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벤(Tony Benn), 영국의 정치인이자 노동당 하원의원이었던 인물. 정치를 위해 작위와 이름은 물론 상원의원 자격까지 버린 사람으로, 여러 장관을 거친 후 2001년 정계를 은퇴했다. 모든 걸 가지기 위해 정치를 선택한 우리 정치인들과는 사뭇 다른 배경의 이 사람은 마이클 무어 감독의 <식코(Sicko)>에 인터뷰이로 등장하기도 했다.
그는 정치가 국민을 통제하는 두 가지 방법을 이야기한다. 하나는 겁을 주는 것인데, 이건 1970년대나 가능했으니 유효기간 만료. 나머지 하나는 여전히 잘 작동하고 있는 것으로, 국민에게 지식과 건강, 자신감을 주지 않는 것이다. 지식이 차단되어 있으니 뭘 해도 성공하기 힘들고, 건강하지 않으니 뭔가를 바꿔 볼 의지가 안 생긴다. 여기에 자신감 부족으로 시키는 대로 일하며 그저 열심히 사는 것만이 최선이라 믿는다. 이 ‘열심히’가 극에 달하면 생기는 일이 만날 만날 야근이다. 그래서 오늘도 부장님은 업무의 백미는 야근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들은 야근의 핵심을 잘 모른다. 야근의 핵심은 딴짓이다. 그래서 제대로 딴짓을 하기 위해 필요한 장비들을 소개한다.
게이밍 키보드와 마우스
아. 이거 종류 정말 많다. 자세히 세보지는 못했지만 우리가 즐기는 게임 종류보다 훨씬 많을 거다. 개중에는 야근을 빙자한 사내 게임 배틀을 위해 사무실 불 끄고 게임에만 열중하라며(?) 친절히 키에 조명이 들어오는 제품도 있다. 하지만 이건 사용자의 환경을 무시한 개발자들의 실수다. 그들은 그 키보드로 온종일 게임하는게 일이니, 정작 사용자의 상황을 알기 어렵다.
문제는 근처에서 한잔한 후 귀가 전 흐린 정신으로 야근중인 사무실에 들른 부장님. 이 상황에 사무실에 불은 다 꺼져 있고 모니터만 켜져 있다면 바로 의심을 살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 급박한 순간에 당황해 모니터만 끈다면? 집에도 못 가고 연일 계속되는 야근에 지쳐 사무실에서 자고 있었습니다, 하는 얄팍한 변명밖에 할 게 없다. 그러니 사무실 조명은 켜두고 게임을 하는 것이 좋다. 그래야만 임기응변의 가지 수가 다양해지는 법. 게임을 위한 키보드와 마우스의 일반적인 조건들은 검색을 통해 확인해주기 바란다.
비밀번호 입력되는 외장 하드
만날 만날 야근, 주말까지 출근이어서 극장 갈 시간조차 없는 직장인의 PC. 영화(?) 몇 편 정도 들어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누군가 내 PC의 내용을 주기적으로 확인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 그래서 이런 중요 자료들은 외장 하드에 보관하는 게 좋다. 게이밍 키보드나 마우스와 달리 우리의 이런 현실을 잘 알고 개발된 제품이 있다.
마지 디지털 도어락처럼 생긴 이 물건은 겉면의 키패드에 암호(4~8자리 숫자)를 넣어야만 하드디스크가 인식된다. 독한 맘 먹은 사람은 이 제품에서 하드디스크만 분리해 어떻게 해보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 제품은 아예 하드디스크를 잠가 버리기에 그것조차 불가능하다고. 또한 USB 3.0을 지원해 자료를 PC에서 외장 하드로 옮기는 시간을 줄일 수 있는 장점도 있다.
눈은 손보다 빠르고, 발은 더 빠르다
업무의 백미는 야근 부장님도 알고 계시는 알트탭(Alt-Tab). 딴짓 하는 모든 직장인의 필수 스킬이지만, 모두 다 알고 있는 이상 더는 유효한 기술이 아니다. 또한 알트탭을 사용해도 윈도우 아래 작업 표시줄에는 조금 전까지 한 딴짓의 기록이 선명히 남겨진다. 게다가 성능 떨어지는 직장 PC는 이 간단한 동작만으로도 버벅대기까지 한다. 그래서 등장한 제품이다.
사진 속 제품의 이름은 스텔스 스위치. 손 대신 발로 밟아주면 알트탭 기능이 작동한다. 또한 작업 표시줄엔 사용자가 미리 설정해 놓은 프로그램만 보여주며, 특정 업무 파일을 띄워 주는 기능까지 있어 다른 사람들이 작업 표시줄을 본다 해도 깜쪽같다. 게다가 사양 떨어지는 PC를 쓰는 직장인들을 위해, 내장된 프로세서가 이 기능을 실행시켜 완벽한 은폐가 가능하다.
걸리지 않고 카톡하기
아마 제목만으로 솔깃한 사람도 많겠다. 스마트폰의 키보드 소리를 줄여 카톡을 해도, 스마트폰을 들고 고개를 숙이고 어쩌고 하면 다 걸리기 마련. 업무중이라면 마땅히 나야 할 키보드 소리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이 키보드 사운드는 대단히 중요하다. 아무리 상사라 해도 대놓고 당신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일을 열심히 하고 있나 판단할 근거는 키보드 사운드밖에 없기 때문. 업무시간까지 카톡을 해야만 하는 카톡 중독자 직장인이라면 이런 아이템을 추천한다.
스마트폰의 알량한 가상 키보드 대신 PC 앞에 놓인, 우렁찬 소리가 나는 키보드를 사용할 수 있게 해주는 액세서리다. 맘만 먹으면(이라기보다 상황이 허락하면) 하루 종일 카톡을 하더라도 키보드 치는 소리를 내는 것이 가능하다. 다만 상대방이 보낸 카톡을 보기 위해서는 스마트폰을 들여다봐야 하는 것이 문제지만, 이거야 적당한 스탠드를 사용하면 해결. 만약 PC 메신저 형태로 카톡을 할 수 있다면, 이 제품은 아마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잘 팔렸을 수도 있겠다.
응? 이게 아니라고?
응? 당신이 원했던 것은 이런 것이 아니라 진짜 일을 더 잘할 수 있는 장비들이라고? 걱정하지 마시라. 이제부터 다시 시작이다. 최고의 업무환경이란 말을 들었을 때 당신은 어떤 것을 생각했는가? 아마 이런 것이 떠올랐는지도 모르겠다.
위 사진은 한참 전 인터넷상에서 시끄러웠던 델(Dell)의 소셜미디어 리스닝 코맨드 센터. 델의 제품과 서비스와 관련해 온라인에 쉴새없이 올라오는, 수 만 개에 달하는 관련 반응을 추적하고 대응할 수 있다고 한다. 오늘도 방에서 끊임없이 키보드의 F5를 누르며 댓글 알바 중인 사람들에겐 눈에서 불꽃이 튀는 사진일 거다.
어쨌든 저 정도는 아니지만, 업무에 제 역할을 할 만한 값비싸고 좋은(…) 물건들을 추가로 소개한다. 더불어 회사에 돈이 좀 있을 때 투자 개념으로 장만했다가 긴급 상황 시에는 더 요긴하게 쓸 수도 있다. 어떻게?
24인치 모니터 + PC 대신 아이맥 27인치
만약 회사에서 지급한 PC와 모니터 대신 원하는 장비를 쓸 수 있는 회사라면 24인치 모니터와 PC 조합 대신 아이맥 27인치를 쓰는 것도 생각해볼 만하다. 물론 윈도와 맥 OS는 차이가 있으니 적응하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 개인차가 있긴 하지만, 완전 똥고집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 아니라면 2~3주만 고생하면 될 것이다. MS-DOS부터 윈도 7까지 무려 16년간 윈도우만 써왔음에도 적응하는 데 3주 정도면 충분했으니 말이다. 만약 도저히 적응이 안 된다면 그냥 윈도로 부팅해 사용하면 땡이다.
사실 27인치 모니터는 보기만 해도 광활한데, 아이맥 27인치 모델은 일반 24인치 모니터보다 해상도가 높기에 똑같은 창을 띄워도 세로로 훨씬 더 많이 보인다. 흔한 네이버를 기준으로 24인치에 비해 손가락 두께만큼 더 많은 정보가 보인다. 다른 프로그램도 마찬가지. 스크롤 할 필요가 그만큼 줄어든다. 또한 간격을 잘 조절하면 4개의 파워포인트 화면을 동시에 띄워 놓고 작업할 수 있다. 알트탭 눌러가며 화면에서 프로그램 창을 뒤적이지 않아도 되니 여러 개의 파워포인트를 짜깁기하는 작업이 빨라진다. 나름의 업무 효율 향상 효과다.
여기에 (그래선 안 되겠지만) 만약 회사가 어려워져 나와야 한다면, 아이맥 27인치를 중고로 팔면 생활에 조금 더 보탬이 된다. 중고가격이 PC보다는 훨씬 좋기 때문.
해피해킹 프로2 키보드
딱 봐도 뭔가 포스가 넘치지 않나? 이 키보드는 노트북에 사용되는 팬타그래프, PC사면 따라오는 싸구려 맴브레인, 조금 비싸게 주고 사야 하는 기계식 등, 흔히 얘기하는 키보드의 분류에 포함되지 않는다. ‘무접점정전용량방식’이란 발음조차 어려운 방식의 키보드로 키감이 정말 명확하다. 실제 타이핑을 해보면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는 것처럼 리드미컬한 타이핑이 가능하다. 이 키보드로 바꾸면 꽤 오랫동안 타이핑을 하고 싶어 회사출근이 빨라지고, 자발적 야근을 하게 되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참고로 지금 이 글 역시 이 키보드로 작성 중이며 영화평론가로 활동 중인 허지웅, 미디어오늘의 이정환 편집장 역시 이 제품의 노예라고 한다.
다만 적응이 좀 필요하긴 하다. 원래 프로그래머를 위한 물건이기 때문에 커서 이동을 위한 방향키가 따로 없고(물론 fn키와 다른 키 조합으로 사용할 수 있다), 대문자키 역시 방향키처럼 두 개의 키조합으로 사용해야 하기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 대신 키의 개수가 적기 때문에 종이에 뭔가를 써야 할 때 키보드를 모니터 앞에 세워두지 않아도 된다는 게 장점. 또 키를 다 외우고 있다면 아예 키에 글자가 새겨져 있지 않은 무각인 버전 제품을 사용, 다른 사람이 내 PC를 사용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 문제는 가격. 어지간한 PC 한대 가격인 35만 원.
약간 꺾인 마우스
온종일 책상에 앉아 키보드와 마우스 질만 하느라 손목부터 어깨까지 쑤시고 아픈 분들 모두 주목. 이런 사람이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하는 것은 마우스의 모양이다. 만약 마우스의 두 버튼이 평평하다면, 바로 이 마우스가 고통의 주범일 확률이 높다. 원래 인간의 팔은 차려자세를 취할 때가 가장 자연스럽다. 하지만 마우스를 쓰기 위해서는 손목을 꺾어야 하고, 여기에 정확한 위치로 이동을 시키기 위해선 미약한 힘을 지속적으로 줘야 한다. 이런 작업 습관이 바로 손목과 어깨를 아프게 하는 것이다. 거기에 해상도가 낮은 마우스는 마우스 이동 거리가 그만큼 길어져 더욱 힘들다.
그래서 아예 세로로 사용하게 되어 있는 마우스도 있지만, 적응 시간이 꽤 걸려 결국 방출하고 말았다. 그냥 오른쪽으로 30도 정도 기울어진 마우스로도 충분히 효과를 볼 수 있다. 이 물건만 있다면 불꽃 야근도 가능해진다. 혹 직장 내 호감가는 직원이 퇴근 무렵 어깨를 두드리고 있다면, 이 마우스를 선물하며 ‘아프지 말아요’ 정도의 멘트를 날려줘도 효과가 있을 것 같다. 물론, 장담은 할 수 없다.
네이버 직원의 의자
네이버가 분당에 사옥을 지으면서 주문한 의자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 허먼 밀러 에어론 체어 한 개의 소매가는 무려 139만 원. 가장 비싼 것은 2백만 원이 훌쩍 넘는다. 물론 엄청난 수량을 주문했을 테니(그래서 본사 사장이 직접 내한했다는 소문도 있다) 가격 할인이 들어갔긴 했겠지만, 제품 자체가 고가이니 어쨌든 무시무시한 가격일 것이다. 하지만 고가에도 불구하고, 이 의자, 지를만하다. A/S도 무려 12년 동안 해준다.
의자와 책상에 욕심이 많은 탓에 이 의자를 써 봤는데, 거짓말 조금 보태 일어나기 싫을 정도로 편하다. 또한 좌판과 등판 모두 매시 재질이라 여름에는 훨씬 덜 덥다. 정장을 입어야 하는 사람의 경우 바지나 치마가 덜 구겨진다는 장점도 있다. 사무실에서 일이 너무나 안 되는 분들은 앞서 소개한 장비들과 이 의자의 조합으로 꿀 야근에 도전해 보자. 참고로 같이 이 의자를 지른 디자이너는 일주일 만에 아픈 허리가 나았다고. 보통 사무실과 PC방에 갖춰진 의자는 5만 원 이내의 저렴한 제품이다. 이런 의자에서 최고의 착좌감을 기대하는 것은 넷북에서 3D게임이 팽팽 돌아가길 기대하는 것보다 안타까운 인지부조화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다. 정말 좋은 말이지만, 상황에 따라 이 말은 폭력이 되기도 한다. 글자와 이미지가 터져 나올 듯 좁아터진 모니터에, 타이핑이 되긴 하는 건지 감도 안 올 정도로 흐물흐물한 키보드, 관절염이 생길 것만 같은 마우스, 오래 앉아 있으면 자동으로 디스크가 튀어나올 것 같은 불편한 의자. 여기에서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은 결국 몸 버려가며 충성하라는 말밖에 안 된다. 직원이 최대한의 업무 포텐을 폭발시켜 주기 원하는 사장님들. 그에 걸맞은 투자를 하시라. 몸에 안 좋은 야식, 카페인 음료만 사주지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