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잘 살고 싶다. 좋은 사회에서 살고 싶다. 걱정과 근심 없이 살고 싶고 자부심을 가지고 살고 싶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할 수 없는가. 나는 이와 관련해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계속 목격해오고 있다.
첫째로 사람들은 이 질문이 너무 뻔해서 자신이 이런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를 잊었다는 것이다. 둘째로 사람들은 질문은 잊었으면서 답은 너무도 빨리 확신한다. 질문은 잊었으면서 문제는 이거라고 확신하는 식이다. 그들이 질문을 잊어버리는 이유는 스스로가 답을 찾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이다.
답은 정해져 있으므로 그것만 하면 되는데 그게 잘 안된다. 그게 분하고 안타깝다. 거기서 씩씩대는 것에서 뒤로 돌아갈 용기는 없다. 어느 정도는 게으름과 공포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장난감이나 기계를 조립한다고 하자. 겨우겨우 어느 정도 진도가 나갔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뭔가가 잘못되었다. 작동을 하지 않는다던가, 뭔가가 잘못되어 더 이상 조립이 불가능해졌다.
부품을 하나 빼먹었다던가 하는 그런 실수 때문일 수 있다.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 분명하다. 이렇게 우리는 실수가 뭔지 명확해도 그걸 다 분해하고 다시 출발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하물며 무슨 실수를 저질렀는지 불분명한 상황에서, 우리는 여태까지 공을 들인 것을 멈추고 싶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오히려 한 발 뒤로 물러서서 내가 살아온 방식에 뭔가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고, 기꺼이 손에 넣은 것을 포기해야만 진정한 발전이 가능할 때가 있다. 작은 것이 아까워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계속 막다른 골목에서 점점 더 곤란한 상황만 만들 뿐이다. 그런 상황 중의 하나가 바로 우리의 근원적 질문을 다시 생각해보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좋은 사회는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가. 이런 질문은 사실 너무 엄청나게 들려서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런 허황된 생각은 하지 말고 빨리 이번 달 가스비 지출이나 좀 줄일 방법을 찾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런 태도가 항상 틀린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총론에 매달리고 어떤 거대한 철학에 매달리는 대신 생활의 현장에, 실천에 매달려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말은 분명 진실의 일면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리가 어떤 총론이나 철학적·문화적 가정을 따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다.
우리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우리의 이웃에게서, 방송에서, 국가에서 그런 것들을 주입받는다. 그것들에 동의한다면 상관 없지만, 만약 그것들이 동의할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런 주입과 세뇌에 저항해야 하고, 이는 우리가 총론 차원에서의 고민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저항하지 않으면 일상이 우리의 사고를 지배해 버린다.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게 아니라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사랑한다는 말을 외우는 것은 간단하다. 하지만 기독교 신자는 마치 그것을 잊어버릴 것을 걱정하듯 주말마다 교회에 가서 그 소리를 다시 듣고 심지어 매일 중얼중얼 반복하기도 하지 않는가. 나의 생활을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로 반복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지 않을 때 자신도 모르게 우리는 우리가 전혀 동의하지 않는 어떤 총론, 철학에 따라서 살게 되고 답이 아닌 것을 답으로 확신하게 된다.
사람들이 답으로 확신하곤 하는 것 중 하나는 악의 설정이다. 즉 당신의 어려움과 고통은 어떤 제도나 계층, 혹은 관습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것만 없어지면 세상이 훨씬 살기 좋아질 텐데, 그것이 없어지지 않는다. 이는 타인들의 고통에 무관심한 악한 사람들 때문이다. 이것이 악의 이론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매력은 그 단순명쾌함이다. 그리고 그 단순명쾌함은 당연히 문제가 있다. 그것이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작은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면 문제가 덜하다. 그러나 사회나 국가나 세계에 대한 것이라면 문제는 훨씬 심각하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일이 세상에는 많기 때문이다.
당신이 만약 현 여당이 악의 근원이라고 생각하거나 재벌회사가 악의 근원이라고 생각하거나 부동산 선분양제나 소득세 수준이, 대학 서열화가 악의 근원이라고 생각한다고 하자. 이런 경우 대개의 사람들은 그 너머는 잘 묻지 않는다. 다시 말해 악인데도 불구하고 여당은 어떻게 승리하는가, 악인데도 재벌회사는 어떻게 계속 승승장구하는가, 악의 제도들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는가에 대해 그냥 악이라고만 하는 것이다. 무지와 무관심의 벽은 간단히 내려진다. 악은 무관심과 무지의 다른 이름이다.
이것은 빨갱이들이 난리를 피워서 세상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왜 그 ‘빨갱이’들이 끝없이 거리로 나와서 시위를 하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것과 같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종종 돈 받아서 그렇다고 생각하거나, 미쳤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그럴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거기서 멈춘다. 그 너머는 알 필요도 없다.
이러는 가운데 잊혀지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나 자신이다. 자신이 어릴 때 꿈꾸던 게 뭐였는지 기억하거나 떠올려 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일상에 코가 꿰여서 점점 더 많은 일들이 어쩔 수 없는 것, 절대로 바꿀 수 없는 것이 되어 가고, 따라서 내가 원하는 것 따위는 이제 거의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어 가는 게 대부분이다.
내가 원하는 것은 이제 좀 덜 불행해지는 것 정도다. 꿈은 사치다. 우리는 행복을 꿈꾸더라도 엄청난 제약 속에서 꿈꾼다. 우리는 어느새 아주 작은 상자에 구겨 넣어져서는 그 안에서 불편해서 끙끙대는 존재처럼 변했다. 우리의 사고는 상자 바깥까지 뻗어 가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체념하고, 어떤 사람은 필사적으로 탈출구를 찾는다. 체념한 사람들은 이게 행복이라고 자위한다. 그게 사실이라면 나쁘지 않지만 습관적으로 자살기도를 하면서, 우울증에 빠지고, 이유 없이 감정적으로 폭발하면서, 나는 별문제 없다고 말한다면 그게 사실처럼 보이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보인다. 체념했다, 나 정도면 행복하다고 말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실제로는 고통 속에서 사는 것 같다. 사실 상자가 좁아서 미칠 지경이다. 단지 답 찾기를 포기했을 뿐이다.
필사적으로 탈출구를 찾는 사람도 너무 빨리 답을 찾았다. 그것은 마치 절대로 깨어질 리가 없는 엄청난 벽 앞에서 벽을 두들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설사 그 벽이 무너지면 탈출구가 생기는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 벽은 너무나 엄청나서 절대 무너질 것 같지가 않다. 그 점을 지적하면 그들은 때로 “그래도 난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한다. 포기하지 않는 것은 좋은 것이다.
하지만 질문을 잊어버리고 너무 빨리 찾은 답에 집착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라고 착각하고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실은 오른쪽으로 고개만 돌리면 문이 있는데, 문은 찾지 않고 벽만 두들기고 있는 것일 수 있지 않은가. 만족스런 삶을 위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사는 보람찬 삶을 살고 있다면서, 그 사람은 왜 그렇게 불행해 보일까.
우리는 변한다. 만족스런 삶이 고정된 삶은 아니다. 그래서 더더욱 나는 두 가지가 소중한 것이 아닌가 한다. 하나는 너무나 당연해도 당연한 질문을 다시 던지는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이것이 그 질문이다. 두 번째는 그 질문에 대해 가능하면 단순하게 답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단순하게 답한다는 것은 가능한 한 단순하게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변하니까, 나중에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달라져서 또 다른 것을 해 봐야 할지도 모르니까 단순한 게 좋다. 삶의 단순함은 굉장한 미덕이다. 포기할 수 없는 게 너무 많아져서 질문 자체를 다시 던질 엄두도 나지 않게 되면 아주 곤란한 일이 벌어질 수 있다. 감옥에 갇히는 것이다.
거리에는 너무도 많은 것을 가지고 너무도 좁은 세상에서 갇혀서 사는 사람이 가득하다. 내게는 왠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보였다.
원문 : 나를 지키는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