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축고도성장의 폐해
한국은 빠르게 성장한 것을 자랑해 왔다. 심지어 한국의 대표그룹인 삼성조차 세계최초의 물건을 만들기보다는 빨리 남이 하는 것을 쫒아가는 것을 잘한다고 자랑할 정도다. 빨리 빨리 저 고지로 가자, 우리는 할 수 있다는 식이다.
그런데 그게 공짜가 아니다. 남이 이미 오른 고지에 오르는 것에 집중하다보니까 체질적으로 창조력이나 상상력이 점점 고갈되며, 싹이 잘려져 나간다. 결국 부실하게 지은 빌딩같은 발전이 된다. 높아질수록 오히려 밑둥이 점점 흔들리는 것이다.
새로운 아이디어란 본래 말이 안되는 아이디어다. 다들 마차를 타고 다니는데 말없이 달리는 자동차를 만들어 보겠다고 하는 식이다. 세상이 자동차의 세상이 되고난 후에는 마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이 후진적이고 어리석어 보이지만 최초로 그렇게 해보겠다고 하는 시절에는 자동차를 쓰자고 하는 사람이 오히려 어리석기 짝이 없어 보인다. 최초의 자동차는 비싸고 효율이 안 좋고 고장도 잘나고 냄새도 났을 것이고 시끄러웠을 것이다. 그나마 최초의 자동차가 만들어진 상태에서 그 정도고 아이디어 단계에서는 더 말도 안되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 에너지를 쓰는 것은 바보짓처럼 보였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앞에서 말한대로 한 나라가 남을 따라하는 일을 수 십년간 해왔다는 사실과, 새로운 아이디어란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관념이 합쳐지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이다. 남을 따라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이미 우리가 가야할 길이 정해져 있다는 뜻이다. 즉, 상식적이고 올바른 답은 이미 나와 있다. 그것을 굳게 믿으면 믿을 수록 그것과 다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더욱 더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는 것처럼 들리게 된다.
그러므로 ‘남따라하기’라는 관습은 창의력있는 사람을 도태시키는 관습이기도 한 것이다. 온 국민이 중요한 것은 달리기라고 믿으면, 달리기는 못하지만 수학은 잘 푸는 사람은 시시한 인간으로 판명된다. 그런 나라에서, 왜 우리나라에는 달리기에서 수학으로 관점을 전환하는 위대한 인물은 안나올까라고 질문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그런 사람은 진작에 비판 받고 수학 따위 할 시간과 기회를 박탈당했을테니까. 결국 한 사회에서 창의력은 자율의 정도에 따라 자라난다. 다들 미친 생각일 망정 해보고 싶은 것을 해보고 살 수 있는 사회여야 창의적 생각이 현실이 된다.
현 정부는 매우 반자율적인 사람들이 지지하는 정부다. 개인을 감찰하고 영화와 책에다가 좋은 책 나쁜 책 딱지를 붙이기 좋아한다. 그들은 자기에게 반대하면 종종 종북이라는 딱지 붙이기도 좋아한다. 한 마디로 세상을 보는 폭이 매우 좁다. 가장 창의적이지 않은 그들이 창조경제라는 이름을 들고 나온 것은 딱한 일이다. 창의력을 죽이고 있는 것은 누구보다 그런 사람들이다.
모든 규칙을 거부하는 것이 창의성은 아니다
그러나 자율을 강조하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자유는 사회적·사상적 성취의 하나다. 하나의 사회는 자유라는 이름만으로 운영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차선을 따라 운전하는 것은 답답하니까 교통신호따위 없는 나라를 만들어 보자고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럼 모두가 자유롭게 운전하는 나라가 되는 게 아니라, 도로가 막혀서 아무도 움직일 수 없는 나라가 될 것이다. 진짜 자유란 없다. 대안적 시스템이 있을 뿐이다. 가장 자유를 강조하는 미국만큼 법이 복잡하고 소송이 많은 나라도 없다.
그래서 우리는 원칙을 세우고 법칙을 만들어야 한다. 그 법칙은 우리 사회를 지탱할 수 있는 것이면서도 충분한 자율을 가지고 있어서 사람들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 원칙이나 법칙은 근본에 이르면 철학이고 역사다. 국가적 정체성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정의다. 우리는 그런 것을 분명히 해서 그것에 합의하고 산다. 기독교도 불교도 성리학같은 유교도, 그런 일을 했던 것들 중의 하나다.
왕국에서는 국왕에 충성한다라는 것이 법칙이다. 사람들은 그 법칙을 어기지 않는 한도 내에서의 자유를 가진다. 종교적 국가에서는 그 종교적 교리를 지킨다는 것이 법칙이다. 사람들은 역시 그 법칙을 어기지 않는 한도내에서 자유를 가진다. 뒤집어 말하면 그만큼 창의성은 억압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하나의 사회가 단순히 원칙이나 법칙을 세우면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것, 하나의 사회가 원칙이나 법칙만으로 이뤄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해다. 사회는 기본적으로 인간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인간이 다르면 같은 법칙도 통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기차표를 사는 것을 당연히 여기면 기차표를 검표하느라 인건비를 들이고 기계를 설치하고 할 일도 없을 것이다.
9·11테러가 생긴후 비행기의 안전검사가 매우 엄격해 졌다. 이제는 물도 맘대로 가지고 탈수가 없다. 압도적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테러를 하지 않는 사람들이지만 테러를 할 수도 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억압되어야 한다. 인간은 법칙에 의해서 키워지고 만들어진다. 반대로 법칙도 인간에 의해서 키워지고 만들어진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이지는 않다.
창의성의 문제는 삶의 철학의 문제다
결국 철학적 깊이가 깊을수록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잘 배울수록 우리는 더 많은 자유를 누리게 된다.
한국에서의 사회적 분란은 그 근원에 가면 대개 한국인이란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 두가지에 의해 지배된다. 한국인이란 자유를 허락하기엔 너무 어리석은 사람들이므로 억압하고 때리고 처벌해야 나라가 제대로 돌아간다고 믿는가? 아니면 한국인은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가? 삶의 근원적 목표와 의미는 무엇인가?
삶이란 고깃국에 쌀밥먹는 것이 목표인가, 아니면 옥수수죽을 먹어도 인간다워야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의미가 있다고 믿는가.
삶이란 고깃국에 쌀밥먹으면 최고로 성취한 것이고, 조선의 종자는 구제불능이니 맞아야 정신차린다라는 믿음이 바뀌지 않는한 한국은 바뀌지 않는다. 그런 나라에 창의력이란 사치일 것이다.
삶을 그것이상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문화운동이 필요하고, 독서와 글쓰기가 필요하다. 물론 스스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데 그것으로 바뀔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책 한권 제대로 안읽고 사색도 안하면서 점집이나 사이비 종교지도자를 쫒아다니는 사람은 한국에 얼마나 많은가. 그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이 뭔가를 확실히 알고 있는 것, 원래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많다는 것이다. 스스로를 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개취급을 해주면 이게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이라고 좋아할 수 있다. 요즘은 뭐가 가치있는 삶인가라는 질문만큼 외면당하는 질문도 없다. 그 답이 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너무 돈에 물들어 창의력도 돈을 벌게 해주니까 좋은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바로 그런 생각이 창의력을 죽인다. 가장 저열하고 단순한 철학으로 인간과 삶을 보는데 그런 삶에서 무슨 창의력이 나올 것인가. 평상시에는 계속 창의력을 억압하고 파괴하면서 창의력이 어디에 있는거지, 찾는 꼴이다.
원문: 나를 지키는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