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를 말해선 안 된다고 가르치는 교육
언젠가부터 나는, 딸아이에게 항상 재미있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곤 했다. 공부를 하는 것도 재미있게 살기 위한 것이니, 그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재미있게 사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우리는 재미로 산다든가, 재미를 위해 산다는 말을 금기시하는 교육을 종종 받는다. 그 이유는 교육체계가 어떤 가치를 계몽적으로 가르치려 들기 때문이다. 적어도 과거에는 그랬고, 때문에 관습상 그런 면이 지금도 남아있다.
또한 교육기관과 어른들은 아이들과 사람들, 그리고 스스로에게 돈을 벌거나,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나라의 발전에 기여하거나, 정의 실현과 진리를 발견하는 것 같은 가치들을 교탁 위에 올려놓고 그것을 위해 살라고 말한다. 이제 그것은 재미로 하는 일이 아니라 숭고한 목적이며 어떤 고통도 감내하고 해내야 하는 일이 된다.
이런 식의 교육에는 적어도 두 가지의 문제가 있다.
먼저 논리적 문제다. 어떤 가치가 절대적이 되는 것은, 사실 우리 스스로 시야의 한계를 정했기 때문이다. 교실, 우리 집, 취직, 한국 등 일정한 테두리를 정하고 그 안에서만 세상을 보니까 어떤 가치가 마치 절대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런 절대적 테두리 따위는 없다. 정확히 말하면 있는지 없는지 모른다. 설사 있다고 해도 그런 것의 그림자라도 볼 수 있는 정도의 사람은 세상에 거의 없을 것이다. 평범한 우리 눈에 보이는 절대적 테두리는 전혀 절대적이지 않다.
게다가 내 눈에 뭔가 보인다고 해서 그게 안 보이는 사람을 윽박지르는 것은 마치 “어차피 너는 커서 어른이 될 거야!”라며 갓난아이에게 어른 옷을 사 주고, 왜 옷에 몸을 못 맞추냐고 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나 모든 것이 상대적이기에, 어떤 가치를 숭고한 것으로 생각하고 진지하게 추구하는 것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쌓여져 있고 안정화되어 있는 것들은 소중하다.
혁명이 일상이 된 시대
문제를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두 번째 문제다. 재미를 빼고 무언가를 절대적인 것으로 가르치는 방식의 두 번째 문제는, 오늘날 정보의 소통과 변화가 너무 빨라서 무언가를 절대적이라고 정의할 수 없다는 점에서 비롯된다.
적어도 전의 시대보다 현재가, 앞서 언급했던 절대적인 테두리의 위협이 더욱 빨리 진행된다. 그래서 그것을 과도하게 지키기 위해, 테두리 바깥으로 나가는 것을 통제하면 변화를 따라갈 수 없다. 자기를 지키려다 온 세상은 악이라고 외치는 광신도가 된다. 다 지키려다 다 잃어버린다.
인간의 생각처럼 인간 자체는 유한한 존재다. 그렇기에 무한의 경지에서 옳고 그름을 따질 수 없다고 해서, 유한한 시점에서 보는 모든 것들이 무의미하지는 않다. 우리는 지구가 진공 속을 날고 있다는 것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배제하고, 지구는 단단하고 평평하게 우리 발밑에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도 큰 문제가 없다. 지구뿐만 아니라 종교, 가족, 국가 등 어떤 것이든 적당히 절대적인 것으로 인지하고, 재미가 아닌 의무, 숭고한 가치로 간주하고 추구하는 것이 무조건 나쁘지는 않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힘든 시대, 위험한 시대인 것도 사실이다. 아이들과 스스로에게 어디 즈음 선을 그어놓고 이건 원래 이런 것이다, 원래 옳다는 식으로 가르치고 수긍하게 되면 그 진리가 깨지고 흔들릴 때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겪는다.
그 좋은 예중의 하나가 반공 알레르기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최고 교역 상대가 중국이며, 중국은 공산국가다. 지금 시대에 ‘공산당은 싫어요가 원래 옳다’라는 식으로 자기를 가둔 사람들은, 세상을 사는 원칙에 대한 내부적 모순들로 가득 차 말도 안 되는 극단으로 움직이기 쉽다. 그들은 흔히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아주 나쁜 놈이라고 말한다. 종북이라는 말 같은 것을 남발한다. 어딘가에 갇혀버리고, 그래서 비정상이 된다.
재미를 위해 살라는 말을 금기시하는 이유는, 발밑을 허물고 안락한 집을 떠나 새로운 곳으로 향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모두, 혹은 대부분이 정리되어 있었던 테두리 안을 떠나는 일은 마치 문명을 뒤로하고 밀림에 가서 혼자 불 피우는 법부터 재발견해 보겠다는 말처럼 허황되게 들린다. 그리고 그것은 종종 실제로 허황되다.
문제는 지금까지 우리 발밑에 있던 기반과 안락해 보이는 집이 계속해서 무너지는 시대라는 점이다. 그래서 안전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사람이 더 위험할 수도 있는 시대가 되었다. 나는 혁명이 일상이 된 시대라고 표현한 적도 있었던 듯하다.
할아버지는 고사하고 아버지, 어머니의 사는 방식도 복사해서 살 수 없는 시대다. 그래도 남아보겠다고 무너지는 집을 수리만 하다간, 탈출구가 없어진 집에 몸이 끼어 옴짝달싹 못 하게 될 수도 있다.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는 집 밖이지만, 우리는 길을 떠날 수밖에 없는 시대인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길을 떠나긴 떠나야 하는데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어디로 가서 뭘 해야 할 것인가? 그 답은 결국 재미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무언가가 재미있다는 건 논리적 설명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이러저러한 것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숭고한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라는 건, 이미 집이 다 지어졌다는 말이다. 무언가가 재미있다는 건 말 이전에 단지 느끼는 거다. ‘이거 좋은데!’하고 말이다.
내가 느끼는 ‘이거 좋은데!’라는 느낌을 무시한다면, 집을 떠나서 어디로 갈 것인가? 집이 무조건 좋다고 하는 사람들 말을 들어봐야, 경쟁률은 무한대로 높아지고 빚은 왕창 늘어나고 건강은 무너지고 배우는 것도 없고, 가정이 무너지고 아이들은 엉망이 되는 일이 벌어지니, 정든 정신의 집을 떠나야 하는데 그러면 뭐에 의지할 것인가. 재미밖에 없다. 나밖에 없다.
물론 재미라는 단어는 매력적이지만 공포스럽기도 하다. 앞서 말한 대로 허공에 몸을 던지는 행위처럼 보이기도 하고 실제로 그런 면도 있다. 그 어두운 면을 줄이려면 자기와 대화를 하는데 성실해야 하며, 다음 번에 쉴 수 있는 장소까지 갈 수 있는 체력을 길러야 한다. 최고의 준비를 해도 모험은 실패로 끝날 수 있기에 모험이다. 그러나 준비가 없으면 모험은 자살이 된다. 도피를 재미와 같은 거라 생각해서도 안 된다. 영어가 싫어서 이과를 택하고 수학이 싫어서 문과를 택하는 것은 재미를 위해 사는 게 아니다.
요즘 사람들이 인문학을 찾는 것은 기존의 것을 초극할 필요가 생기기 때문이다. 회사밖에 모르는 사람이 퇴직하면 돈도 돈이지만 정신적 충격에 대한 치료가 필요하다. 가정밖에 모르던 사람이 가정을 잃으면 어떻겠는가? 넓은 시야를 가져야 길을 떠날 수 있기에 사람들은 인문학을 찾는다. 물론 모든 사람이 거기서 제대로 된 답을 찾는 것은 아닌 듯하다. 어떤 사람들은 오히려 더 낡은 집을 찾기도 한다. 우선 자기 자신부터 찾아야 하는데 더 심한 정신적 노예가 되려고 발버둥 친다.
어쩌면 우리네 삶이란 한판의 놀이일지 모른다. 아이들은 원래 부잣집 아이도 있고 가난뱅이 아이도 있고 높은 지위를 가진 집안의 아이도 있으며 범죄자의 아이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길에 나와서 하루 재미있게 놀았으면 됐지, 원래 뭐였는지를 따져 뭣하겠는가.
한 세상 재미있게 살 수 있으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고, 그렇게 하는 데 실패했으면 별로 성공하지 못한 것이다. 뭐가 재미있게 사는 것인가는 주관적 해석의 여지가 있지만, 재미 따위란 철없는 생각이라 치부하는 태도는 시대에 맞지 않다. 오히려 재미라는 단어를 꼭 붙잡고 그걸 원칙으로 살아가야 하는 시대가 아닌가 한다. 재미없는 날에도 재미있게 살자고 외치면서 살아야 하는 시대인 것이다.
원문 : 나를 지키는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