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New Republic의 「The Hannah Arendt Guide to Friendship」을 번역한 글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좋은 친구였습니다. 지적인 동료이자 친구였던 매리 매카시가 유산하고 정신적 위기를 겪을 때도, 스승이자 멘토였던 칼 야스퍼스가 전후 독일에서 고난을 겪을 때도 늘 그들의 곁에서 도움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남편이었던 하인리히 블뤼허(Heinrich Blücher)가 학계에서 어려움에 처했을 때도 그의 편에 섰습니다.
존 닉슨은 그의 저서 『한나 아렌트와 우정의 정치학』에서 아렌트가 벗들과 어떤 우정을 쌓아 왔는지 조망합니다. 닉슨의 책에서 당대의 지성인이자 스캔들의 중심이었던 아렌트는 우정과 생각을 나누는 데 골몰한 한 명의 인간으로 그려집니다. 그의 삶은 우정이라는 이름하에 지나치기 쉬운 인간관계의 역동적인 면모를 보여줍니다.
“우정이란 우정에 대한 관념을 현실세계에 적용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정의 본질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조망하고 비추어보는 작업도 아닙니다.”
아렌트에게 우정이란 사적 영역에만 머무르는 관념과 공적 영역인 가혹한 현실 사이의 완충지대였습니다. 우정이라는 안전지대에서 베일에 가려진 사상을 드러내 보여주고 다듬으며 더 나은 형태로 만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에게 벗이란 지적 세계의 동지들이었으며 아렌트는 그들에게 변함없이 충실했습니다. 이는 벗들이 베푼 친절에 상응하는 깊은 감사의 표현이었습니다.
망명자 중의 망명자, 모국에서 추방당한 유대인의 삶을 영위해온 그에게 우정이란 전체주의의 군화에 짓밟힌 자유, 그리고 더욱 높은 인간적 가치를 대변하는 상징이었습니다. 우정을 나누며 싹트는 즐거움과 동지애는 파시즘의 비인간성에 저항하는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아렌트는 나쁜 친구이기도 했습니다. 2차대전 이후 아렌트는 마르틴 하이데거를 만납니다. 홀로코스트가 유대인의 책임이라고 주장했던 그의 반유대적 사상에도 하이데거는 아렌트의 “가장 훌륭한 스승”이었습니다. 전시에 보인 용서할 수 없는 행동과 아렌트의 업적에 대한 “완벽한 침묵”조차도 그를 하이데거에게서 떼어놓진 못했습니다.
아렌트의 저작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출간된 직후 그는 가깝게 지내던 유대계 지식인들의 반발을 샀습니다. 옥스퍼드에 있던 이사야 벌린은 아렌트를 대놓고 배척했습니다. 오랜 친구이자 멘토였던 커트 블루멘펠트는 그를 거부했을뿐더러 화해조차 하지 않은 채 죽었습니다. 역시 오랜 친구였던 게르솜 숄렘은 편지를 보내어 “악의 평범성”이란 그저 “슬로건”에 불과할 뿐이라고 강하게 비판했습니다.
아렌트의 오랜 친구는 그가 사려 깊은 비판과 명백한 불경(blasphemy)을 분별하지 못했으며, 홀로코스트의 희생자들에게 저지른 무신경한 폭력을 감정에 휩쓸리지 않는 이성적 태도로 잘못 착각했다고 여겼습니다. 지적인 동료들에게 충실하고자 했던 그였으나 동족인 유대인에게는 가혹했습니다.
아렌트는 고뇌에 찬 친구였습니다. 자의식으로 가득 찬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가 보여준 친나치주의적 열정이 딱히 아렌트를 겨냥한 건 아닐지라도, 벗의 삶을 규정해 온 근원적 사실을 증오함으로써 성립하는 우정이란 대체 어떤 걸까요? 아렌트가 하이데거에게 바쳤던 지속적 존경을 놓고 볼 때, 극도의 자기혐오가 아니라면 적어도 그것은 남들의 경멸 앞에 무감할 수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저자인 닉슨은 우리가 아렌트의 ‘우정’에 잘못된 질문을 던지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몇십 년에 걸친 하이데거와의 관계를 들며 그는 말합니다.
“아렌트가 스스로에게 던졌을 법한 질문은 ‘어떻게 이 남자를 향한 우정과 애정과 충실함을 스스로에게 정당화할 수 있을까?’가 아닌 ‘근원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이 남자와의 갈등을 돌이킬 수 없다면, 그 갈등의 결과를 어떤 식으로 살아내야만 할까?”일 것입니다.”
한편 우리는 닉슨의 저서를 철학사나 평전으로서가 아니라 자기계발의 지침으로도 읽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감정적으로 건강하고 충만한 삶은 결혼만큼이나 튼실하게 묶인 우정에서 비롯됩니다. 저자는 아렌트가 그의 친구 매카시에게 했던 말을 간추려 보여줍니다.
“결혼은 끝이 나고 욕망도 시들지만 우정은 계속될 수 있으며 계속되어야 하지.”
이 점에서 아렌트는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소통과 드문 교감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한 명의 사례입니다.
오늘날의 삶은 질보다 양에 초점이 맞춥니다. 새로운 경험이 익숙한 즐거움을 대체합니다. 오래된 친구에게 충실한 것은 세상이 주는 온갖 무수한 경험의 폭을 제한하는 것으로 비칩니다. 그러나 지속적이고 안정된 우정이야말로 우리의 삶을 검증해볼 수 있는 시험대인 동시에 보호받을 수 있는 공간이라고 저자는 주장합니다.
“우정이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 공과 사의 쌍방으로 흐르는 흐름을 보다 쉽게 만들어 주기 때문이며, 세상에 압도당하지 않으면서도 그 풍부함으로부터 등을 돌리지 않게끔 지켜주기 때문입니다.”
한나 아렌트의 우정관과 그 저변에 깔린 정치학은 한 가지 시각으로만 해석할 수 없습니다. 다만 저자는 그녀의 삶과 우정에서 우리가 새롭게 배울 점이 있다는 것을 넌지시 알릴 뿐입니다. 순전하고 오래 가는 우정, 경애와 충실함과 실없는 장난과 함께한 고난으로 이루어진 우정이 아니라면 우리는 이 세계에서 오직 혼자일 뿐입니다. 트위터 팔로잉 숫자 따위가 중요하겠습니까? 저자는 말을 맺습니다.
“아렌트 못지않게 우리에게 우정은 인생 전반에 걸쳐 이루어지는 끊임없는 학습입니다. 어떻게 더불어 살 것인가에 대한 답변입니다.”
원문: 뉴스페퍼민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