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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역사를 바꾼 세키가하라 전투

2015년 7월 8일 by 성년월드 흑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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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가하라(가하)는 북쪽에 이부키산, 남쪽에는 스즈카산맥, 동쪽에는 난구산, 그리고 서쪽에는 이마스산으로 둘러싸인 분지입니다. 동서를 가로지르는 평원의 길이는 동서로 약 4km, 남북으로는 약 2km 정도이지요. 이곳을 가로지르는 나카센도는 동쪽으로는 키소 지방, 서쪽으로는 오사카로 연결되며, 북쪽으로는 북국가도(호쿠도카이도), 남쪽으로는 이세 지방으로 가는 이세카이도가 만나는, 교통의 요충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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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기후현에 위치한 기후 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 세키가하라 전투를 묘사한 병풍

케이쵸 5년, 그러니까 서기 1600년 음력 9월 15일, 미노 국 세키가하라(美濃の国 関が原, 지금의 기후현 후와군 세키가하라쵸 岐阜県不破郡関ケ原町)에서 일본의 역사를 뒤바꾸는 전투가 여기서 벌어집니다. 이 전투는 일본 역사상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중요한 전투 중에 하나로, 아즈치 모모야마/도요토미 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질서(에도 막부)가 탄생하게 되는 계기가 된 전투이기도 합니다. 히데요시 사후, 천하를 평정하기 위해 수십 년간 때를 기다리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히데요시의 충실한 심복이자 행정가이기도 했던 이시다 미츠나리가 맞대결을 한 이 전투는, 이후 도요토미 가문의 몰락과 260년간 태평성대를 이룩한 에도 막부의 탄생이라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세키가하라 캇센(합전 合戰), 혹은 동서합전이라고도 불리는 세키가하라 전투는 가마쿠라, 무로마치 막부와는 달리 260년간의 굳건한 정치체제가 유지됨으로써 일본이 중세봉건국가에서 근대국가로 탈바꿈하는 원동력을 마련하게 된 계기가 된 전투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만큼, 일본에서는 중요한 승부처를 가리키거나, 혹은 운명을 결정짓는 시합 등에서도 “이곳이 우리의 세키가하라!”라는 표현을 많이 사용하기도 하지요. 또한 세키가하라 전투는, 1598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불과 2년 만에 벌어진 전투로, 당시 도요토미 천하를 대표하는 모든 다이묘들과 장수들이 참전한 전투이며, 특히 임진/정유재란 당시 조선을 침략했던 베테랑 장수들이 서로 등을 돌리고 맞붙은 전투이기도 합니다. 쿠로다 나가마사, 카토 키요마사(가등청정), 코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 후쿠시마 마사노리, 토도 타카토라,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오오타니 요시츠구, 나오에 카네츠구 등이 모두 참전했지요. 말하자면 전국무장 올스타전인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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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다 미츠나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세키가하라 전투는 이시다 미츠나리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야심이 낳은 결과이지만, 표면적으로는 “히데요시 사후의 도요토미 가문의 미래를 어떻게 할 것이냐”라는 도요토미 가문의 내부 문제에 있었습니다. 이시다 미츠나리는 도요토미 가문의 후계자인 히데요리가 나이가 어린 것을 이용하여 이에야스가 국정을 농단하려 한다는 명분을 내세웠고, 이에야스는 행정가로서의 수완은 뛰어나지만 실전 경험이 부족하여 장수들과 잦은 트러블을 일으키는 이시다 미츠나리가 오히려 도요토미 가문에 해를 끼치고 있는 간신이며, 이에 도요토미 가문에 충성을 맹세한 원로의 한 사람으로서 이를 두고 볼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웁니다. 이렇게 시작된 미츠나리와 이에야스의 반목은, 결국 양측 모두 지지세력을 등에 업고 “한판 승부”를 벌이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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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0년 음력 9월 15일, 세키가하라에 포진한 양군의 배치도. 미리 세키가하라에 대다수의 병력을 포진한 미츠나리의 서군이 이에야스의 동군을 반 포위한 형태로 전투가 시작됩니다.

이시다 미츠나리의 세력을 편의상 “서군”, 이에야스의 세력을 “동군”이라고 합니다. 서군은 대다수의 병력을 이미 세키가하라에 파견한 상태였습니다. 가장 늦게 도착한 것은 서군의 주력인 이시다 미츠나리, 우키타 히데이에, 코니시 유키나가의 병력들이지요. 이들은 대략 오전 1시에서 3시경에 배치도에 그려진 곳에 진을 펼칩니다.

반대로 이에야스의 군세는 오전 5시경에 이르러 천천히 세키가하라에 포진을 하기 시작합니다. 가장 먼저 도착한 것은 동군 선봉인 후쿠시마 마사노리. 그는 자신의 병력을 우키타 히데이에의 군세 바로 앞에 배치합니다.

세키가하라 전투는 이에야스의 철저한 계산으로 시작된 전투입니다. 공성전보다 야전에 익숙한 그는 자신이 가장 유리한 상태에서 전투를 펼치기 위하여 몇 가지 함정을 펼치고, 이에 응한 미츠나리가 세키가하라에 포진하게 되는 것이지요.

단, 이에야스에게도 불리한 점이 있었습니다. 자신이 이끄는 2만 병력 이외에, 별동대로 자신보다 먼저 출발한 셋째아들이자 후계자인 히데타다의 병력(3만8천)이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동군은 결과적으로 지형적인 면에 있어서도, 병력적인 면에 있어서도 서군보다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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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히데타다. 히데타다는 이에야스의 3남이자 그의 후계자였습니다. 훗날 에도 막부의 2대 쇼군에 취임하였으며, 특히 일본 조정과의 관계 개선 및 조선왕국과의 관계 개선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인물이지만, 장수로서의 수완은 그다지 높지 않았으며, 정치가로서의 수완 역시 아버지에 비하면 썩 좋지 않았다고 합니다. 히데타다는 아버지로부터 3만8천이라는 대군을 통솔하여 세키가하라에 이에야스 군의 주력부대로써 포진하라는 명을 받지만, 도중에 함정에 빠져 공격할 가치도 없는 적 세력의 성을 공략하는 실수를 하여 이에야스의 체면을 구기게 됩니다.

동군 병력 7만5천 대 서군 병력 12만이라는 압도적인 전력 차, 그리고 세키가하라 평원을 사이에 두고 4개의 고지 중 3개를 미츠나리의 서군이 차지하고, 이에야스의 동군을 반 포위 상태로 시작한 이 전투는 서군이 지리적으로도, 병력 면에서도 유리한 위치에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동군의 압승으로 끝나버리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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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하 병사들에게 붉은 갑주와 붉은 깃발을 두르게 하고 그 자신도 붉은 갑주를 착용한 것으로 유명하여 붉은 도깨비(井伊の赤鬼)라는 별명까지 얻은 이이 나오마사. 도쿠가와 이에야스 휘하의 명장 중에 한 명입니다. 휘하 병사들에게 너무나도 가혹한 처벌을 내리는 것으로도 유명하여 살인귀 효부(병부)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었죠.

1600년 10월 21일(음력 9월 15일) 오전 8시를 기하여 시작된 전투는 동군의 선봉장인 후쿠마 마사노리가 이에야스의 심복이 아니기에 첫 공격이 이에야스 군에 의한 것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는 판단하에 이에야스의 중신인 이이 나오마사와 혼다 타다카츠가 그날 첫 출전을 한 마츠다이라 타다요시(이이 나오마사의 사위이자, 이에야스의 넷째아들)이 전선을 시찰하고자 한다는 핑계를 대고 소수의 철포대를 데리고 우키타 히데이에의 본진 앞까지 진출, 아침 안개가 자욱한 가운데 철포를 쏘아 날리고 잽싸게 튀어버리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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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이에야스의 심복이었던 혼다 타다카츠. 오다 노부나가가 생전에 “그 용맹함이 가히 초한의 장익덕를 보는 듯하다”고 칭송하고, 히데요시가 생전에 “천하무쌍이라는 말은 혼다 타다카츠를 두고 하는 말”이라며 칭송한 그는, 평생 60여 회에 달하는 크고 작은 전투에 참전하면서 몸에 단 한 번도 상처를 입지 않은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또한 당시의 일본 무사들이 말을 타고 전투를 할 시에 대략 2m 전후의 짧은 창(모치야리)을 선호한 데 비해, 타다카츠는 길이가 무려 6m에 달하는 蜻蛉切(톤보키리, 날에 잠자리가 앉자마자 반으로 갈릴 정도로 날이 매섭다는 뜻)라는 창을 애용했다 합니다.

이이 나오마사와 혼다 타다카츠가 이런 꼼수를 부린 이유는, 앞서 설명드린 대로 이에야스의 셋째 아들이자 도쿠가와 군의 별동대인 3만8천을 이끌고 있던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세키가하라로 향하는 도중 날씨 변화로 인한 명령 지연과 행군 속도의 저하, 그리고 적의 계략에 빠져 우에다성을 공격하면서 결국 세키가하라의 이에야스 본진에 합류하지 못함으로써 전투 시작 전부터 체면을 구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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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키타 히데이에는 임진/정유재란 당시의 일본군의 주요 인물 중에 하나로, 2차 진주성 전투와 벽제관 전투의 주역이기도 하고, 행주대첩 당시 권율에게 개박살 난 장수이기도 합니다. 그는 히데요시의 수양딸을 아내로 맞아들인 히데요시의 사위이기도 합니다. 이이 나오마사와 혼다 타다카츠에게 “낚여” 초전에 임하였으며, 서군 중앙에서 분전하였지만 결국 패배하고 맙니다. 그는 훗날 이에야스에 의하여 유배생활을 하였는데, 머나먼 유배지에서 오히려 천수를 누리게 됩니다. 그가 죽은 건 세키가할 전투로부터 무려 50여 년이 지난 1655년. 세키가하라 전투에 참전한 모든 무장들 중 가장 장수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기습을 받은 우키타 히데이에는 후쿠다 마사노리가 공격을 한 것으로 오판, 동군 중앙부로 돌출하게 되고, 여기에 호응하여 동군 주력부대가 서군 중앙부로 전진하면서 전투가 시작되지요. 동시에 동군 우익 선봉장인 쿠로다 나가마사와 오다 나가마스, 후루타 시게카츠가 미츠나리의 본진을 압박합니다. 하지만 고지에 진을 펼치고 철포대와 대포로 무장한 미츠나리와 코니시 진영을 무너트리긴 쉽지 않았죠. 한편, 중앙에서는 이에야스 본진을 제외한 중앙군 전체가 우키타 히데이에와 오오타니 요시츠쿠 진영을 압박합니다. 동군의 후미를 맡고 있는 야마우치 카즈토요, 하치스카 요시시게, 아사노 유키나가, 그리고 이케다 테루마사의 병력은 동군 후미를 압박하는 형세를 취한 모리, 안코쿠지, 쵸소카베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죠.

병력 면에서도, 지형 면에서도 동군에 비해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서군이 고전을 면치 못한 것은 바로 서군 우익 및 별동대가 전투가 시작한 지 2시간이 지나도 전혀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사전에 이에야스에 의한 정치적 교섭에 의한 것이었는데, 아카자, 쿠츠키, 와키자카, 오카와는 이미 전투가 시작되기 전부터 동군에 호응하고 있었습니다. 즉, 동군 중앙군이 우키타와 오오타니를 압박하는 동안 그냥 길을 터준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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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기후현에 위치한 기후 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있는 세키가하라 전투를 묘사한 병풍

게다가 전투가 벌어지면 후미에서 이에야스를 압박하는 역할 맡은 모리, 안코쿠지, 쵸소카베 진영은 상대적으로 야마우치 카즈토요와 아사노 유키나가 진영에 비해 병력이 열세였던 점도 있지만, 바로 앞에 있는 키카와 진영이 배신을 때리는 바람에 (실제로는 전투 시작 이전에 이미 이에야스 편 ㅋㅋ), 쉽사리 병력을 움직일 수 없었죠. (키카와는 모리 진영이 움직이지 못하게끔, 오전 8시부터 전군이 무장을 풀고 점심을 까먹는 위엄을 보입니다. ㅋㅋ) 게다가 별동대의 대장을 맡은 모리 테루모토는 자신의 지위와 나이를 핑계로 실제론 전선에 참가하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자산의 양자인 모리 히데모토를 파견했지요. 서군의 총대장 두 명 중에 하나이자 별동대의 사령관이었던 사람이 대리나 보내고 앉았으니. ㅎㅎ 사령관이 없는데 부대가 움직일 리가 없지요.

서군 좌익은 미츠나리의 본진 앞에서 분전하던 시마 사콘의 부대가 괴멸을 당하면서 서서히 무너지게 됩니다. 서군 중앙군은 제갈량의 화신으로까지 일컬어졌던 당대 일본 최고의 지장, 오오타니 요시츠구(그는 나병환자로, 눈도 이미 실명된 상태고 혼자서 걸어 다닐 수도 없어 병사들이 가마에 태우고 이동을 했습니다)의 분투에 의해서 어찌어찌 버티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점점 불리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죠. 단, 서군도 후쿠시마 마사노리에게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히고 토도 타카토라의 병력을 괴멸시키는 등, 분전하고 있었습니다. 이이 나오마사와 마츠다이라 타다요시도 전투 중에 부상을 입는 등, 동군 또한 중앙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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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오타니 요시츠구. 히데요시의 심복이자, 미츠나리와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그는 히데요시로부터 “요시츠구에게 백만대군을 지휘하게 해보고 싶다.”라는 평을 들을 정도의 지략가였으나, 출신 성분이 미천하고 병약했던 관계로 오랜 세월 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임진왜란 당시에는 병을 앓고 있어 참전하지 못했고, 이때 행정가로서의 수완을 십분 발휘합니다. 그는 이에야스와도 친분이 두터웠고, 세키가하라 전투 직전에는 미츠나리에게 이 전투를 일으키지 말고 대화로써 풀어나가자고 미츠나리를 설득하려 하나 결국 미츠나리를 설득시키지 못하고 서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게 됩니다.

서군에는 아직 전투에 참가하지 않은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병력이 우익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 병력 약 1만6천. 코바야카와가 동군 주력의 측면을 치고, 산을 내려와 평원에 진을 친 이에야스 본진을 후미에서 압박한다면, 서군이 승기를 잡을 기회는 충분히 있었던 거지요. (미츠나리는 키카와 히로이에나 아카자, 쿠츠키, 와키자카, 오카와 등의 우익 병력 대부분이 시작하기도 전에 배신을 때린 상황이라는 걸 간파하고 있지 못했습니다)

한편,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히데요시의 정실, 키타노만도코로(본명, 네네)의 조카이기도 했던 그는 명실공히 히데요시 진영의 중신 중에 중신이었습니다. 또 정유재란 때는 히데요시 군의 총대장직을 수행하고, 울산성 전투에서 권율과 양호의 조명연합군에 의해 포위당한 카토 키요마사(가등청정)을 구원하고자 분투를 벌이지만, 오히려 미츠나리에게 “경솔히 총대장이 함부로 전선에 나섰다”라고 비난당하며 영지를 일부 몰수당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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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키가하라 전투 당시 열여덟 살이었던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세키가하라 전투로부터 불과 2년 만에 스무 살의 나이로 절명합니다. 히데아키는 히데요시로부터 총애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도요토미 가문을 배신한 인물로, 후세에 나약하고 무능한 인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고, 또 일본에서는 배신자의 대명사로 통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의 죽음에 대해서도 “저주를 받아서 죽었다”라는 식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지만, 실제로는 상당히 총명한 인물이었고, 백성들의 신망도 두터운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히데아키는 마음 속으로 미츠나리를 경멸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자신을 규탄하는 미츠나리로부터 몇 번이나 구해준 이에야스를 존경하고 있었죠. 후쿠시마 마사노리와 쿠로다 나가마사로부터 “동군에 가담한 히데요시의 심복들은 악정을 펼치는 미츠나리를 토벌하고자 키타노만도코로의 밀명을 받았다”라는 서한을 받기도 합니다. 여하튼 그는 심적으로는 이미 동군에 가세할 생각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미츠나리와 테루모토, 그리고 요도(히데요시의 측실이자 히데요리의 모친)으로부터 히데요리가 성장하여 성인이 될 때까지 그를 관백(칸파쿠, 일본 조정 최고직에 해당함. 조선 시대로 치면 영의정 정도라 보시면 되겠습니다)으로 임명하겠다는 약조도 받아놓은 상태였습니다.

서군 우익이 포진한 세키가하라 남쪽 평원의 고지인 마츠오산에, 일단 서군의 우익에 가담하는 형태로 포진한 히데아키는 그래서 망설입니다. 어느 쪽에 가담하는 것이 좋을지. 미츠나리에게 가담하면 히데요시 이외엔 그 어떤 무신도 오르지 못한 지위를 차지할 수 있지만(물론 기한한정이긴 하지만), 자신이 어려울 때 몇 번이나 자신을 구해주고 중재해준 이에야스를 배신하는 것도 괴롭고. 그래서 계속 망설입니다. 한편, 코바야카와가 움직여준다면 고착상태에 들어간 전투를 일거에 유리한 상황으로 바꿀 수 있는 양군 총대장들은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합니다.

결국 이에야스가 코바야카와 진영에 위협사격을 함으로써 히데아키가 동군에 가담하게 됩니다. 단, 이 부분은 실제 역사와는 조금 다르리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일단, 이에야스 본진의 위치를 볼 때, 코바야카와 진영에 철포대를 보내 위협사격을 가하는 것 자체가 무리입니다. 따라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이에야스의 협박에 놀라 미츠나리를 배신한 게 아니라, 자신을 좀 더 드라마틱하게 어필하기 위한 시간을 기다렸다고 볼 수도 있고, 미츠나리에 대한 개인적인 원망이 그를 움직였다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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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사카 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세키가하라 전투를 그린 병풍

어쨌든, 코바야카와는 미츠나리의 기대를 저버리고 오오타니 요시츠구의 우측면에 공세를 가합니다. 우키타 히데이에와 오오타니 요시츠구는 이에 크게 분개하며, 코바야카와의 1차 공격을 막아냅니다. 하지만 그때까지 미동도 안 하던 오카와, 와키자카, 아카자, 쿠츠키의 병력이 코바야카와와 호응하여 히데아키의 병력을 겨우 물리친 요시츠구의 우익을 압박하기 시작합니다. (코바야카와의 2차 공격에 대비하여 전열을 가다듬은 요시츠구의 기마대에 와키자카가 철포 세례를 날립니다) 그리고 히데아키의 2차 공격으로 요시츠구의 병력은 괴멸을 당하게 되고, 요시츠구 또한 자결하고 맙니다.

요시츠구가 괴멸을 당하면서 우키타 히데이에도 전멸을 면치 못합니다. 동군 중앙군은 병력을 창끝을 미츠나리의 본진으로 향하게 하고, 여기서 코니시 유키나가(소서행장)의 병력 또한 전멸을 당합니다. 후미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시마즈 요시히로는 도쿠가와 주력을 돌파, 이에야스 본진에 가벼운 타격만을 입히고 잽싸게 전선을 이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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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의 도쿠가와 주력을 돌파하고 이에야스 본진으로 향하는 시마즈 요시히로와 그를 막아서는 이이, 혼다, 마츠다이라의 군세. 오사카 역사박물관 소장

사태를 파악한 모리 테루모토 진영은 철수, 안코쿠지 에이케이와 쵸소카베 모토치카 역시 이에야스 군 후미의 공략에 실패하고 패퇴하면서 세키가하라 전투는 단 하루 만에 동군의 대승으로 종결됩니다.

이시다 미츠나리는 이부키 산 방향으로 도주, 아이카와를 거쳐 카스가무라 방면으로 진출하여 자신의 본성인 사와산성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지만, 자신의 성에 돌아가지 못합니다. 아네가와를 거쳐 오타니 산으로 들어가 다시 후루바시로 도주했지만 결국 음력 9월 21일에 포박되어 교토로 이송되고, 10월 1일, 이에야스에 의해 참수당하게 됩니다.

그의 거점이었던 사와산성(현재는 히코네성의 일부) 또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공격을 받고 무너집니다.

한편 이에야스는 미츠나리 사후 토요토미 진영의 실세가 됩니다. 그는 히데요리 측을 압박하는 한편 에도 막부의 설립에 착수하게 되지요. 이후, 수차례의 전투가 토요토미 측과 이에야스 세력 간에 벌어지게 됩니다만, 이미 무너져버린 토요토미 세력이 대세를 거스를 순 없었죠.

원문: 김찬우

Filed Under: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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