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스타에 나타난 박근혜
지스타 2012 둘째 날의 일이다. 당시 학교 도우미로서 부산에 파견되어 부스를 세팅하던 중에, 교수부를 통해 ‘박근혜 대선후보가 우리 학교 부스를 지스타 부스 중 첫 번째로 방문한다. 신경 써서 준비하라’는 지령이 내려왔다. 정신없는 분위기에 휴대전화까지 잃어버리고 멘붕 중이었던 터에 대선후보의 방문이라니, 엎친 데 덮친 격, 멘붕이 배가되는 상황이었던 셈.
하지만 정작 부스를 개장하고 보니, 박 후보는 교수부에서 통보한 시간까지 나타날 낌새조차 보이지 않았다. 시판되는 게임도 아니고, 게임교육원 학생들이 준비한 게임을 시연하는 부스에 사람들이 몰릴 리도 만무하고, 그렇게 부스는 한산하고 잉여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잉여롭던 부스가 갑자기 분주해진 것은 KBS 카메라가 등장하면서부터. KBS를 시작으로 수많은 신문사와 방송국들이 카메라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아, 진짜로 누가 오긴 오는구나 – 하던 차, 예정보다 30분에서 한 시간쯤 늦게 박근혜 후보가 부스에 등장했다. 본인의 모교인 서강대학교 게임교육원 부스에 말이다.
첫인상이 어땠느냐고? 글쎄, 겉으로 보기에는 그냥 TV와 신문에서 보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던 것 같다. 나는 그에게 내 게임 대신 학교의 C교수가 강하게 밀어주던 졸업예정자 P선배의 모바일 게임을 시연했다. 병든 지구를 살려야 한다는 교훈적 코드가 담긴 게임이었다.
교수부로부터는 P 선배의 모바일 게임을 시연만 하면 된다고 전달받았지만, 그렇게 높은 분(?)이 행차하시는데 뭔가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여당의 대표 정치인이며, 가장 유력한 대선 후보에게 게임계의 목소리를 직접 들려주고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이다. 난 고민 끝에 초점을 ‘악법도 법이다’의 대표주자(?) ‘셧다운제’에 맞추고 질문을 하자고 마음먹었다.
나는 박 후보에게 게임을 시연하면서 병든 지구를 살리기 위한 교훈이 담긴 게임임을 설명한 후, 대화를 이어서 이런 교훈적인 게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셧다운제가 시행되면 많은 청소년들이 게임이용에 제약을 받을 수 있음을 주장했다. 그리고 박 후보가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질문자의 얼굴 대신 모니터 화면만을 주시하던 가운데 나온 첫 번째 답변은 ‘여러 가지 생각할 지점이 많다’는 말이었다.
…어느 정도 예상하던 답변이었다. ‘수첩공주’로 불리며 평소 언론 인터뷰에서 보이던 모습과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러고 나니, 교수였는지, 한국게임산업협회 관계자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누군가가 내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아마 날 제지하고자 하는 제스처였으리라. 하지만 나는 거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박근혜 후보 본인의 생각을 분명히 듣고 싶다고 재차 질문을 이어갔다.
박 후보는 여전히 질문자를 보지 않았다. 그는 모니터 화면만을 주시하다가, “지금 시행이 되고 있는데,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더 잘 검토해보겠다”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게임이 어렵다는 말을 남기고 부스를 떠났다.
시연이 끝난 뒤 몇몇 언론사 기자가 내게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 질문했다. 나는 ‘예상했던 답변이 나왔다’ ‘규제가 많아질 수록 사람들이 게임을 하지 않기에 게임 업계는 점점 위축될 것’이라고 답변했다. 여기에 ‘게임업계의 성장을 바라면서 게임 산업을 저해시키는 규제를 두겠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으며, 그렇게 되면 박 후보가 말하는 일자리 창출도 되지 않을 것’이라고도 이야기했다. 사실 박 후보의 답변은 애니팡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게임도 할 줄 아는 정치인’ 이미지를 쌓고, 게임 산업이 중요하다고까지 역설했던 박근혜 후보의 언행에 전혀 부합하지 못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 박 후보 측에서 찾아와 왜 그런 질문을 했는지에 대한 간단한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시연과 돌발 질문, 그 이후
이 이야기는 그날 저녁 인터넷 신문에 보도되었다. 그러나 큰 반향은 없었는데, 오마이뉴스가 기사를 올리면서 이슈가 된 것 같다. 미디어다음에 올라온 해당 기사엔 댓글이 2000개나(현재는 상당한 수의 댓글이 삭제 조치되어 1000개 정도) 달렸고, 자주 가던 게임 커뮤니티 사이트와 IT 커뮤니티에도 기사가 공유되었다. 싱숭생숭한 기분이었다. 영남 어디쯤인 고향 부모님 집에서는, 주위 반응이 좋지 않으니 당분간 행동을 삼가고 고향에 내려오지 않는 게 어떻겠냐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지스타 개장 전에 부스를 세팅하다가 잃어버렸던 휴대전화는 다음 주에 찾았다. 경찰은 인천에 있는 분실 휴대전화 장물업자를 잡았다고 했다. 이 작은 사건을 두고, 주위 사람들은 N서울타워 지하 180층 제3 서울 남영동에서 대선 후보에게 불순한 언행을 한 내게 코렁탕을 먹이기 위해 위치추적을 했는데 재수 없게 장물업자가 걸렸고, 이에 위치추적장치를 달아 내게 돌려주었다는 식의 우스갯소리를 했다.
여기에 학교 공식블로그에는 본인을 서강대 동문이라고 밝힌 익명의 유저가 부정적인 의견을 올리는 등, 자잘한 여파가 있었다. 소속 중인 게임교육원이 정식 학부가 아니다 보니 평소에는 동문 취급을 못 받는 경우가 많은데, 이런 일에서 문득 동문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미묘했다.
학생, 예비 게임개발자가 본 현재 게임업계의 실태
한때 게임은 인터렉티브 미디어(대화형 매체) 라고도 불렸다. 게임 속의 주인공이 되어 가상의 세계를 스스로 경험하고 다채로운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점은 영화, 책, 음악 어떤 매체에서도 쉽게 이루기 힘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저 단어는 와레즈가 범람하던 20세기, 21세기 초의 게임들에게나 붙일 수 있는 수식어가 되어버렸고, 요즘 게임에서는 저런 장점을 찾기가 힘들어졌다.
현재 게임업계는 게임업계의 미래를 걱정하거나 바른 게임을 만들겠다는 목표의식, 후진을 양성하려는 노력은 실종되고, 너도나도 돈 버는 데만 혈안이 된 것 같은 모습이다. 개발 환경의 변화로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천대받던 모바일 게임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처럼 묘사되고, 앱스토어, 카카오톡 게임의 대박을 보며 너도나도 뛰어들어 정부지원을 받아 창업을 하고 모바일 게임을 만들며 대박을 꿈꾼다. 건전한 게임문화보다 수익을 위한 유료화 정책만 발달한다. 현업 개발자들은 게임 개발자가 되고 싶어하는 학생들에게 올바른 길을 알려주는 대신, 꿈 깨라는 이야기를 한다.
게임 개발을 동경하는 예비 개발자에게조차 따가운 시선을 보내는 판국에, 중독성 요소를 삽입하고, 현금 결제 아이템을 쓰지 않고는 거북함을 느끼게 만드는 설계로 게임을 만드는 현재 게임업계의 모습이 사람들에게 우호적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인가?
현재의 게임업계는 가이드 없는 폭발적인 성장으로 인한 과도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 재미있는 게임을 만들기만 하면 된다고 여겼던 업계의 순진함이 게임업계를 사회로부터 단절시키고 각종 규제를 막지 못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면, 현재에는 그저 돈 버는 게임을 만들기에 급급한 업계의 현실이 그보다 몇 배 더 게임업계를 사회와 단절시키고 각종 규제를 합리화하는 요인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위메이드의 남궁훈 대표와 같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점점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게임을 만들고 돈을 벌면 그만인 게 아니라, 정말 게임업계가 사회와 함께 머리를 맞대고 문제를 풀어나갈 배짱과 준비가 필요하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불합리한 규제를 혁파하고 올바른 게임 문화를 정착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