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살다가 일본으로 이사갔을 때의 일이다. 처음으로 학교 운동회가 있어서 일본 초등학교에 갔을 때 우리는 문화적 충격을 받았다. 참 미국과 일본은 다르구나 하고 느꼈던 것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화의 일본이라는 글을 참조하라). 그런 일본에 산 것이 10년이니 한국에 올 때 우리는 문화적 충격을 받을 것을 각오했었다.
그리고 드디어 전주에서 중학교 2학년 과정에 다니고 있는 둘째 아이의 공개수업날이 되었다. 공개수업에 다녀온 아내는 자신이 받았던 충격에 대해 한동안 나에게 이야기해 주었는데, 내게는 참 선생님도 학생도 불쌍하게 느껴지는 교실의 풍경이었다.
일본에 있을 때에도 우리는 첫째 아이며 둘째 아이의 중학교 수업참관을 갔었더랬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꽤 많은 학부형이 중학교 수업참관에 왔었다. 아빠가 오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공개수업을 하는 교실에 들어서자 아내는 심상치 않은 차이를 느꼈다. 학교에 와서 수업을 참관하는 사람은 자기 하나뿐이었기 때문이다. 부모들 모두가 생활에 바빴는지 아니면 관심이 없는 것인지 나는 모른다. 실상은 아마 그 둘 다 였을 것이다. 아무튼 그 이유가 뭐가 되건 학부형들은 중학교 교육에 그다지 참여를 하지 않고 있었다. 학원은 많이들 보내면서 말이다.
소통 없는 어른들
아내는 학교에 갈 때 은근히 다른 학부형들을 만나서 차라도 마시고 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다. 일본에서는 중학교라도 학부형끼리 알고 지내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일본 중고교에서는 부활동이 매우 강조된다. 예를 들어 우리 아이는 탁구부였는데 그렇게 되면 탁구부의 학부형들이 여러가지 이유로 해서 연락망을 짜고 서로 대화하며 친분도 가지게 된다. 일본의 아이들은 대다수가 이런 식으로 부활동을 아주 많이 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건 학교교육에 부모들이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담임선생님과 학부형간의 소통도 한국에서 보다는 훨씬 많은 것같다. 내가 살던 와코시는 훨씬 더 마을같은 느낌이었다면 상대적으로 한국의 풍경은 뜨내기들만 모여사는 느낌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혹은 사람들이 서로를 멀리하거나 말이다. 이것은 어쩌면 학교교육에 참여하는게 아니라 간섭하고 명령하는 소위 몬스터 학부형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건 부모는 나름대로 살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결국 학생이다. 그러나 아내가 들려준 교실의 모습은 그다지 희망에 찬 사람들의 것은 아니었다.
한국 여중학생들의 치마는 매우 짧고 화장은 매우 짙었다. 내가 본 것으로도 요즘 한국에서 여중생이 화장을 하는가 마는가는 질문할 단계가 아니다. 문제는 화장이 얼마나 짙은가 하는 것이다. 실제로 한 아이는 아예 마스카라까지 짙게 그리고 학교에 와서는 교과서를 수업시간에 꺼내지도 않고 고개를 숙이고만 있더라고 했다.
단 한명의 학부형이 참관하기는 하지만 공개수업에서 학생태도가 그러니 선생님도 민망했던 모양이다. 눈치를 줄만큼 주었지만 아무 반응이 없었다. 문제는 그 한명의 학생만도 아니었다. 적어도 반의 절반정도는 떠들고 자리를 맘대로 바꿔앉은 것같은 상황이었는데 선생님이 관리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문화적 차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내의 기준으로는 수업분위기는 상당히 산만해 보였다.
그런 상황에서 수업을 하는 선생님도 불쌍했고 그런 상황에서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도 불쌍하게 보였다. 아내는 수업참관을 마치고 선생님에게 다가가서 몸에 사리가 생기시겠어요, 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만큼 힘들어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현실에 대해 사람들은 흔히 입시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같지만 내 생각은 오히려 문제가 입시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문제인 것 같다.
이런 상상을 해보자. 어떤 나라에 아주 큰 발레단이 있고 이 발레단이 아주 영향력이 있다고 하자. 그래서 모두가 발레를 하는데 그 경쟁을 뚫고 최종적으로 발레리나가 되는 사람은 그나마 다행이다. 하지만 발레를 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그렇게 경쟁에 이긴 사람의 대우도 그다지 좋지 못하다. 더구나 발레리나가 되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재능도 없고 승패도 뻔한데 귀중한 청춘을 발레를 하는데 낭비해 버렸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발레를 한다. 그 나라에서는 엔지니어나 과학자 혹은 기자나 요리사로 일하기 위해서도 발레학교 졸업장을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이 정말 말도 안되는 나라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국의 현실은 외면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학자가 되지도 의사나 변호사가 되거나 삼성전자나 현대자동차에서 엔지니어로 일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거의 모두가 대학에 가고 있고 대학졸업장이 없으면 미래가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재능없는 사람들을 발레 교실에 묶어놓은 것과 다를 것이 없지 않을까? 이런데도 학생들의 문제는 입시일까? 입시가 문제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현실이 나쁜 거 아닐까?
교육 문제의 핵심 키워드는 공동체와 다양성
교실에 희망이 없는 이유에는 개인적인 차원에서도 여러가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공동체의 붕괴와 다양성의 억눌림이 큰 이유다.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것은 아이들의 삶과 미래에 대해서 진정으로 걱정해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 자식만 살아남으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모두 아이가 불필요한 고통을 겪지 않도록, 자기가 살아갈수 있고 자기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곳에서 살 수 있도록 걱정해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들이 힘든 이유의 대부분은 공동체 붕괴때문이다. 예를 들어 공동체가 굳건하다면 학생들이 대학 등록금 걱정을 하는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 재능이 있고 노력하는 학생에게는 어떤 형식으로건 공동체가 기회를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게 전체 공동체를 위해서 바람직한 일이니까. 아이들은 미래의 시민이고 공동체의 미래다. 아이들에게 냉담한 사회에는 공동체는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다양성의 억눌림은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또다른 큰 이유다. 수없이 많은 아이들이 각자의 삶을 만들어 가기 위해서는 다양한 직업선택이 가능해야 하고 그 말은 직업시장이 독점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운동선수라는 직업이 있다고 해도 운동선수로 사는 것은 끔찍한 일이라면 아무도 운동선수로 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변호사가 되는 것이 압도적으로 쉽게 사는 길이라면 모두가 변호사만 되려고 할 것이다. 1등이 모든 독식하고 국민소득은 10만불이지만 대부분의 국민이 가난한 나라에서는 아무도 행복하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그 1등조차도 말이다.
그러나 여전히 세상에는 전체주의적인 사고가 가득차 있다. 국가가 뭔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국가도 문제고 국민도 문제다. 국가가 뭔가해야 한다면 그것은 독과점이 생기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될 놈을 밀어준다면서 오히려 독과점을 강화하는 것이 정치인인것 같다.
이런 말들로 교실에 희망이 넘치게 되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사실 교실은 원래 따분하고 힘든 곳이다. 그건 정도 문제일뿐 옛날에도 그랬고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고통받는 사람들의 고통이 조금은 줄었으면 한다. 교실에 희망이 조금이라도 더 있었으면 좋겠다.
원문 : 나를 지키는 공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