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사람이 살아 있어야 원조를 하든 개발을 하든 할 것 아닌가? 모든 군사활동에 대한 무조건 반사적 거부감을 버려야 한다. 인도주의적 군사활동은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개발협력의 저 밑바닥에는 인권의식이 깔려있다. 당연하다. 그럼 인권의 기초는 무엇인가? 다름 아닌 ‘생존’이다. 생존은 인권의 전제조건이다. 개발(발전)하려면 인권에 기초한 민주주의가 필수적이다. 인권을 사수하려는 움직임은 워낙 많은 사람의 동의 하에 광범위하게 지원되고, 또 내가 무엇 하나라도 덧붙일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므로 여기서 다루지 않는다.
대신 평화와 안보 문제를 얘기해 보자. (난 UN 평화유지군 출신이다) 인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생존을 보장하는 평화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이견이 별로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 당연한 생각을 실행하는 데는 이견이 존재한다. 바로 ‘맹목적 평화주의’다. 군사적 개입을 죄악시하면서 ‘평화는 평화로운 방법으로만 유지할 수 있다’는 논리인데, 내가 보기에는 ‘결과적 무기력 주의’와 다를 바 없다. ‘할 수 없는 일은 생각도 않는다’와 뭐가 다른가?
상황이 이렇다 보니 많은 사람이 개발공헌지수(CDI)를 인용하면서 원조 분야에서 꼴찌인 것은 그렇게 통탄을 하면서도, 안보 분야도 꼴찌인 것은 언급하는 이가 하나도 없다. (CDI, 맥락없는 남의 지표 인용을 멈춰라) 안보도 개발에 있어 어엿한 한 축일뿐더러, 내가 보기에는 더 급하고 중요한 분야인데 말이다.
아래는 국제적으로 인지도 높은 어떤 NGO의 활동을 설명하는 글이다. (이름은 가렸다)
쓰나미는 어차피 일이 벌어져야 알 수 있으니 발생 직후에 조치를 취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전쟁은? 전쟁은 다르다.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다르게 대부분의 전쟁은 ‘평화로운 일요일 아침 갑작스럽게’ 찾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국가 간 전면전은 사전에 발발할 것을 알아도 제삼자가 나서서 막을 길이 별로 없다. 안타깝지만 우리 개발협력계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내가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학살(Genocide)을 부르는 내전이다. 위에서는 내전 발생 시 24시간 내에 현장에 투입한다고 하는데, 안타깝지만 그런 NGO가 실제로 존재하는가? 뒤낭이 적십자를 이끌고 다니던 낭만이 넘치는 19세기 전쟁이 아니다. 내전 종식후 24시간 이내에만 현장에 도착해도 대단한 NGO 아닌가?
아프리카 내전 역사를 살펴보면 학살은 뚜렷한 경향이 있다. 내전을 치르다가 양쪽 세력간 힘의 균형이 무너질 때, 순간적으로 발생한다. 단기간 내에 엄청난 수의 양민을 죽이는 비극이 발생한다. 80일 만에 100만 명이 죽었다는 1994년 르완다 사태가 그랬고, 수개월 동안 400만 명 이상이 죽어 나가 ‘제3차 세계대전’으로 불렸던 1997년 민주콩고 내전이 그랬다.
국제사회가 그 상황을 모르지 않았다. 현장에 나가 있던 유엔 소속 정보장교들은 일촉즉발의 상황을 즉각 보고한 후 조치를 기다렸지만, 유엔 차원의 조치는 계속 미뤄졌고, 그런 사이에 숫자를 셀 수 없는 인명이 죽어갔다. 그리고 나서 한참 뒤에 유엔은 ‘안정화 작전’에 들어갔다. 난민 캠프를 설치하고 식량, 보건 등 긴급구호를 한다고 부산을 떨었다. 그런 보호를 받았어야 할 사람들 가운데 많은 수가(무려 수백만 명이) 이미 썩어 없어진 뒤에 말이다…
평화유지활동 비용을 ODA로 계상하면 왜 안 된단 말인가?
유엔 평화유지활동에 들어가는 ‘일부’ 비용에 대해서는 이미 ODA[1] 지출로 계상하고 있다. 그리고, OECD에서 논의되고 있는 원조에 대한 새로운 측정방식인 TOSD(Total Official Support for Development)에서 이를 인정하는 범위에 대한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이에 대해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다.
국제 원조체제를 감시하는 국제NGO들의 연대체라는 RoA(Reality of Aid)는 평화와 안보 및 군사 분야 지출은 ODA와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ODA Watch 뉴스레터 96호 참조)
이 말은 ODA 예산이 국방 예산에 녹아 들어가는 것을 반대한다는 의미로 들린다. 어떻게 보면 맞는 말이다. 그런데, 다른 시각에서 보면 평화와 안보 및 군사 분야 지출은 ODA에 낄 자격이 없다는 주장 같기도 하다. ODA에서 제외되면 아무래도 예산상의 제약을 더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시민사회가 가진 군사활동에 대한 시각(파병은 다 똑같다는 시각)이 중요한 배경이다.
파병에도 여러가지가 있다
1. 우선, 이른바 ‘국익’을 위한 파병이 있다.
멀게는 월남전 파병이 그랬고, 가까이는 UAE 파병이 그렇다. 월남전 파병은 힘없고 가난한 시절, 강대국의 압박 (형식적으로는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동참했다는 변명이 있을 수 있다. 조선 효종 대에 청나라의 압력으로 러시아군을 치러 간 나선정벌과 유사한 상황이다. 국익 외에 민주주의 수호, 독재자 축출, 세계평화 위협세력 제거 등의 명분이 동원되지만, 국민 전부가 공감하기는 어려운 얘기다.
그런데, 최근에 있었던 UAE 파병은 사안이 다르다. 누가 압력을 준 것도 아닌데 무작정 감행하는 파병이다. 아무런 명분 (심지어 명분을 위한 명분)도 없다. 오로지 국익만 있다. 그것도 진짜 국익이라기 보다는 일부 기업에 대한 특혜라고 보는 시각도 많다. 명분 없는 해외파병, 소수 기업만 웃는다 (링크)
2. 그 다음은 ‘다국적군’ 파병이다.
이는 뭔가 지킬 것이 있는 국가들끼리 남의 영토에 들어가 벌이는 작전이다. 형식적으로 유엔안보리의 승인을 득하지만, 그거 없다고 가지 않을 것도 아니고, 경비도 전부 자기 부담이다. 우리는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다국적군으로 참여했다. 주도하는 측에서 명분을 쌓기 위해 가능한한 많은 나라를 끌어들이기 위해 노력한다.
좀 애매하긴 한데, 개인적으로 나는 이런 식의 파병은 반대하는 편이다.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월남전에 나갈 때나 별 다를 게 없는 상황이니 변명거리가 아주 없는 건 아니다. 한국군 안 보내면 주한미군을 빼내 갈 것처럼 구니까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는 면이 많지만, 그래도 우리 입장 생각해서 남의 입장 무시하는 건, 김구 선생님이 염원하던 ‘문화국가’가 할 일이 아니다.
3. 그런 파병 말고, 다수의 UN 평화유지활동(PKO) 파병이 있다.
이런 파병은 국제사회의 동의와 유엔의 공식 요청에 따른 것이다. 당연히 응해야 하는 것이고, 가능하면 많은 지원을, 그것도 ‘서둘러’ 보내야 한다. UN 평화유지군은 앞서 다룬 무작정 파병이나 다국적군 파병과는 완연히 다른 종류의 파병이다. (자세한 구분은 이 글 맨 아래 붙여둔 비교표를 참고하시라)
그런데, 이런 파병의 종류를 구분하지 않고 무조건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국군의 ‘남수단’ 파병은 즉각 철회되어야 합니다 (링크) 내용을 읽어보면 답답하다… 파병 목적에 전혀 구분이 없고, 남수단 한빛부대 파병이 마치 석유자원 침탈을 위한 노림수인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위에서 설명한 파병 종류를 한데 다 섞어서 결론을 내린 것이다.
심지어, 유엔 평화유지군이 무력조직이다, 남수단 정부를 일방적으로 지원한다, 필요하면 북수단에 나가있는 유엔군을 데려다 써라 등등 전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 주장으로 일관하고 있다. 북수단에 나가 있는 유엔군은 Darfur 사태를 수습하는 일에도 정신이 없는 상태라는 걸 알고나 있는지 모르겠다. 이 단체에는 2012년 이 성명서 발표 당시 내가 상황을 설명하는 메일을 보냈지만 여태까지 묵묵부답이다. 반론도 없다. 무지를 빙자한 무책임인지, 무책임 같아 보이는 비겁함인지 구분이 안 되는 수준이다.
평화유지활동은 단순한 군사활동이 아니다
무조건 군사활동을 하지 않아야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니다. 적기에 적절한 무력을 행사할 준비가 필요하며, 유사시 가장 빠른 방법으로 상황을 끝내는 것이 진정으로 평화를 유지하는 길이고 결국 사람을 살리는 길이다.
특히, 우리 개발협력계 참여자들은 어떤 접근법이 진정으로 ‘개발’을 위한 것인지 잘 판단해야 한다. 개발협력계에서 금과옥조처럼 떠받드는 Do No Harm 원칙은 개발 목표에 부합해야 한다는 커다란 전제가 있다. Do No Harm 원칙은 대규모 살상이 코 앞에 닥쳐 있어도 외우기만 하면 되는 만사형통 주문이 아니다.
더 이상 지구상에서 대량살상 사태가 없기를 바라지만, 최근 시리아 사태에서 보듯 현실은 냉혹하다. 국제사회가 개입을 미적거리는 사이, 수십만의 양민이 죽었다. 초기에 과감하게 개입했더라면 어땠을까? 유엔이 MDGs(새천년 계획선언)를 SDGs(지속가능 발전 종합목표)로 간판갈이 하고 있는 동안 벌어진 일이다.
물론, 유엔 평화유지활동이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분쟁을 배후조종한 국가(차드) 군대를 평화유지군으로 파병하면서 문제를 일으켰다 (중아공에 대한 UN PKO 파병을 환영한다). 소말리아에서는 국경분쟁 당사자인 에티오피아와 케냐 군대를 평화유지군으로 파병하여 테러 사태를 촉발했다 (에티오피아군의 케냐 파병을 반대한다).
개발협력은 분명 한계가 있다. 모든 문제에 해결책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 개발협력계는 이렇게 더 중요하고 심각한 상황에 대해 침묵하면서 상대적으로 사소한 일에 목을 매고 있지는 않은가? 어차피 만병통치약이 없다고 해서 사후약방문이나 써대고 있지는 않은가? 한번쯤 생각해 볼 일이다.
생존이 먼저다.
사람이 다 죽고 나면 구호활동이 무슨 소용인가?
원조보다 생존을 먼저 지원하자!
부록: PKO와 다국적군 비교표 (외교부 작성)
원문 : 개발협력에 마케팅을 더하다
- 공적개발원조 (Official Development Assistance).개발도상국에 경제발전과 복지향상을 위해 정부 또는 정부의 원조기관에 의해 무상 부분을 일정 비율 이상으로 하는 증여·차관·배상·기술원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