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만 관객을 돌파한 <킹스맨>이 ‘19금’ 외화 중 최고 흥행작으로 등극했다. <킹스맨>의 이 흥행 스코어는 미국 다음으로 많은 숫자로 심지어 영화를 만든 영국보다 많다. 영국 배우의 재발견, 스파이 영화의 재해석, 모던함과 B급 액션의 조화, <올드보이>를 참고한 신선한 액션, 경쟁작이 없던 늦겨울 극장가, 젊은층과 중장년층이 동시에 공감할 가벼운 오락영화 등 흥행 원인에 대한 다양한 분석이 나오고 있는데, 그중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이 영화의 서사구조다. 얼핏 보면 기존에 보아온 익숙한 이야기들의 짬뽕처럼 보이는데 하나씩 뜯어보면 대중이 좋아할 만한 것들만 모아놓은 종합선물세트다. 그것도 절묘하게 잘 배합한 맛있는 선물상자다. 그 속에 담긴 과자들을 하나씩 꺼내보자.
1. 보이지 않는 영웅
영웅은 숨어 있어야 영웅이다. 제임스 본드, 제이슨 본, 이단 헌트, 잭 라이언, 맨 인 블랙의 공통점은 남들에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세계 평화를 위해 일한다는 것. 그들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지금껏 본 적 없는 멋진 옷을 입고 최첨단 무기를 사용한다. ‘킹스맨’도 그 계보를 잇는다.
런던의 양복점은 무기창고이고, 영국 왕실과 연결된 비밀 공간에 거대한 기지가 있어 세계를 위기에서 구할 작전을 수행하면서도 그들의 신분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들의 이름이 신문에 올라가는 경우는 부고 기사일 때만 가능하다. 대중이 영웅을 사랑할 때는 그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묵묵히 남들을 도울 때다.
2. 멘토와 멘티
사람들은 어리숙한 주인공이 대가에게 훈련받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가장 유명한 멘토는 제다이 기사들을 키워낸 <스타워즈>의 요다일 것이다. <반지의 제왕>의 간달프, <해리 포터> 시리즈의 덤블도어도 멘토이고, <시네마 천국>의 알프레도, <죽은 시인의 사회>의 키팅은 선한 멘토, <월 스트리트>의 고든 게코와 <양들의 침묵>의 한니발 렉터도 굳이 따지자면 악한 멘토다. 그에 비하면 <킹스맨>의 해리는 아주 모범적인 멘토다.
<킹스맨>은 스스로 <더티 댄싱> <귀여운 여인> <마이 페어 레이디> 등 촌스러운 여자가 댄스 교사나 부유한 귀족, 언어학자에게 과외수업 받는 영화에서 모티프를 따왔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런 익숙한 스토리들 역시 멘토와 멘티 스토리에 로맨틱 코미디를 결합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영화 속 멘토들은 대부분 죽거나 몰락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주인공이 악당에 대한 복수를 결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리크루팅과 서바이벌 게임
<헝거 게임> <엔더스 게임> <다이버전트> 등 최근 개봉한 밀리언셀러 원작 영화들의 공통점은 서바이벌 게임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이미 지상 최고의 소수정예를 뽑아 놓고 그 안에서 또다시 혹독한 경쟁으로 단 한 명만 뽑는 이야기 구조는 사람들을 흥분시킨다.
단, 이런 이야기의 조건이 있다. 주인공은 참가자 중 가장 약한 자여야 할 것. 신분이 미천하거나 나이가 어리거나 체격이 작아야 한다. 그러면서도 외모는 준수해야 한다. 그래야 사람들이 감정이입할 수 있다. <킹스맨>의 에그시 역시 고졸 서민 출신이지만 뛰어난 실력으로 생존게임에서 살아남는다.
4. 명백한 가치 전복
정의는 식상할 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유효한 가치다. 사람들은 현실에서 못다 이룬 정의가 극장에서라도 실현되기를 바란다. <킹스맨>에서 정의가 실현되는 지점은 자기만 살겠다고 모인 전 세계의 부자들이 가장 안전하다고 믿었던 노아의 방주에서 꽃으로 피어날 때다. 엘가의 ‘위풍당당 행진곡’이 훌륭한 반어법으로 쓰였다. 선과 악의 경계를 뚜렷하게 구분지어주는 이 장면에서 관객은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더 이상 어느 편에 설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낀다.
결론
대중은 이러한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왜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사실 대답하기 곤란하다. 인간의 유전자에 이런 이야기에 끌리는 힘이 있다고 주장하는 전문가도 있다. 워너 브라더스의 스토리 컨설턴트 리사 크론은 “인간의 신경회로가 특정 이야기를 갈구하도록 설계되어 있다”고 말한다. 호모 사피엔스인 인류는 지난 3만5천 년 간 살아오면서 이런 이야기를 해왔고 그래서 익숙하고 그래서 좋아하는 것이다.
그런데 마지막 궁금증. 왜 <킹스맨>은 유독 한국에서만 잘 됐을까? 그 이유는 한국인들의 유별난 선물세트 사랑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을 때 우리는 “둘 다”를 외친다. 그래서 중식당에서 ‘짬짜면’을 시키고, 술집에서 ‘모듬 안주’를 주문한다. 한국 영화는 코미디로 시작해 드라마로 끝나는 ‘웃픈 영화’가 흥행하고, 한국인들이 유럽여행을 가면 가급적 더 많은 도시를 돌아다니려 한다.
그렇다면 대중이 좋아하는 요소를 섞으면 누구나 흥행 대박 영화를 만들 수 있을까? 글쎄, 결국 만듦새가 중요하다. 아무 술이나 섞는다고 모두 칵테일이 되지 않듯이 요소들을 적재적소에 맛있게 섞어야 한다. <킹스맨>의 성공 비결은 대중이 좋아하는 이야기 요소들을 근사하게 버무렸다는 데 있다. 영웅, 멘토, 리크루트, 가치 전복 중 어떤 요소도 길게 끌지 않고 가볍고 경쾌하게 접근했다. 또 영국 스파이와 거대 미국 기업주의 대결이라는 기본 구도 아래 요소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들도록 했다. 여기에 영국 신사의 더블 자켓과 우산을 첩보원의 방탄 수트와 무기로 개조한 상상력이 캐릭터로 만들어져 이야기에 매력을 더했다.
원문 : 인생은 원테이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