법은 간단했다. “친하게 지내요”라고 적힌 피켓을 들고, 차별에 반대하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 이 제안은 호응을 얻었다. 더 이상 자국민의 외국인 차별을 방관할 수 없다, 외국인에 대한 폭력에 일본인으로서 저항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을 느낀 사람들이 하나둘 찬동 의사를 밝히기 시작했다. 일본인으로서, 일본인의 국적차별이 창피하다, 막아야만 한다는 트윗들이 #반한데모에대한의사표시 태그를 달고 올라왔다.
두 번째 반한 데모와 타케시마 반환 데모가 예정되어 있던 17일 오후 3시, 인종/국적차별을 방관할 수 없었던 일본인들이 신오오쿠보에 몰려들었다. 유모차에 딸을 태우고 온 부부도 있었다.
약 30명 가량의 사람들이 “친하게 지내요” “공존” “차별 반대”가 적힌 피켓을 들고 신오오쿠보 거리에 섰다. 약 30분 가량이 지나자, 그들이 있던 자리에 반한 시위대의 행렬이 찾아왔고, 행인들과 시위대에게 무차별적인 폭언을 퍼부었다. 반 ‘반한데모’ 시위대는 그저 조용히 피켓을 들고 그들이 지나갈 때까지 평화와 연대의 메시지를 높이 들었다.
4.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한국인의 목을 매달아라” “죽여라” 라는 차별적 발언을 대낮에 다수의 시위대가 당당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를테면 오늘날 미국에서 “흑인을 죽여라”라고 시위가 일어났다면 어땠을까? 독일에서 “유대인들을 죽여라”라는 시위가 일어났다면 어땠을까? 차별 발언으로 인해 형사처벌을 받거나, 적어도 대중의 지지를 얻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본에선 너무도 당당하게 차별과 배제를 주장한다. 국가는 차별을 막으려고 하기는 커녕, 사회적 약자와 ‘일반인’을 온갖 방법으로 가르고 차등 대우를 해왔다. 전후 일본에 남았던 재일조선인(한국인)에 대한 차별, 출입국관리법을 통한 외국인 강제추방, 외국인에 대한 헌법 예외 적용, 한센병 환자들의 강제 격리수용, 생활보호 수급 대상자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배제, 동북지방 재해민에 대한 차별 등.
이런 차별 의식은, 지난 총선의 결과로부터도 쉽게 알 수 있듯,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일본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아직 현재 진행중이다.
5.
차별, 배제, 억압, 혐오. 이것들은 결코 개인의 자유나 권리로 인정하고 용인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조선인 반대를 외치는 자들의 시위를 국가가 허락하는 명분은 ‘표현의 자유‘ ‘집회의 자유‘ 이지만, 타인의 권익을 명백하게, 현저히 침해하고 있고, 실질적인 피해를 가하고 점에서 이는 결코 ‘자유’라는 이름으로 허락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왜 이런 시위를 버젓이 할 수 있었을까. 국가는 왜 이렇게 외국인 차별, 빈곤층 차별을 당연하다는 듯 아직까지 할 수 있을까. 그건 차별과 배제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는 사회적인 압력이 지금까지 없다시피 해왔기 때문이다.
최근에 대두되고 있는 ‘물가작전水際作戦 문제’, 즉 빈곤층에 대한 생활보호신청 수리 기피(거부)문제 (관련글: 현대국가와 복지: 일본의 최근 사례를 중심으로) 가 나타나기 몇십 년 전, 재일조선인들은 생활보호를 수급함에 있어 같은 고통을 겪어야 했다. 과거엔 그저 재일조선인의 문제로 여겨졌던 것들이, 오늘날에 와서 같은 일본인의, 가장 약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다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외국인에 대한 차별은 결국 약자에 대한 차별이었고, 같은 일본인이라도 ‘빈곤층’이라는 약자에게 이런 차별은 예외일 수 없었던 것이다. 노동자, 장애인, 여성, 빈곤층, 외국인. 이런 사회적 약자들의 권익을 보호할 운동이 일본엔 너무나도 부족했고,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허용된 차별, 배제주의는 도저히 컨트롤 할 수 없는 괴물이 되어 현대의 일본을 덮치고 있는 것이다.
차별은 남의 문제라고 생각하고 그저 방관해왔던 유약한 과거에 대한 반성이, 바로 오늘 17일에 신오쿠보에서 있었던 ‘반한 데모에 대한 의사표시’ 행동인 것이다. 더 이상 차별을 두고 볼 수 없다는 의지, 외국인에 대한 차별을 허용하는 것은 결국 자신들에 대한 차별을 허용하는 것과 같다는 문제의식이, 제각기 피켓을 만들어 손에 든 사람들을 불러모은 것이다.
6.
차별이 만연한 사회는 비단 일본뿐이 아니다. 한국도 심하면 더 심했지 결코 낫지는 않다. 성 소수자와 여성에게 너무도 당당하게 가해지는 온갖 폭언, 비난. 노동자에게 쏟아지는 질타. 장애인을 더욱 아프게 만드는 조롱.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배제.
이게 과연 그들만의 문제인가? 평생 ‘차별하는’ ‘강자의’ ‘사회적 주류의’ 편에만 설 수 있는 자신이 있는가? 사회적 약자에게 가해지는 차별과 배제는 결국 언젠가 나 자신을 향한 화살이 되어 날아온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차별을 반대하는 행동을 일으키는 첫 걸음이 되는 것이다. 차별과 배제와 억압에 반대한다는 것은 결국 나를 위한 일이기도 한 셈이다.
우리는 차별에 어떻게 대항할 것인가. 연대가 그 해답이다. 각자의 아이덴티티, 즉 국적, 민족, 수입, 직업, 학력, 성별을 분명히 인식하고, 이 인위적 구분을 넘어 오직 인간이라는 단 하나의 공통점으로 연대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 그리고 연대하는 것. 이 연대를 통해, 사회 구성원 그 누구에게 그 어떤 종류의 차별도 용인하지 않는 것.
남에 대한 차별을 곧 나에 대한 차별로 인식하고 저항하는 것만이, 당연시되는 차별을 막을 수 있는, 차별이 용인되지 않는 사회를 만들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이 아니겠는가.
7.
반한 데모에 대한 저항 행동이 끝나고 다시 한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얼굴엔 미소가 있었다. 그들이 소중하게 여기는 무엇인가를 지켜냈다는 믿음, 인간으로서 용납할 수 없는 행위 앞에 당당히 맞섰다는 자신감이 그 미소의 원천이 아니었을까.
비록 많이 늦기는 했지만, 지금이라도 차별을 용인하지 않는 목소리가 나왔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히 의미 있었고, 한편으로는 고마웠다.
2월 17일 “반한 데모에 대한 의사표시” 현장사진은 Laputian’s Log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