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취향과 평론
맛 칼럼니스트 황교익 선생이 한국일보에서 지나가는 얘기로 우리의 슈가보이, 백종원 대표를 비판하면서 논란이 있었던 모양이다. 사실 황교익과 백종원을 둘러싼 구도는 그다지 특별할 게 없다. 영화 <변호인>에 대한 허지웅의 비평과 그것을 둘러싼 논란도 그랬다. 그런 개별적인 사례를 떠나서 정말 어디서 많이 본 구도다.
황교익과 백종원을 둘러싼 구도는 아주 전형적인, 대중의 취향과 비평가의 충돌이다. 그리고 ‘포퓰리즘’, 내지는 포퓰리스트라고 평가받는 정치인에 대한 논쟁과 닮은 구석이 많다.
음식에서 시작하여 사람들이 무엇을 어떻게 먹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은 대단히 정치적이다. 아니, 어떤 면에선 정치적인 부분을 빼면 남는 게 없다고 해도 될 것이다. 황교익 선생이 한국일보 인터뷰에서 그랬던 것처럼.
대표적인 것이 탕국 문화다. ‘육수’를 내어 국물을 만들고 탄수화물을 넣어 탕을 해먹는 것은 실제로 먹을 게 없어 양을 불리기 위한 일이었다. 먹을 게 없다는 사실, 즉 빈곤만큼 정치적인 것이 또 있을까.
조금 시계추를 과거로 돌려보자. 미디어에서 음식을 다루는 방법은 주로 두 가지였다. 하나는 도무지 일상에서 즐길 일이 없어 보이는, 말 그대로 ‘산해진미’에 대한 소개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전업주부가 아침에 보고 오후에 돌아올 아들, 저녁에 돌아올 남편을 위해 몇 시간 투자해 만들어 볼 만한 레시피를 설명하는 프로그램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자는 반복되던 일상에서 일탈했을 때 무엇을 즐기느냐 하는 것이다. 후자는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넉넉히 시간을 들여 만들어, 생존을 위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홈 스위트 홈의 기억으로 남길 요리다.
2. 맛집과 먹방
그리고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매스미디어의 음식을 다루는 방식은 변했다.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낮았던 음식의 분량과 가격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VJ특공대에서 연달아 방영하는 맛집이란 거의 모두가 ‘무한리필’이나 그에 준하는 싸고 푸짐한 성격을 가진 식당이었다. 그리고 얼마 전 별세한 ‘나물이네’ 고 김용환 씨의 <2,000원으로 밥상 차리기>와 같은 시리즈를 기억하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서, 2000년대 후반부터 떠오른 건 맛집과 먹방이다. 1997년 환란 이후 고용안정성이 파괴되면서 많은 직장인들이 요식업에 손쉽게 뛰어들었다. 요식업은 더욱 양극화되었고, 훨씬 더 고강도의 경쟁을 치러내기 시작했다. 맛과 가격만 갖고 정당하게 경쟁하기는 너무 어렵다.
온갖 합리적인 마케팅 기법부터 사기(Fraud)에 가까운 것들까지 범람했고, 인터넷으로 정보를 찾는 일이 보편화되면서 사람들은 맛집과 진미의 정의를 바꾼다. 맛집이란 단순히 맛집이 아니라, 맛집이라고 쓰여 있는 곳들 중 다른 누군가의 검증과 추천을 거쳐 등장한 ‘진짜’ 맛집이다. 그리고 그 기준은 주로 싸고 푸짐하며 적당히 길게 음미할 필요까지는 없는 것이다.
서바이벌 역시 마찬가지였다. ‘슈퍼스타K’가 그 방아쇠였다고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홈 스위트 홈이란 이제 없다. 요식업과 식문화는 한국 사람들의 상호 저신뢰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부분일 지경이다. 요리사는 더 이상 낭만과 로망의 상징이 아니며, 식당 역시 일상으로부터의 탈출과 거리가 멀어졌다.
70년대의 짜장면은 가난한 사람들이 경사를 축하하기 위한 소박한 낭만이지만, 현재의 짜장면은 그런 것과 거리가 멀다. 식문화와 요리 역시 무한경쟁과 승자가 써나가는 스토리, 그 진실성에 대한 검증이 필요하다. 먹방은 먹는 음식이 싸고 접하기 쉽다면 그 음식의 맛을 대신 검증하는 과정이겠지만, 비싸고 접하기 어렵다면 대리만족 포르노에 가까워진다.
3. 궁극의 대중주의 쉐프, 백종원
백종원 대표는 그 흐름의 최신에 나타난, 맛에 대한 궁극의 포퓰리즘적 ‘쉐프’다. 그는 단순히 엄격한 제한 조건하에서 합리적인 맛과 분량의 요리를 만드는 연금술사라서 인기가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거기서 맛과 분량은 부차적이다. 백종원 대표의 진짜 미덕은 1) 그가 냉혹한 현실에서 버티기에 가장 적합한 스타일의 음식을 선보이고 2) 그런 상황에 놓인 많은 사람들을 위한 합리적인 제안을 하며 3) 그가 그런 사람들의 모습 중 어떤 것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그의 “저지방 마요네즈 먹을라믄 뭣허러 먹어” 라는 말을 기억하시는가. 그의 말은 단순히 ‘맞는 일침이라서’ 호응받는 것이 아니다. 저지방 마요네즈를 먹고 싶지 않거나 먹는 게 부담스러운 사람들에게 ‘굳이 불행해지지 말라’고 하기 때문에, 그가 갈수록 식문화의 즐거움을 빼앗기고 있는 사람들의 편에 섰기 때문에, 비로소 사람들의 마음에 스며드는 것이다.
이제 황교익 선생의 이야기로 돌아오겠다. 백종원의 대극점에 위치한 그가 정말로 대중을 경멸하는가? 그는 자신의 미각이 ‘절대’라고 선언한 적이 없다. 그가 선언하는 것은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사람들이 ‘먹는다는’ 것에 더 돈을 쓸 수 있는 여건이 되기를 원한다.
그에게 음식이란 정치 그 자체이며, 그가 사단법인 ‘끼니’를 세운 것 역시 음식의 정치, 정치로서의 음식을 개선하기 위한 맥락이다. 그는 더 많은 복지를 주장한다. 대통령과 권력자를 비판한다. 더 좋은 정치로 더 좋은 식문화를 세우고 싶어한다. 그리고 더 좋은 식문화를 세워 더 좋은 사회를 만들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는 그 과정에서 ‘너의 입과 내 입은 같을 수 없다’고 선언한다. 동시에 지금의 식문화, 그것을 상징하는 백종원(과 같은 훌륭한 사람과 이영돈 등의 사이비까지), 그에 열광하는 대중을 비판한다. 꾸준히 그 음식이 어떤 맥락을 갖는지, 무엇이 옳은지를 논한다.
‘맛 칼럼니스트’인 그는 막상 자신의 입맛이 차지하는 평가 기준은 20~30%에 불과하다고 말하지 않나. 나머지 60~70%는 그가 믿는 신념이고, 입맛이 아닌 역사와 맥락이다. 바로 그것들이 꾸준히 사람들이 배신당해온 것들이다. 황교익에 의해 사람들은 자기가 ‘사기당했다’는 사실과 마주해야 한다. 그리고 이미 알고는 있었던, 지금 우리가 뭔가를 어떻게 먹는 모습이 ‘그리 좋지 않다’는 사실을 계속 재확인해야 한다. 불편한 과정이 될 수밖에 없다.
4. 공감과 지향
황교익과 백종원이 무언가를 내놓았다는 사실에 반응하게 되는 ‘평범한 사람들’의 지갑은 대체로 얇아졌다. 시간 역시 더욱 사라져 간다. 백종원의 ‘연금술’은 우리가 값비싼 대가와 시간을 퍼부어 먹던 것들을 더욱 싸게, 효율적으로 카피하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 대가로 ‘건강함’에 대한 고민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 역시 보여준다. 그리고 그냥 식당에서 더 맛있는, 더 여유 있는 추억을 쌓는다는 선택을 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진다는 사실은 숨겨져 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기에 나온 결과다.
우리가 백종원에 열광하는 것은 가장 맛있고 가장 건강한 음식을 만들어서가 당연히 아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그의 충청도 말투가 수더분해서, 그가 마리텔을 잘 끌고 가서도 아니다. 우리의 일상을 언행과 음식으로 보듬어 준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우리가 처한 어떤 상황, 낮을 수도 있는 눈높이를 그가 부정하거나 비판하지 않기 때문이다.
황교익의 말에 불쾌한 기분이 드는 것 역시 단순히 황교익이 엘리티즘 내지는 ‘절대적 미식의 기준’을 들고 대중을 비판하는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어찌 됐건, 백종원의 레시피가 ‘최선’일 수는 없기에 비로소 생기는 문제들이다. ‘타협’의 불안정성에 관한 문제 말이다.
백종원 대표의 레시피는 저성장과 불안함, 각박함이 일상화된 사람들의 삶을 긍정한다. 그의 ‘진정성’이 그것을 보증한다. 그래서 1인 가정과 ‘DIY’를 강요받는 더 많은 사람들이 백종원을 통해 더 합리적인 대안을 찾고, 더 행복해지는 것이 맞다고 여긴다.
그러나 다른 한쪽에서, 또 다른 황교익 선생, 황교익 선생의 또 다른 주장이 나와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이 현실이 불합리하며 이롭지 않다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고작 역사가 100년에 불과하며 쓴맛이 나서 오히려 왜염이라 천대받았던 천일염을 최고의 소금으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처럼 말이다. 황교익의 주장이 맞고 그르고는 그다음 문제다.
결론 : 착한 기업가와 평론가의 지조
백종원의 만능 간장으로 밑반찬을 간단하게 해결하고 더 여유를 찾았다면, 그다음 과제는 ‘악식가’ 황교익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의미를 확인하는 것이다. 그 둘은 우리 삶에서 충분히 공존할 수 있다. 먹고 사는 것에 대한 정치에서 백종원은 새로운 베이스캠프고, 황교익은 대안을 모색하고 새로운 생각을 제시하는 사람이다.
먹는 데 쓸 돈이 없어 미각이 퇴화했다.
복지를 늘려서 제대로 된 식문화를 자리 잡게 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져야 한다.
고 주장하는 게 황교익이다. 백종원은 대신 돈이 없는 사람을 위한 요리를 만들고, 복지가 늘어나지 않아도 버티기 위한 요리를 알려준다. 착한 기업가와 강건한 평론가는 서로 다른 부분에서 사람들의 행복에 기여할 것이다.
황교익의 ‘음식 정치’는 역설적으로, 사람들이 백종원의 레시피로 요리와 음식에 대해 좀 더 단순하게, 좀 더 생활 밀착적으로 여기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진전될지도 모를 일이다. 음식의 정치를 하기 위한 동력 중 하나가 백종원의 레시피고, 황교익의 ‘맛칼진’ 말은 그런 음식의 정치에 걸려있는 여러 지향 중 하나다.
그래서 오늘 저녁으로는 어머니가 만들어 놓으신 백종원 대표의 ‘만능간장’ 두부조림을 먹을 생각이다. 그리고 페이스북에 뜨는 황교익 씨의 포스팅을 읽을 것이다. 먹는 즐거움과 아는 즐거움 중 하나를 포기하는 건 너무 아깝지 않나.
미각에 절대는 없고 숨겨져 있는 부분이 많기에 오히려 수준에 대한 논의는 풍요로울 수 있다. 홍콩반점이 있어서 궁지에 몰린 약속 장소에서도 번민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다. 음식의 정치란 그렇게 다양한 화두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퍽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까. 어쨌든, 착한 기업가와 지조있는 평론가가 모두 먹는 문제를 신경쓰고 있으니까.
원문 : 잉간 블로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