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의 천도편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제나라 환공이 성인의 말씀이 쓰여진 책을 읽고 있었는데 마루아래서 수레바퀴를 깍고 있던 윤편이 그 성인이 이미 죽고 없다는 말을 듣는다. 그러자 그 윤편이 말한다.
그렇다면 공께서 읽고 있는 것은 옛사람의 찌거기군요.
환공이 화가 나서 왜 그런가 물었더니 윤편이 이렇게 대답한다. 자기도 바퀴를 깎고 있는데, 그 비결을 아들에게 가르칠 수가 없어서 여전히 이 늙은 나이에도 바퀴를 깎고 있다는 것이다. 성인도 분명히 자기가 체득한 것을 책에다 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성인의 책이란 옛사람의 찌거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최근에 나는 생태 도시 만들기라던가 자동차 없는 도시를 만들자는 주장을 하는 책을 하나 읽었다. 그 책은 저자의 존경할 만한 노력덕분에 유용한 사례들에 대한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여러 번 내가 목격했던 오류가 그 책에서도 반복된다는 답답함이 있었다. 그것은 객관화의 환상이라는 오류다. 그 오류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개혁적 제도개혁이란 어떤 것이든 완전히 그 핵심이 빠지게 된다.
객관화의 환상이란, 모든 사건들은 어떤 객관적인 존재가 원인이 되어 일어나며 특히 우리가 그 원인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것이다. 객관화의 환상을 지적하는 것을 무슨 신비주의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단지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것이 있으며, 우리는 우리가 뭘 모르는지 모른다는 것에 대한 것이다. 적어도 물리학이 아니라 사회적 현상에 있어서 객관적 이론의 힘, 혹은 제도나 정책의 힘을 과신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객관화의 환상은 무엇이든지 정답으로 만든다
객관화의 환상의 좋은 예는 연애에 대한 여러 조언들이다. 우리는 여러 연애를 경험하고 목격한다. 그리고 그 성공과 실패에 대한 이론들을 만든다. 옷을 이렇게 입으라던가 이렇게 대화를 하라던가 이렇게 데이트 신청을 하라던가 하는 식이다.
그러나 아주 순진하고 경험없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런 조언들은 거의 의미가 없거나 적어도 아주 제한적인 효과만 있다는 것을 안다. 남자들이 야한거 좋아한다고 야한 옷 입고 다니면 당신이 좋아하는 남자의 사랑을 받게 되는게 아니다. 효과는 반대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롱스커트나 바지만 입으면 성공한다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인기가 있든 없든 실은 진짜 그 이유를 잘 모른다. 인기 좋은 사람이 하는 짓을 그대로 따라해 봐도 결과는 대개 전혀 다르다. 사람이 다르니까. 단지 객관화의 환상 때문에 우리가 뭔가를 안다고 착각할 뿐이다. 모르니까 그걸 감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연애는 인간과 인간이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객관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연애에 대한 이론들은 거의 대부분이 객관적인 껍데기만 본다. 우리가 아는 것만을 보게 만든다. 그러면서 우리가 모른다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핵심이 없고 그럴 듯하게만 들릴 뿐이다.
사회문제마저도 객관화하고자 하는 욕망
개인적인 연애에 있어서는 비교적 자각하기 쉬운 이 ‘객관적 이론의 환상’은 사회적인 수준에 이르면 깨닫기가 무척이나 어려운 엄청난 것이 된다. 특히나 당신이 직업적으로 어떤 이론을 만드는 것을 하는 전문가라면 더더욱 그렇다.
당신이 시청에서 정책을 논하는 위치에 있거나 연구자로서 학자로서 혹은 기자로서 사회적 정책에 대한 글들을 생산하는 위치에 있다고 해보자. 당신은 이렇게 질문한다. 도심에 있는 공원과 도시인구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 지하철과 도시민의 연평균 소득은 어떤 관계가 있는가. 객관적인 어떤 것으로 인과관계를 찾아내는 것이 학자가, 기자가 하는 일이다.
당신은 어쩌면 도시 녹화사업이 어떻게 도시민의 주관적 행복감을 만드는 가를 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신은 대개는 그 인과관계를 뒤집어 도시민의 주관적 행복감이 어떻게 도시를 녹화하게 되는가를 묻지 않는다. 이유는 우리가 객관적인 것만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으며 특히 조정가능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하철을 만들거나 공원을 만들거나 도로를 만들수 있다. 그렇게 해서 도시민을 행복하게 만들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먼저 도시민의 행복을 고려하고, 도시민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도로를 만든다는 식으로는 생각하지 않는다. 즉 객관에서 객관으로 가거나 객관에서 주관으로 가는 인과관계는 생각하지만 주관에서 주관, 주관에서 객관으로 가는 인과관계는 생각하기 어렵다.
그것은 당신이 개인으로서 홀로 생각할때도 어느정도 그렇지만 당신이 사회적 활동을 할때는 훨씬 더 그렇다. 학자는 논문을 써야 이름을 날린다. 학자는 객관적인 요소에 대한 것을 써야 출판이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사람은 문학을 하고 있다고 생각되고 학계에서 퇴출될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학계에서 서로 토론을 한다. 그런 사람들이 시청에서 청와대에서 모여서 정책에 대해 토론을 한다. 그런 사람들이 신문기사를 쓰고 방송대본을 쓴다. 서로 칭찬하고 권위를 만든다. 객관적인 증거를 내밀지 못하는 사람은 비웃음을 당할 것이다. 우리는 천천히 객관화의 환상에 중독된다. 점점 깨어지기 어려운 철벽이 되고 만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전문가는 오히려 더 객관화의 중독이 심하다.
우리가 도시를 볼 때도 우리가 보는 관점은 종종 인기게임인 심시티를 하는 것과 같다. 도로를 이렇게 놓고 대학도 이렇게 만들고 심지어 종교시설도 이렇게 만들면 도시민은 번영하거나 행복해 진다. 이런 저런 제도를 도입하면 굶는 사람이 없어지고 자동차를 타지 않게 된다. 대기오염이 없어지고 부유해진다.
사회적인 경우에 객관적 이론의 환상이 훨씬 더 강력해 지는 또 다른 이유는 사회적인 문제가 개인적인 문제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연애를 시작하고 결과가 나오는 것은 그렇게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한 가지 조언이 어느 정도 통하는가가 금방 판명난다. 그에 비해 도로를 만든다거나 거리를 개조하는 것은 시간이 엄청 걸리며 그 사이에 복잡한 일들이 많이 생긴다.
그래서 그 결과가 좋거나 나쁘거나 우리는 수없이 많은 변명을 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환상은 깨지지 않는 것이다. 깨질 필요가 없으며 어떤 사람에게는 깨져서는 안된다. 그게 그들의 직업이니까.
핵심은 주관이다
그러나 정책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연애의 경우와 같이 그 핵심이 없이는 잔소리에 가깝다. 핵심은 인간이고 공동체다. 우리의 무지고 주관적인 부분이다. 똑같은 제도도 어떤 사람들에게는 고통일 수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축복일 수 있다. 심지어 같은 사람의 마음도 달라질 수 있다.
작은 마을 수준에서 현장경험이 있는 사람이 나라를 구하자던가 지구를 구하자는 주제를 가진 모임에 가면 그곳에 있는 말들이 반박하기는 어렵지만 매우 공허하다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다. 현장에서는 고스톱치기 좋아하는 할머니, 술만 마시면 주사가 심한 할아버지 같은 사람을 설득하여 같이 일해가는 것이 문제인데 거대한 말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마을 만들기 운동의 지도자가 자신의 성공담을 책으로 소개하는 일은 필요하지만, 객관화의 환상때문이 아니라면 그 사람은 스스로의 책이 껍데기 밖에 없다고 느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소설이란 어떻게 쓰는가에 대한 글과도 같다. 그런 글을 제 아무리 잘써도 진짜 소설가는 그것만으로 소설이 써질 수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글로 쓸 수 있는 것도 중요한 것이지만 진짜는 쓸 수가 없다.
이 이야기가 연애 이야기와 아주 비슷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똑같은 정책이라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되고 안 되고가 완전히 달라지는데 인간은 안보고 객관적 이론만 주물럭 주물럭 대는데 몰입하여 자원을 쓰는 일은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자동차가 없는 게 좋다고? 어떤 사람은 자동차타는게 소원이거나 삶 그 자체다. 남의 욕망에 대해 간단히 판결내려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자동차의 해악을 말하는게 잘못이라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봐야 하는 것, 해야 하는 것은 자동차가 아니라 인간을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눈돌린 인간이라던가 공동체라는 사회정책의 핵심에 대해 우리는 뭘 해야 할까. 우선 정책적 판단이 전혀 의미가 없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동네사람들이 공유하는 텃밭만들기 같은 것은 좋은 일이다. 다만 우리는 정책의 한계를 아주 크게 느끼고 오만을 버려야 한다.
정책이 옳으면 결과가 옳게 나올거라는 생각은 오만이다. 결과가 좋은 걸 보면 내 정책이 옳았다고 말하는 것도 오만이다. 정책을 결정하는 사람들은 특히 정책이 세상을 결정한다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들은 세상의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성공한 시민운동가의 책도 껍데기라면 아무리 좋은 책도 껍데기에 불과하다.
그리고 나면 남는 것은 각자 생각하고 질문하는 것이다. 대단한 걸 말할 것처럼 하다가 기껏해야 각자 생각하고 질문하라는 것이라니 이게 뭐냐고 할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게 대단한 것은 아닐지 몰라도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은 아니다.
각자 생각하고 질문한다는 것은 첫째로 계속 배운다는 것이다. 뭘 배웠는가 이상으로 계속해서 배우는 그 과정이 삶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뭘 생각하고 뭘 질문할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나는 지금 뭘 해야 할 것인지를 생각 해야 할 것이다. 스스로에게 배워야 하지만 혼자서만 생각하면 답이 안나오니까 남의 것을 배우기도 해야 할 것이다. 세상에는 좋은 말이 엄청나게 많이 있다. 그냥 사는게 아니라 의미있게 살아가는 것,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에 대해 고민하고 배우려고 들면 가르침은 많이 있다.
뭘 배우는가는 각자의 상황에 달려 있다. 그러나 인류가 쌓아온 지혜인 고전을 배우든 깊이가 있는 종교적 가르침을 배우든 그 끝에는 모두 공동체가 나온다. 공자나 부처나 예수나 소크라테스는 뭘 위해서 그렇게 말을 했다고 생각하는가. 고금의 수많은 문필가는 뭘 위해서 그렇게 책을 썼는가. 고금의 지혜가 향하는 것은 결국 우리 같이 잘 살자다. 혼자만 살 수 있고 살아야 한다면 무슨 지혜며 윤리가 필요할 것인가.
사람들이 책을 읽고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사는 마을이 있는데 그 마을에 자동차가 너무 많아서 문제가 된다고 하자. 그러면 사람들이 알아서 해결책을 찾을 것이고 그것이 정책처럼 보일 것이다.
반면에 사람들이 짐승처럼 그저 먹고 사는 것에만 관심이 있고 서로 밀쳐대면서 사는 도시에 어떤 좋은 정책을 제시한다고 해도 우선 실천이 안될 것이고 실천해도 효과가 없을 것이며 마지막으로 설사 어떤 거대한 힘때문에 실천하고 효과를 봤다고 해도 사람들은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애써 아귀다툼하던 과거로 돌아가려고 투쟁할 것이다.
우리는 여러 이유로 생각하고 질문하면서 살지 못한다. 한 가지 이유는 가난때문이다. 너무 삶이 절박하니까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우리가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도와야 하는 이유는 마치 우리 팔에 피가 안돌아서 팔이 망가지고 있다면 피를 공급해야 하는 것과 같다. 절박한 사람들은 생각을 할 시간이 없고, 그래서 더 반공동체적으로 움직이고, 그러면 전체 공동체가 약화되기 때문이다.
‘우리’에 대해 질문하고 배워야 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너무나 부푼 욕망일 것이다. 미디어를 장악하고 소비시장을 장악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은 아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생각이 없으면 미디어나 시장도 그것을 반영한다. 그래서 세상에 반공동체적인 메세지만 울려퍼진다. 이것은 공동체에 대해 치명적인 문제를 만든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들은 뭘 보고 배우겠는가?
부푼 욕망은 우리를 바쁘게 만든다. 가져도 더 가져야 하니까, 더 못 가지면 죽을 것 같으니까 그렇다. 그래서 더 가지는 게 삶의 의미가 되면 더 못 가지는 것에 대한 공포에 빠진다. 욕망과 공포에 중독된 마음에 생각 같은 것을 할 여유가 있을 리가 없다.
한국에는 배우는 분위기가 얼마나 있는가. 한국인은 책을 읽지 않는다는 비판이 있다. 글쓰기는 얼마나 할까 같은 질문은 아예 던질 값어치조차 없다. 도서관은 대개 입시 공부하는 곳으로 생각된다. 초중고는 물론 대학조차 지혜라기보다는 취업용 지식을 익히는 곳으로 생각된다. 지도자를 키우는 게 아니라 좁쌀을 키운다.
가진 사람이건 가지지 않은 사람이건 대개는 여유가 없다. 느리게 살 수가 없고 가볍게 살수가 없다. 죽도록 바쁘게 사는데도 일상의 모든 것은 쇠사슬처럼 우리를 묶는다.
내가 말하는 인간이니 공동체니 하는 말에서 중요한 부분은 우리의 무지다. 우리는 배우기 때문에 우리가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된다. 모르니까 서로 돕고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배우지 않는 사람은 오히려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배우기 싫은 게 아니라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정책과 제도는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초등학생에게 양자역학을 강의하면 쓸모가 없듯이, 우리 스스로를 보지 않으면 복잡한 말들과 분석도 무의미하다. 그러나 세상에는 핵심이 정책과 제도라는 생각이 가득하고 객관화의 환상이 가득하다. 찌꺼기를 잔뜩 모으면 거기서 황금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면서 정작 우리 안의 황금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는다. 객관화의 환상을 강화하면서 말이다.
세상은 우리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생각들로 가득하다. 그런 생각들이 실은 공동체를 파괴하고 세상을 살기 힘들게 만든다. 좋은 글이나 말은 우리에게 답을 주지 않는다. 우리의 무지를 일깨우고 우리에게 질문을 준다. 질문이 있고 무지를 자각하니까 생각을 하고 공부를 하게 한다. 반면에 답을 주는 말이나 글은 더이상 배울 것도 생각할 것도 없다고 느끼게 한다.
객관화의 환상과 제도나 정책의 힘에 대한 오만은 바로 우리 자신을 약화시킨다. 공부라고 했지만 책이 껍데기라는 것을 잊어버린 공부도 우리를 약화시킨다. 이런 공부만 세상에 계속 가득하면 영원히 방황과 싸움만 가득한 나날이 계속 될 것이다.
원문 : 나를 지키는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