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대개 정보나 지식이라는 말들이 뭘 의미하는 것인지 알고 있다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실은 그렇지가 않다. 우리가 뭔가를 안다든가, 어떤 것이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말의 의미는 적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이야기다.
정보 이론의 관점에서 본 앎과 무지의 문제
정보 이론에서 가장 기본적인 양은 엔트로피라고 하는 양이며, 이것은 말하자면 우리의 무지의 양을 측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뭔가를 안다던가 모른다던가 할때, 먼저 우리의 무지의 정도를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보자. 6면의 주사위를 던졌을 때 우리가 뭐가 나올지 모른다면 우리는 6가지 가능한 미래중의 하나를 가진다. 반면에 12면체 주사위를 던진다면 우리는 12개의 가능한 미래중의 하나를 가질 것이다. 그래서 무작위로 하나를 선택할 때 미래를 제대로 예측할 가능성은 더 줄어든다. 즉 무지의 정도가 더 큰 것이다.
또다른 예를 들어보자. 어떤 건물에 백명의 사람이 있고 한 살인사건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그 범인이 그 건물안에 있다는 것이라고 하자. 우리는 우리의 무지의 양을 100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건물에 1명이나 5명이 있을 때보다 우리의 무지의 양이 더 크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어떤 정보가 입수된다. 살인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그는 남자라는 정보다. 이 정보의 가치는 얼마나 큰 것일까? 즉 이 정보의 양은 어떻게 측정할 수 있을까?
언뜻 생각하면 이 정보는 매우 중요할 것 같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만약 그 건물에 있는 사람이 모두 남자였다면 용의자의 숫자는 전혀 줄어들지 않는다. 즉, 우리의 무지의 양은 줄지 않는다. 살인자는 지구인이다같은 말처럼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데 남자가 1명밖에 없다면 이 정보는 범인을 잡는데 결정적인 정보다. 남자와 여자의 숫자가 반반이라면 이 정보는 용의자의 수를 절반으로 줄여준다.
이제까지의 예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정보라고 하는 것, 그리고 우리가 뭔가를 안다던가 모른다고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논의 되기 보다는 주어진 상황 혹은 무지의 크기에 대해 상대적으로 이야기 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
정보나 지식은 우리가 그것을 논의하는 혹은 우리가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상황이 이러저러하다고 믿는 세계 혹은 시스템의 틀이 전제되어야 이야기가 될 수가 있다. 그러한 틀이나 세계에 대한 이해에 오해가 있거나 혼돈이 있으면 우리가 뭔가를 안다던가 뭔가가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완전한 착각일 수가 있다.
다이아몬드는 그것을 거래하는 시장이 존재하고 그 아름다움이나 유용성이 가치있는 상황에서만 가치있는 것이다. 당장 굶어죽을 것같은데 물도 밥도 없으면 다이아몬드의 가치는 거의 의미가 없다. 마찬가지로 어떤 것을 안다던가 어떤 것을 의미있는 것, 정보를 주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도 절대적으로 누구에게나 똑같은 것은 아니다.
어쩌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내일을 생각하지 않고 남의 일을 생각하지 않으며 살아갈수 있다면, 정보가 뭔지, 안다는게 뭔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아도 될지 모른다. 우리는 그저 상식적으로 우리에게 유용한 것들에 대해 배우고 그런 지식을 쓰면서 살면 된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지식이나 정보라는 말의 의미는 그런 과거의 역사에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과거에도 그랬지만 오늘날에는 더더욱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없다. 우리는 미래를 예측해야 하고, 우리 주변뿐만 아니라 지구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 뭘하는가도 관심을 둬야 한다. 우리는 작은 우물안에서 안락하게 살수 없다. 우리는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훨씬 더 큰 세계에서 살아야 한다. 세계가 이미 그런 단위와 속력으로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다. 억지로 그런 세계에 관심을 끊는 것은 자기를 지킬 수 없게 만든다. 어리석은 농부가 사기꾼에게 사기를 당하는 상황, 어리석은 국민이 외국인들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상황과 비슷한 일들이 생길 것이다.
잘 알기 위한 노력 때문에 오히려 무지의 양이 커질 때
더 많이 더 정확히 알려고 하니까 지식이나 정보라는 말의 뒤에 있는 시스템이 큰 문제가 된다. 더 잘하기 위한 노력이 우리를 더 어리석게 만들수도 있다. 우리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같은 것이 사람들을 이상하게 행동하게 만드는 것을 본적이 있다. 문제는 사람들은 자기자신은 이데올로기에 빠져서 기괴하게 행동하고 있지 않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그냥 이러저러한 것은 당연하고 정상이라고 말한다.
철학자 칼 포퍼는 그의 책 끝없는 탐구에서 본질주의의 공식화라는 것을 논하면서 논리적 내용과 정보적 내용을 구분해서 말한다. 논리적 내용이라는 것은 우리가 어떤 이론이나 설명을 들었을 때 그 이론이나 설명으로부터 논리적으로 전개해져 나올 수 있는 말들이다.
그 반면에 정보적 내용이라는 것은 위의 정보이론에서 말하는 정보와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주어진 이론이나 설명으로 제거해 낼 수 있는 말들을 의미한다. 즉, 틀린 것으로 말할 수 있는 말들을 의미한다.
포퍼는 논리실증주의를 비판하고 말을 엄밀하게 하려고 하는 노력에 필요이상으로 빠져드는 것을 비판한다. 사람들은 논리적 내용에 관심을 두지만 실은 정보적 내용에 관심을 둬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뉴스를 보는 상황을 예를 들어 보자. 당신이 오늘의 날씨가 궁금해서 뉴스방송을 틀었다. 어느 뉴스프로그램이 한국과 세계의 여러가지 소식을 한시간 내내 설명해 준다. 이 방송의 논리적 내용은 크다. 하지만 정보적 내용은 없다. 왜냐면 당신이 관심있어 하는 당신의 무지는 오늘의 날씨인데 그것에 대해서는 말해주는 것이 없고 다른 이야기만 길게 늘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질문이 무엇인가, 우리가 살아가는 물질과 정신의 세상에서 정보와 의미를 가진 메세지는 무엇인가하는 것이다. 그것을 잊으면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줄일 수도 있다. 언뜻 듣기에는 엄밀성을 추구하면서 정교한 시스템을 계속 구축해 나가면 우리에게 유용한 답이 나올 것같고 그래야만 할 것같지만, 엄밀성의 함정에 한번 빠지면 ‘당신의 질문’으로 돌아오게 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 당신은 누구나 추천하는 고전을 읽으면서도 바보가 될 수도 있다.
인문계학생들은 종종 이공계학생들에게서 비슷한 문제를 발견한다. 반대로 비인문학전공자들은 인문학자들에게서 비슷한 문제를 발견한다. 수학이나 물리학이 대표하는 과학분야에서 훈련을 받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세부사항에 끝없이 조심해야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백페이지의 계산도 중간에 단 한 줄이 틀리면 완전히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공계학생들 특히 수학이나 물리학 전공의 학생들의 말을 인문계 학생이 들으면 엄청나게 자세하게 나가려고만 할뿐이어서 도무지 저런 식으로 생각해서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책이나 시험바깥 세상의 문제 즉 상점에서 물건을 깍는다던가 좋아하는 아가씨에게 데이트신청을 하는데 있어서 무능하다.
인문학자의 말에서 비전공자들은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 우리 아이가 요즘 영 의욕이 없다라고 말하면 학자들은 엄청난 분량의 말을 쏟아낼지 모른다. 그리고 그 말들은 모두 사실일 수 있다. 말하자면 엄청난 양의 논리적 내용이다. 그런데 종종 길고 긴 철학이나 길고 긴 학문적 내용이, 별로 정보적인 내용이 있는 것 같지 않을 때가 있다. 즉, 눈앞에 있는 단 하나의 상황을 해결하는 것 혹은 일반론이 아니라 당신의 질문에 답하는 것에는 도움이 안된다는 의미이다. 마치 날씨 이야기가 없는 긴 뉴스처럼.
더 나쁜 것은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세계에 대한 혼돈이 생기곤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당장 굶어 죽을 것 같은 남자가, 너무 많이 먹어서 비만에 빠진 사람의 건강문제 이야기를 듣다가 자신의 문제가 어떻게 체중을 감량해야 하는가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같은 문제다. 소수의 부자들이 자신들에게 부과하는 세금을 가리켜 폭탄이라고 부르면 그 세금을 안내고 오히려 그 세금때문에 복지혜택을 받을 사람들이 세금폭탄에 반대한다고 흥분하는 식이다. 우리는 자신을 잊어버린다. 알았던 적도 없는 것같다.
진정한 정보와 지식의 의미
이제 다시 원래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정보라던가 지식이라던가 하는 말의 의미를 우리는 아는가? 그것을 안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무지와 우리의 질문을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많은 경우, 우리의 무지의 크기와 우리의 질문이 무엇인지를 자명한 것으로 여긴다. 예를 들어 6면체 주사위를 던졌을 때 무엇이 나올 것인가 같은 질문에서 이런 것은 자명하다. 우리는 이 주사위가 정상적이지 않다던가 주사위를 던지는 방법이 특이하다는 것을 고려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런 것을 고려한다고 해도 이번에는 왜 우리는 이 주사위의 미래를 질문하고 있는가를 고민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그냥 자명한 것이다.
주사위 문제의 경우에는 어쩌면 그것이 자명할지 모른다. 문제는 당신의 삶의 경우, 우리의 삶의 경우다. 당신은 정말 당신의 무지의 크기를 아는가? 당신은 정말 제대로 당신의 질문을 기억하면서 뭔가가 정보적이라던가 지식이라던가 하고 있는가? 당신은 두부를 사러 나와서는 노름판에 주저 앉는 남자처럼 남의 질문에 몰두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는 너무나 자주 그것은 당연하다라는 말을 한다. 우리는 왜 하필 주사위 문제를 풀고 있을까, 묻지는 않는다. 창의력있는 인재가 국가경제에 도움이 되니까 창의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게임을 한다던가 책을 읽는다던가 하고 이러저러한 것이 취업에 도움이 되니까라고 하면서 그 공부를 하면서도 당신이 참여하고 있는 게임의 정체에 대해서는 잘 고민하지 않는다. 죽자고 노력하는 것 같은데 문제는 풀리기보다는 점점 늘어만 간다.
포퍼는 임시방편적으로 문제에 접근하라고 제안한다. 나는 그 말을 우리 앞에 놓여진 우리의 문제와 질문에 집중하라는 말로 이해한다.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차원에서 바닥을 파고들어가 기초를 놓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스스로가 올바른 질문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끝없이 다시 물어야 한다. 답보다 질문이 중요하다.
토마스 쿤은 과학이론의 패러다임적 사회적 영향을 말한다. 우리의 질문은 나의 질문이기만 할수 없다. 그 질문이 어느 정도 이상의 복잡성을 가지면 우리는 사회적 프로젝트의 일원으로 어떤 게임에 참가 하게 된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뭘 할까 하는 것이 내가 뭘 해야 하고 무엇에 대해 생각해야 할까에 큰 영향을 미친다. 미친 사람들로 이뤄진 사회안에 있으면서 정상인으로 살아가기는 매우 힘들다. 공동체의 건강함이 나를 제대로 살 수 있게 만든다. 제대로 뭔가 알고 살기 위해서는 나의 눈과 정신상태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눈과 정신상태까지 걱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원문: 나를 지키는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