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링크에서 제3분과(근현대사)의 48번 논문은 일본 방위대 교수를 역임한 도베 료이치의 「조선 주둔 일본군의 실상: 치안, 방위, 제국」이다. (도베 료이치는 국내에 번역된 『일본 제국은 왜 실패하였는가: 태평양 전쟁에서 배우는 조직경영』의 공동 저자이기도 하다.) 이 논문에는 1920년대부터 일본군과 정부 내에서 논의되어 1938년에 도입된 조선인 지원병 제도에 대한 흥미로운 수치와 내용들이 있다.
조선인은 일본군에 입대할 수 없다
논문에 따르면 일본의 식민지군은 구미의 식민지군과 기본적으로 다른 점이 상당히 늦은 시기까지 식민지인을 장병으로 채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영국의 인도병, 프랑스의 베트남병 등과 현격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한다.
1907년 한국군(약 7,700명)이 해산되면서 조선 주둔 일본군 장교로 편입된 조선인 장교는 수십 명 정도에 불과했다. 1925년의 경우 조선 주둔 2개 사단에 소속된 조선인 장교는 겨우 30명 정도였다고 한다. 왕가와 왕궁 경호를 위해 300여 명의 조선보병대와 조선기병대가 유지되었는데, 이마저도 1930년에 폐지되었고 실직자들은 경찰관, 관리, 학교직원 등이 되었다고 한다. 애초에 해산된 한국군 사병 중 일부는 헌병보조원으로 고용되기도 하였다.
구한국군에 속했다가 병합 전에 일본군으로 옮겨간 극히 예외적인 홍사익과 같은 사례도 있었다. 홍사익은 한국무관학교 중퇴 후 한일합병 전에 일본 중앙유년학교예과에 편입하여 병합 후 일본 육사에 입학하고 졸업한 후 육군대학교를 졸업하고 중장까지 진급하는 일본 육군 엘리트로서의 길을 걸었는데, 조선군에 배속되는 일은 끝까지 없었다.
한일합병 이후 조선인 청년이 일본 제국군의 장교가 되는 길은 법적으로는 가능했으나, 실제로 조선인과 대만인이 육사 예과에 입학 응모가 가능해진 것은 1925년부터였다. 이후 1928년까지 매해 조선인 응모자가 있었으나 단 1명도 채용되지 못하였다. 이는 명백한 차별이었는데 1920년대 후반이 되자 이러한 차별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견도 일본 내에서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1926년에 조선주둔군(이후 조선군으로 칭한다)은 조선인이 군인으로서 어떠한 소질을 가지고 있는지를 판단하기 위해 조선인 지원병을 모집하는 것에 대해 육군성에 건의하였으나 육군의 중앙에서는 이를 시기상조라 하여 거부하였다.
육군성 징모과에서는 조선인에게 참정권이 없음을 지적하며 다음과 같이 답신하였다.
“병역의무의 중대성을 감안하면 이를 부과하는 과정으로서 조선대만인에게도 참정권을 부여하여 그 민의를 대표하는 자를 의정 단상에 보낼 수 있는 상태를 만들어 그 후에 병역의무를 과한다는 입법을 하는 것이 가장 온건하고 합리적인 방법이다.”
육군성에서는 또한 식민지인과 내지인 사이에는 국가, 천황에 대한 충성심에 차이가 있고, 전투조직의 구성분자로서 식민지인이 부족한 점이 있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은 신영토인 알자스로렌 징병 부대가 담당한 전선에서 붕괴하였으며, 오스트리아군은 다민족으로 구성되어 전투력이 매우 열악하였다는 점 등 또한 이유로 들었다.
그러나 육군성 징모과에서도 “열렬충성한 지원자를 채용하는 것은 원칙적으로 문제가 없다. 현재에 있어 지원 병원의 종류에 응해 일부 그 길을 닦아 장래에 군의 성립에 위해를 미치지 않을 정도로 점차적으로 적당히 그 뜻을 키우는 것에 대해 고려를 한다.”라고 향후의 지원병 모집 가능성은 긍정적으로 논하였다.
조선인 지원병 제도 실시되다
이후 이 문제는 십여 년간 수면 아래로 들어갔으나 중일전쟁의 기운이 무르익던 1937년이 되자 육군성은 조선군 측에 다시 이 문제에 대한 의견을 요청하였다. 조선군은 수십 년 후에 일본 병역법을 조선에도 완전 실시(징병제)하는 것을 상정하고 그때까지 과도적인 조치로 조선인 지원병 제도의 채용을 제안하였다.
이 제도의 효과로 조선인들에게 “내선일여 무차별적 대우”를 보여주고, 조선인들에게도 국토방위 책무의 분담으로 ‘조국애’를 고양시키고, 또한 지원병들이 제대한 후 조선 향당의 중견적 존재가 되는 인재들로 양성될 수 있다는 점을 들었다.
이리하여 조선인 지원병 제도가 실시되는데, 이 과정에서는 미나미 총독과 조선군 사령관 고이소 중장 사이에 이견이 있었다. 내선일체의 주창자인 미나미 총독은 지원병제도 도입에 매우 열의를 가지고 있었으나, 고이소 사령관은 군은 인적자원에 궁하지 않으며 조선인의 교육 정도나 일본인과의 차별 문제 등의 전제 조건이 정비되지 않았다고 하여 지원병제도보다 조선인들에 대한 참정권 부여 쪽이 선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한다.
그러나 미나미 총독 쪽 의견이 더 우세하여 1937년 12월, 중일전쟁 시작 후 반년이 지난 시점에서 조선인 지원병 제도의 도입이 확정되었고 1938년 2월에 공포된 육군특별지원병령에 기초하여 그해부터 지원병 모집이 실시되었다. 지원병 자격은 만 17세 이상, 6년제 소학교 졸업 혹은 그 이상의 학력에 ‘사상이 견고하고 강건’해야 하며, 군대에 들어와도 일가 생계에 지장이 없는 자로 한정되었으므로, 무학자나 이전에 사회주의 등 불온사상에 관련된 자, 본인이 가족 생계를 책임지는 완전한 무산자는 지원할 수 없었다.
모집 수는 처음에는 매우 신중하게 400명부터 시작하였다.
- 1938년도에는 400명 모집에 약 2,900명이 지원하였다.
- 1939년도에는 600명 모집에 약 12,300명이 지원하였다.
- 1940년도에는 3,000명 모집에 약 84,400명이 지원하였다.
- 1941년도에는 3,000명 모집에 약 144,700명이 지원하였다.
- 1942년도에는 4,500명 모집에 약 254,300명이 지원하였다.
- 1943년도에는 5,330명 모집에 약 303,400명이 지원하였다.
이러한 높은 경쟁률은 각 도가 경찰관을 동원하여 지원 열풍을 부추기고 권장한 이유도 있다고 하는데, 너무도 경쟁률이 높다는 것에는 정부의 장려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어떤 이들이 지원하였나?
지원자는 대개 중류 이하 생활을 하는 가정 출신자가 많으며 소학교 졸업 정도가 평균 학력이었다. 그다지 잃어버릴 것이 없는 상황의 중하층 조선인 청소년들이 일본군에 입대하여 ‘욱일승천 일본 제국의 일원으로서 오합지졸 중국군을 쳐부수는’ 직업을 가진다는 것에 상당한 매력을 느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조선인 청년들에게 직업으로서의 ‘일본제국군’은 그때까지 허용되어 있지 않았다. 때문에 중하류층의 조선인 청년들 상당수에게 일본군이 되는 것은 새롭게 그 길이 열린 매력적인 직장으로 보였다는 것이 이러한 높은 경쟁률의 하나의 이유일 듯하다. 당시 일본 본토에서는 청년들이 징병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신체를 손상하여 사회문제가 되고 있었던 것에 비해 조선은 지원병에 대한 경쟁률이 박터졌으니 흥미로운 일이다. 물론 조선인 지원병 정원이 그리 많지 않았다는 것은 감안해야만 할 것이다.
일본군이나 정부 측에서는 좀 더 학력이 높고 사회경제적으로 상류의 조선 청년들이 지원병에 응모하기를 바랐을 것이나 실상은 중하류층과 소학교 졸업자들이라는 최소 자격 요건만 갖춘 응모자들이 대부분이었다.
만주국 탄생과 중일전쟁이 발발하는 시점에서 조선에서는 만주 이민 열풍과 일본군 점령하의 화북 일대로 일확천금을 좇아 불나방처럼 이주하는 자들이 급증하고 있었다. 일본군 점령하의 중국에서 조선인들은 법적 일본인으로서의 치외법권을 누리며 중국인 상대로는 아편과 각종 마약을 팔고, 일본군 상대로는 각종 물품과 위안소업을 위시한 여러 돈이 되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업’에 종사하였으며 중일전쟁 발발 후 이렇게 화북의 일본군 점령 지역으로 진출한 조선인들은 7만여 명에 달하여 조선총독부의 두통거리가 되기도 하였다.
당시 주 북경 일본대사관 촉탁 와타나베가 작성한 ‘화북의 마약 비밀사회의 실체’에서는 아래와 같은 보고를 하고 있다. (박강, 2008, 『20세기 전반 동북아 한인과 아편』 참고)
“일지사변을 계기로 대륙에 진출한 조선인 다수는 당초부터 마약의 밀조, 밀매를 목표로 밀업의 중심지인 경진(북경과 천진)을 중심으로 전선으로 전선으로 황군의 진격을 따라 화북 전체로 이동하였다. 이러한 것은 군 주둔지에 부수한 상인 또는 통역, 군속으로 왕성히 위험지구에서 활약하면서 마약을 전선으로 화북 전역에 운반한 것이다.
적어도 황군이 주둔한 곳이라면 어떠한 전선의 소도시에도 조선인 밀업자가 없는 경우가 없으며(그들의 90%는 마약과 관련이 있다) 마약의 밀조, 밀수입, 밀매에 관계하는 자의 수는 1만 2, 3천 호 약 6만 명 정도, 주로 부정업에 의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황군이 주둔하면 반드시 조선인이 와서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은 영업을 하였는데, … 그러나 그들이 중국에 온 목적은 화북의 최전선에서 위와 같은 영업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헤로인의 밀매를 지향한 것으로 그들은 군 의존관계의 영업에 의해 거주의 안정을 도모하고 이면에서 폭리를 얻는 헤로인을 밀매하는 것이다. 또한 그들 가운데 자신이 속한 군의 이동에 따라 이동지로 전출하는 자를 보면, 군이 그들의 거주에 의해 편익을 얻은 관계가 많았기에 전출한 업자는 전출지에서도 계속하여 헤로인 밀매에 종사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지방에서의 밀매업자는 위와 같이 헤로인의 소매를 부업(오히려 본업으로 볼 수 있다)으로 하고, 그중에는 군관계의 일, 황군에 협력하는 경우도 자주 있는 관계로 도시에서의 부정업자에 비해 그 성격도 좋고 도시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심각한 범죄 등에 의한 어두운 그림자를 수반하지도 않고 있다.”
1942년 8월. 흥아원 화북연락부. ‘지나아편대책에 관한 협의회의 제출서류’에서는 화북 거주 조선인의 7할가량이 현지 중국인 상대 마약 밀매에 종사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화북의 마약제도 창시에 가장 우려하고 신중히 고려해야 할 것은 반도인, 이곳에 거주하는 전체 주민 약 7만 2천 명 가운데 약 7할로 칭해지는 이 같은 업자의 문제로서 이 문제에 대해 잘못 처리하면 화북의 치안을 어지럽히고 황국의 위신에 관한 사건을 만들어낼까 두렵다. 따라서 그것의 선후책에 대해 대사관 측과도 신중히 연구 중이다. 외무성 당국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 충분한 지도, 원조를 요망한다.”
조선군 측은 지원병제 도입에 대한 논리로서 아래와 같은 이유를 제시하기도 하였다.
“조선인은 지금은 문화적으로 향상해서 견식이 있고 활동력이 있는 인물이 계속 생기고 있으나, 그들이 조선 내의 제 기관에만 깊이 진입하여 교착하게 되면 조선 통치와 방위상 한심한 상태에 빠지게 될 위험성이 있다. 따라서 국외로 웅비할 수 있게 도와 내지인과 함께 동아대륙을 활보할 수 있게 하는 시책을 펼치는 것이 중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신속하게 징병을 펼쳐 큰 활력을 부여하여 국군과 함께 대륙경영에 매진하게 할 필요가 있다.”
즉 조선인이 조선에만 머무르면 그 에너지에서 문제가 생길 수 있으므로, 조선인이 일본인과 합동으로 ‘대동아를 웅비하며 활보’하도록 하여 일본인과 함께 대륙 경영에 매진하면서 건설적으로 조선인들의 에너지를 활용하겠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조선인 지원병 제도는 일본이 점차 패색이 짙어지던 1944년이 되자 징병제로 바뀌었다. 원래 계획으로는 향후 수십 년이 지나서나 조선에 징병제를 도입할 예정이었으나 전선의 다급한 상황은 이를 허용하지 않았다. 결국 1944년부터 종전 시까지 21만여 명의 조선인이 육·해군에 징병되어 그 중 6,400명 정도가 사망하였다.
내선일체와 조선인 지원병
위의 책은 일제 시대 잡지 ‘삼천리’에 대한 천정환 성균관대 교수 등의 국문학자들의 여러 논문들을 모아 놓은 것인데 조선인 지원병과 관련해서도 흥미로운 내용들이 있다.
원래 열렬한 민족주의자였던 파인 김동환(잡지 삼천리의 창간자)은 춘원 이광수, 육당 최남선처럼 이 시기에는 내선일체를 부르짖는 사람으로 변모해 있었다. 만주국의 탄생과 중일전쟁의 발발로 일본이 동아시아 전체를 집어삼키는 것이 눈앞의 현실로 드러나자 이들의 조선인 자결 민족주의는 조선인들 또한 욱일승천하는 일본 제국의 일원으로서 승리의 과실을 누리고 승자의 평등한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쪽으로 변모하였던 것이다.
일본이 만만한 중국만 쥐어패며 승승장구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최강국으로 여타의 다른 모든 강국을 합한 것만큼의 물량을 뽑아내는 미국과 전면대결하여 완전히 패망하게 된다는 근미래를 이들이 내다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중일전쟁 발발 후 1938년에 조선은 전쟁 특수로 미증유의 호황을 맞이하게 되어 경성방직은 50만 원의 국방헌금을 내고도 전 사원에게 연말 상여금을 100%나 주었고, 화신은 20%, 대동광업은 30%, 조선일보 20%, 동일은행 20%, 보성전문 10%, 동아증권 20%, 동아일보 10%, 총독부와 기타 관공서 15%, 매일신보 15% 등의 연말 상여금을 주었다. 중일전쟁이 조선에 가져다주는 이러한 경제 호황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김동환은 일본 제국이라는 강자에의 편승을 통해 조선인 또한 강자의 동등한 일원이 되겠다는 열망을 강하게 분출하였다.
한편 28대 1 정도의 조선인 지원병 경쟁률을 보였던 1940년에는 지원병에 불합격한 이창만이란 강원도 횡성군의 청년이 이를 비관하여 자살하여 항간의 화제가 되는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있었는데, 삼천리에선 이를 ‘애국미담’이라 소개하였다.
김동환은 지원병 지원자 거의 대부분이 서민의 자제이며 사회 지도층 인사들은 가장 소극적임을 질타하였다. 또한 많은 지원병 응모자들이 탈락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모집 정원을 대폭 늘려줄 것과 한시 바삐 징병제를 실시해 줄 것을 총독부와 군에 청원하였으나, 일본인만으로도 병력 자원은 충분하다 하여 묵살당하였다. 김동환은 징병제 실시와 조선인 참정권 문제가 밀접히 결부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총독부와 군 측에서도 병역의 의무와 참정권이 별개가 아님은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실제로 삼천리는 중일전쟁을 소리높여 고무하면서 또한 조선인에게 참정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기사를 동시에 내보내고 있었다. 같은 ‘내선일체’의 슬로건을 두고서도 일본 측에서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당분간 ‘위계가 뚜렷한 형제 관계에 머무르기를’ 원했으나, 김동환과 같은 조선 측의 적극적 내선일체주의자는 조선인과 일본인이 모든 면에서 ‘동등한 관계’이기를 소망했던 것이다.
제국의회 중의원 의원인 나가시마 류지는 ‘조선에 참정권을 시행하라’는 요지의 글을 삼천리에 실었는데, 그는 이 글에서 지나사변을 기점으로 내선일체가 ‘실제화’되었다면서 주요 근거로 중국으로 향하는 일본군을 향한 조선 민중들의 ‘감동적인 환송 행사’를 든다. 그리하여 지원병제도의 채용과 동시에 조선인 참정권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는 파격적 주장을 하였다.
朝鮮에 選擧法을 施行하라
중의원의원 衆議院議員 나가시마 류지 長島隆二北支往復의 途次 종종 朝鮮을 지나면서 痛感한 것은 반도의 놀낼만한 진전이다. 滿洲事變 당시도 어느 정도까지 순조롭긴 했으나 支那事變을 통해서 반도의 狀態는 전혀 內地와 일체라고 할만하게 진보되었다. 出征將兵을 驛頭에 전송하는 반도 어린이들의 군가를 듯고 눈물없을 수 있으랴. 夜間出征兵士를 빼놓지 않으려는 驛頭의 婦人들 성의에 어찌 탄복하지 않으랴. 朝鮮 어린이들이 戰地에 보낸 편지는 忠勇한 將兵을 감동케 했다고 들었다.
그우에 더구나 朝鮮의 경제적 발전은 我國經濟力에 공헌하는 바 多大하다. 온갓 물자가 무한의 援助를 하고 있을 뿐 아니라 將來 화학공업의 발전 등 기대되는 바 있다. 마츰 張鼓峰事件 당시에 京城에 있어서 직접 관찰할 기회를 얻었는데 日蘇關係惡化 중 가장 걱정된 것은 朝鮮民心의 動搖였으나 소련비행기의 폭격을 당한 지방에서도 민심의 동요가 없었다. 張鼓峰事件을 경험한 朝鮮은 벌서 시험을 끝마친 셈이다. 內鮮一如는 임이 실제화되었다.
志願兵制度의 채용은 참으로, 機宜의 處置이나 더 한거름 나가서 이때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것은 朝鮮의 參政權問題다. 이것은 目下 要求하는 바도 아니지만 局的으로 보는 때 今回의 선거법 개정에 반하여 이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要求되어서 施行하기 전에 實情에 卽하여 이것을 부여하는 것이 필요하다. 반도를 대표하는 의원이 帝國議會에 참가하는 것은 가령 其數가 10人에 達치 못한다 치더래도 반도에 끼치는 영향이 여기에 크리라고 믿는다. 內鮮의 일체화는 곧 日滿의 一心一德을 實現化하는 것이리라. 日滿의 融和이다.
물론 김동환이나 나가시마 류지의 희망은 실현되지 않았고 1944년이 되면 참정권 없이 징병제만 조선인들에게 강요되었다. 이때쯤에는 일본의 패색도 짙어졌고 아마 조선의 민중들 사이에 후끈 달아올랐던, 직업으로서의 일본군에 대한 환상이나 일본군 점령지에서 한 재산 만들겠다는 꿈도 사그라들었을 것이다.
평범한 이들에게 일본은 어떤 의미였나?
여론 조사도 없었던 시절이고 하니 중일전쟁 발발에서 2차 대전에서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던 때 사이 수년간 조선인의 일본 제국에 대한 민심이 어떻게 변천하였을지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당대를 살았던 개개인들의 회고담이 어느 정도의 사실을 알려줄 것이나 대한민국의 성립 후에 일제 시대를 회고하는 것은 어떤 식으로든 민족주의적 가치관이 강하게 개입될 수 밖에는 없는 일이다. 사람의 기억은 현재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의 가치관에 맞추어 자신의 과거를 미화하기 마련이다.
중일전쟁에 참가할 일본군 모집에 수십만의 조선인 청년이 지원하였던 일, 화북으로 수만 명의 조선인들이 건너가 일본군을 따라다니며 치외법권을 누리며 이익을 보았던 일 등을 보면 이 시기 평범한 조선인들의 상당수가 일본 제국의 중국 침략에 편승하여 직업적, 경제적 기회를 얻으려는 소망을 가지고 그 일부는 실제로 이를 행하였음은 분명하다. 물론 다수 조선인들의 일본에 대한 민심은 조선 내에서의 경기 활성화 정도나 일본군의 전황에 따라 계속 변하였을 것이다.
조선인 지원병에 대해 수십만 명의 지원자가 몰린 폭발적 응모율이나, 중일전쟁에서 일본군을 따라다닌 수만 명의 조선인들(마약을 팔고 위안소를 경영하고 일본군 첩자일을 하고…)의 사례는 신생 독립국 대한민국이 한시바삐 구축해야 할 내셔널리즘하에서는 결코 알리고 싶지 않은 흑역사에 해당하였다.
신생 대한민국은 일제 시대를 오직 저항과 수탈이란 두 축으로만 기억하기를 원했으며, 많은 조선인들이 강자인 일본제국의 대외 침략에 편승하고 그 일원이 되어 과실을 누리기를 갈망하였던 기억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억압되었다. 그것은 신생 독립국과 그 구성원들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자기부정적, 정신분열적 기억이었다.
윤해동 교수가 『식민지 근대의 패러독스』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식민지라는 상황은 그 땅의 사람들을 끊임없이 ‘정신분열적’ 상황에 노출시킨다.
식민모국으로부터 온 사람들로부터 받는 차별과 그러한 차별에 대한 반감, 식민모국이 다른 국가를 침략하고 승리하는 것에 그 일원으로 편승하여 강자에 동화되기를 욕구하는 갈망은 이분법적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며 많은 경우 동시에 존재 가능하였다.
중일전쟁으로 일본 제국이 그 영토를 광활하게 확장하여 동아시아의 패자가 될 미래가 눈앞에 명확히 보인 시점에서 많은 조선인들이 그에 편승하여 강자의 동등한 일원이 되기를 갈구한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한 미래가 사실은 신기루였음을, 7, 8년 후의 미래를 내다볼 수 없었던 것은 그들 중 저명한 일부의 인사들에게는 큰 불행이었으나, 그보다 훨씬 많은 무명의 민중은 그러한 내면적 흑역사를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망각하였고, 그렇게 신생 대한민국의 충량한 국민이 되었을 것이다.
원문: 다만버의 자유로운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