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4월 14일. 타이타닉호, 가라 앉다
2009년 6월 영국의 사우스햄튼에서 말비나 딘이라는 이름의 한 노파가 기나긴 생을 마감했다. 향년 97세. 그녀는 눈에 띄는 업적을 남기거나 역사적 고비에서 중대한 역할을 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한 비극적 사건과 맞닥뜨렸던 수천 명의 사람들 가운데 최후의 생존자였다. 그녀는 생후 2개월 때 부모의 품에 안겨 영국에서 미국으로 가는 호화여객선 3등석에 탑승했었고, 그 배가 침몰하면서 아버지를 잃었다. 그 배의 이름은 타이타닉이었다.
말비나 딘은 죽기 얼마 전 자신의 요양원 비용을 대기 위해 그때껏 간직해 오던 타이타닉 관련 물품들을 경매에 내놓았다. 그 물품들이란 타이타닉 침몰 후 구조선에 실려 뉴욕에 도착했을 때 이 세기적인 비극의 피해자들에게 뉴요커들이 기증한 옷가지들을 담았던 가방, 그리고 그 어머니에게 지급된 보상금 증서, 타이타닉 관련 인쇄물 등이었다. 1912년 4월 14일 밤 빙산에 충돌하고 몇 시간 뒤 침몰해 버린 ‘불침선’ 타이타닉의 유품은 다시 한 번 사람들의 기억의 샘에 돌을 던졌다. 비록 그 유품이 영화 <타이타닉>에서처럼 엄청난 보석 목걸이는 아니었지만.
제임스 카메론에게 아카데미 트로피를 안겨 준 영화 <타이타닉>으로 더욱 유명해지긴 했지만, 타이타닉의 비극은 그 이전에도 몇 번씩이나 예술 작품으로 다뤄졌고, 침몰 후 100년이 지난 지금도 빛바래지 않는 현대의 전설로 남아 있다. 이는 인간의 교만과 비겁, 추악한 욕망에 더하여 용기와 헌신, 그리고 꺾이지 않는 인간애가 얽히고설킨 하나의 대 드라마였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만큼 감동적인 실화
해운 사상 최대 참사라 불리운 비극 속에서도 인간의 고귀함을 포기하지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감동적이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타이타닉 호의 악단이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찬송가를 연주하던 모습은 거의 사실 그대로다.
그 노래가 아닌 다른 찬송가를 들었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뱃전이 기울어 중심을 잡을 수 없을 때까지 하틀리와 그 악단이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목격자들의 증언이 일치한다. 2주일 뒤 그의 시신이 전선 부설선에 의해 인양됐을 때 바이올린이 그 몸에 묶여 있었다고 한다. 유해는 고향 마을로 옮겨졌고 수만 명이 애도하는 가운데 안장됐다.
이외에도 많다. 영화 속에서 탐욕스런 부자에게 뇌물을 받기도 하고, 구명 보트로 달려드는 승객들을 제지하다가 한 명을 사살한 후 스스로 자살해 버리는 것으로 묘사된 항해사의 경우 실제로는 바다에 빠져서까지 승객들에 대한 책임을 다하다가 장렬하게 숨졌다.
또 타이타닉호의 전원은 배가 끊어질 때까지 유지되고 있었다. 그것은 엔진실에 남아 있던 기술자들이 마지막까지 자리를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석 기술자는 엔진실에서 철수할 것을 명령했으나 그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배와 운명을 같이 했다. 그 긴박한 마지막 순간에 전기마저 일찌감치 사라져 암흑에 들었더라면 더욱 많은 목숨이 수중고혼의 일원으로 편입되었을 것이다.
사망자의 대부분은 3등석 손님들이었다. “여자와 아이들부터”의 원칙은 대체로 지켜졌지만 3등석 승객의 사망률은 1,2 등석에 비해 월등히 높았다. 1등석과 2등석의 경우는 아동 사망자가 거의 없었지만 3등석에서는 쉰 세 명이나 되는 어린이들이 바다 속에 몸을 묻어야 했고 3등석 여성 승객은 절반이 목숨을 잃었다.
성인 남자들의 경우는 이야기할 것도 없다. 북대서양 바닷물같이 차가운 자본주의 원칙은 침몰 중의 타이타닉에서도 어김없이 적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빛났던 것은 능히 살 수 있었던 사람들, 최우선으로 배려받을 수 있었던 사람들의 품위와 미덕이었다.
가장 여유롭게 죽음을 맞이한 이는 대부호 벤자민 구겐하임이었다. 그는 최후의 순간이 다가오자 구명 보트를 거부하고 자신의 선실로 돌아가 턱시도를 갈아입고 신사답게 죽겠노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영화에서 묘사된 그대로 브랜디 잔을 들고 시가를 문 채 성난 바닷물을 맞이한다.
영화 속에서 거센 바닷물이 넘치는 선실의 침대에서 꼭 끌어안고 누운 채 최후를 기다리던 노부부는 백화점 소유주였던 이시도어 스트라우스 부부로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의 하인을 구명보트에 태우고, 코트까지 벗어준 후 함께 세상과 이별했다.
물론 아름다움과 추함은 동전의 앞뒷면처럼, 별을 감싸는 어둠처럼 공존한다. 1등실 손님이 신사답게 죽겠노라고 파도 앞에 버티고 앉은 마당에 정작 타이타닉의 전속 항해를 지시한 것으로 의심받고 있는 선주 브루스 이스메이는 냉큼 구명 보트에 올라타 목숨을 건졌던 것이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구명 보트를 내리던 한 선원이 기가 찬 얼굴로 노려보았던 바로 그 사람이다.
그렇게 살아온 그는 평생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었고, 상류사회에서는 대놓고 왕따를 당했다. “내가 탈 때에는 갑판에 사람들이 없었다.” 고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은 것이 더욱 그의 명예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영화를 보면서 구겐하임을 위시한 귀족과 부호들이 의연하게 죽음을 맞는 장면이 큰 울림으로 다가왔던 것은 조금은 불경스런 의문 때문인지도 모른다. 악단장 하틀리나 전기 기술자들처럼 마지막까지 자신의 소임을 다하면서 죽어가는 사람들은 우리 역사에서도 흔했지만, 타이타닉 1등석을 끊을만한 우리나라 ‘최상류층’ 가운데 구겐하임같이 희생 정신과 신사도를 발휘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하는 의문이 그것이다.
궁금한 것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이를테면, 그 배에 한국인 재벌 회장님들이 타고 있었다면 과연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신사답게 죽으리라 턱시도로 갈아 입으시고 최고급 와인으로 목을 축이며 최후를 맞이하셨을까. 아니면 천한 것들과 함께 보트는 탈 수 없으니 전용 보트를 내놓으라고 호통을 치거나 선원들에게 “얼마면 돼?”를 부르짖으셨을까. 행여 아들을 때린 웨이터를 조폭 대동하여 벌하신 어느 회장님처럼, 수하들에게 거치적거리는 것들 치우라 명령한 뒤 “갑판에 사람이 없길래” 구명보트에 탔노라고 변명하지는 않으셨을까.
원문:산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