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의 정책적 방향을 어떤 사람들이 결정하는가를 논할 때, 경제와 정치 분야가 그렇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국 사회는 예술가나 학자나 체육인이 방향을 결정하는 사회가 아니다. 결정하는 것은 돈과 정치력이다.
그렇기때문에 우리의 경제적 논의와 정치적 논의에서 뭔가 중요한 것이 빠지게 된다면 그런 것들은 사회적으로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게 된다. 중요한 것인데 사람들에 의해서 잊혀진다면 문제가 없을 수가 없다. 세상에 문제가 있을 때 사람들은 지금 자기가 보고 있는 것들 사이에서 열심히 답을 찾지만, 실은 그 잊혀진 조각을 빼놓으면 답을 영원히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을 빼놓았기 때문에 답을 수 없는 상황을 잘 보여주는 것의 사례가 국민분열이다. 똑같은 법도 누가 여당인가 하는가에 따라 꼭 필요한 법에서 불필요한 법이 되며, 똑같은 행동을 해도 어느 패거리에 속한 사람인가에 따라 그 사람을 비판하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게 되는 일을 우리는 목격한다. 국민은 점점 더 서로 다른 언어를 말하는 타인이 되어가거나 무대 위에서 여러 가지 일들이 벌어지는 것을 그저 구경만 하는 관객이 되고 만다.
서로를 미친 사람으로 보게 된다는 뜻이다. 민주 사회에서 대화가 불가능해진다는 것은 곧 아무것도 제대로 굴러가지 않는다는 의미와 같다. 우리가 점점 더 좋은 세상에 대한 희망이 사그라지는 것을 느끼게 되는 이유다.
문제는 우리의 정치경제가, 여·야 진보 보수 할 것 없이 대부분
여러분의 욕망에는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내가 그걸 이뤄드리겠습니다!
라고만 외치고 있다는 것이다.
욕망이 바뀌지 않으면, 세상도 바뀌지 않는다
경제 분야가 소비자에게 아첨하고 있다는 사실은 설명할 필요가 거의 없다. 물론 ‘올바로 생산하고 소비하자’는 윤리적 소비에 대한 논의도 있지만 적어도 한국 내에서 그런 사고를 하는 사람에게 존재하는 정치 사회적인 힘이 미미하기 때문에 한국 경제의 관심은 온통 수익률에만 집중돼 있다. 대기업만 그런 게 아니다. 아파트 열풍으로 집값이 올라가는 것을 바라는 수없이 많은 개미 투자가들은 언제 한국 사회 전체의 입장에서 문제를 바라보는가?
그들에게 윤리적 소비란 고작해야 어디 먼 나라의 가난한 사람들이 파는 커피를 조금 높은 가격에 쳐주고 사주자는 정도에 머무른다. 그들이 더 큰 아파트를 원하는 것, 더 고층아파트를 짓는 것의 윤리적 혹은 사회적 책임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쏟아지지 않는다. 경제활동이란 곧 순수한 수익추구를 의미하는 것으로 통한다.
국민분열이 일어나는 과정은 지극히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다. 만약 누군가가 “여러분에게는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라는메세지만 외치고 있는데도 잘 안돌아가는 것이 그렇게도 많다면, 이제 어떻게 말하고 생각해야 할 것인가. 세상의 뭐가 잘못되어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한 답이 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아닌 다른 것들인데, 대표적으로 제도와 정치적 반대자들이다.
이런 견해에 따르면 세상이 이렇게 엉망인 것은 어떤 제도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제도를 개혁해야 한다. 예를 들어 교육문제의 핵심은 대학입시제도를 고치는 것으로 종종 이해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계속 입시제도를 바꾸는 것을 계속하고 입시는 점점 더 복잡해져 가고 누더기가 된다. 문제는 그렇게 바꿔도 별로 세상이 좋아지는 것 같지 않으며 제도를 바꾸는 일이 언제나 손쉽지만은 않다는 것이다. 한 번만 더 바꾸면 천국이 올 것 같은데 그렇게 되질 않는다.
그렇다면 왜 세상은 잘 돌아가지 않는가. 이제 남는 것은 정치적 반대자다. 정치적 반대자들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한국사회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빨갱이들때문에, 골통 보수와 탐욕스런 기득권자들때문에 한국 사회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러한 이해속에서 사회적 모순의 모든 책임은 정치적 반대자들에게 쏟아지고 그들은 마땅히 극단적으로 미워하고 비판해야 하는 존재가 된다. 돌아보면 합리적 제도에는 합리적 인간이 같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 망각된다. 합리적 인간은 망각된다. 그리고 모든 불합리는 우리 패거리 바깥쪽의 다른 인간들에게서 나온다고 이해된다.
국민 분열의 과정이 이렇게 뻔하지만 그 과정이 멈추기는 커녕 오히려 가속화 되는 이유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는 방법중의 하나는 우리들의 욕망에는 잘못이 없다고 말하는 것을 중단한다는 것이 뭘 의미하는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세상은 곧잘 이것을 세상의 모순은 내 잘못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가끔 가다가 세상에는 남 탓을 하지 말고 내 탓이요라고 말하자는 바람이 분다. 그것은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분열의 문제를 해결해 보려는 노력이지만 여전히 잘못된 것이다. 세상에는 잘못이 있고 이것이 내 탓이 아니면 네 탓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일단 잘못이라는 폭탄을 만들어내면 그것을 남에게 던지건 아니면 내 손에 들고 있건 누구도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배우기 위해, 성장하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
우리의 정치경제에서 잊혀진 것은 인간은 배우기 위해, 성장하기 위해 살아가는 존재라는 개념이다. 그런데 더 성장한다는 개념은 지금은 잘못된 인간이지만 잘못이 없는 인간이 된다는 것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말해서 실패하는 것이 잘못이라면 우리는 영원히 잘못없는 인간이 될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유한한 인간이듯이 미래에도 영원히 유한한 존재일 것이기 때문이다.
성장하기 위해 살아간다는 것은 세상을 살피는 것 이상으로 자신과 대화하고 자신을 살핀다는 것이다. 즉 나의욕망에는 문제가 없는가를 먼저 생각한다는 것이다. 삐뚤어진 욕망을 가진 학생과 선생과 학부모가 있다면 교육제도는 어떻게 바꿔도 문제를 만들 것이다. 반면에 조금이라도 그 삐뚤어진 욕망만 교정된다면 수없이 많은 해결책과 제도개혁은 애초부터 별로 필요 없는 것일 수 있다.
이 세상에 순수한 악, 순수한 잘못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가진 것은 그저 부족하고 한계를 가진 자기 자신과 그런 이웃들이다. 그것을 악이나 잘못의 개념으로 파악하는 것은 옳지 않다. 부질없는 미움과 분열만 부추기기 때문이고 대화는 점점 더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의사소통이 제대로 안되도 계속 접촉하고 만나는 것을 포기한다면 그 순간 문제는 훨씬 더 어려운 것으로 바뀐다.
오늘도 대중에게 아첨하는 정치인은 “여러분의 욕망에는 잘못이 없다. 내가 그걸 다 이뤄드리고 싶다. 하지만 이런 제도가 문제고, 저런 정치적 반대자들이 문제다”라고만 외친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정치적 자살처럼 생각된다. 그런 현실 속에서도 무소유를 외치던 법정의 메세지가 계속 필요한 메세지라고 생각되어지는 것은 이런 식으로는 세상에 문제가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무소유를 외치는 정치적 세력이란 미친 소리인 것 같다. 그래서 보수는 물론 보다 윤리적이라고 주장하는 진보도 기본적으로는 ‘여러분의 욕망에는 잘못이 없다’라는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인간의 삶의 목적이 더 소유하고 더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성장하고 경험하는 것에 있다라는 생각을 대부분 하지 않는다.
극단적인 가난에 시달릴 때 더 소유하고 더 소비하는 것은 성장하고 경험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목숨 자체가 위험하다면, 자유가 전혀 없다면, 성장이나 경험한다는 것은 목숨을 보존하는 것, 최소한의 자유를 획득하는 것이다.
한국사회는 극빈층의 경제적 곤란에만 초점을 맞출 수 있는 때는 지났다. 오히려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은 한국 대중의 몸통이 되는 사람들, 극빈에서는 벗어난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답하는 문제다. 그 답이 당연히 무한대의 욕망추구라면 우리의 정치경제에 답이 나올 수가 없다. 그런데 현실속에서는 그렇다.
사실 가난뱅이건 부자건 배운 사람이건 못배운 사람이건 오늘날의 한국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최근에 인문학 바람이 부는 것은 그런 고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사회의 조종간을 틀어쥐고 미디어를 장악한 정치 경제분야는 삶의 목적은 결국 더 소비하고 더 소유하는 것에 있다는 극빈국가의 유치한 메세지만 보내고 있다. 여도 그렇고 야도 그렇다. 보수도 그렇고 진보도 그렇다. 적어도 대부분 그렇다. 그리고 분열하고 싸우고 미워하기만 계속한다. 우리의 정치경제에 답이 없는 이유다.
원문 : 나를 지키는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