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슈와르츠 (Martin A. Schwartz)의 The importance of stupidity in scientific research을 번역한 글입니다.
최근에 오랜만에 옛 친구와 재회하게 되었다. 우리는 분야는 다르지만 같은 학교에서 박사과정에 있었다. 그녀는 나중에 대학원을 중퇴하고 하버드 법학대학원에 가서 이제 주요 환경 단체의 선임변호사로 재직하고 있다. 이야기를 하다 보니 화제가 왜 그녀가 대학원을 그만두게 되었는지에 미쳤다. 놀랍게도 그녀가 대학원을 그만두게 된 것은 자기 자신이 멍청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즉 몇 년간 매일매일 자신이 멍청하다고 느끼는 것을 반복하게 된 이후, 더 이상 이것을 견디지 못하고 딴 일을 하고 싶어졌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 그녀는 내가 만난 사람 중 가장 똑똑한 사람중 한명이었고, 그녀가 대학원을 중퇴한 이후 경력은 그녀가 얼마나 똑똑한 사람인지를 증명해 준다. 그렇지만 그 친구가 이야기한 ‘멍청함’ 이라는 이야기는 계속 마음에 걸렸다. 하지만 다음날 갑자기 생각이 번쩍 들었다.
나 역시 과학연구를 하면서 멍청하다고 느낀다.단지 난 여기에 익숙해져 버린 것 뿐.
오히려 여기에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나는 적극적으로 멍청하게 느껴질 기회를 찾고 있다. 나는 이런 느낌 없이는 무엇을 어찌할지도 모르겠다. 심지어는 이것이 과학 연구에서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대해 조금 더 설명해 볼까 한다.
현재 과학을 하고 있는 대부분의 우리가 과학을 좋아하게 된 이유라면, 고등학교나 대학교 시절 과학과목을 잘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만은 아니겠지. 아마 자연현상을 이해하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고자 하는 욕망이 우리를 과학연구에 뛰어들게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고교나 대학시절의 과학은 대개 수업을 듣는 것이고, 수업에서 잘한다는 것은 대개 시험을 잘 본다는 것이다. 만약 문제의 정답을 알면 잘하는 것이고, 스스로 똑똑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박사과정에서 해야 하는 연구 프로젝트는 이런 ‘과학’과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 내 경우에서 이것은 매우 겁나는 일이었다.
어떻게 중요한 발견을 할 수 있는 문제를 생각할 수 있을지. 실험을 디자인하고 이 결과를 해석하여 완전히 확실한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지, 여러가지 문제점들을 미리 예측하고 이것을 미리 회피할 수 있을지, 문제에 봉착한 경우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내 박사과정 테마는 일종의 학제적 연구과제여서, 문제에 직면할 때마다 우리 과에서 해당 분야의 전문가인 교수를 찾아가서 상의하곤 했다. 어느 날 Henry Taube (2년 후에 노벨상을 수상한다) 를 찾아갔을때 그는 내가 봉착한 문제를 어떻게 풀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 당시 나는 3년차 박사과정 원생이었고, 아마도 Taube 교수는 당시 나보다 1,000배는 더 많이 알 것이다. 만약 그가 해답을 모른다면 이 세상에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아무도 알 리가 없다.
바로 그때 번쩍 생각이 떠올랐다. 아무도 알리가 없다.
그래서 이것은 연구할 가치가 있는 문제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내 연구토픽이므로 이것을 푸는 것은 나한테 달려 있다.
일단 이러한 사실을 직시한 다음에는 난 이 문제를 며칠만에 해결할 수 있었다. 사실 나중에 생각해 보면 그렇게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다. 단지 몇가지 시도를 했어야 했을 뿐. 내가 모르는 것의 정도는 단순히 거대한 것이 아니라 무한한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달았을때 난 의기소침하지 않고, 오히려 자유로워졌다. 만약 우리의 무지가 그렇게 무한한 것이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우리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는 것 뿐이라고.
나는 우리의 박사과정 프로그램이 학생들에게 두가지로 잘못된 영향을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첫번째는 학생들이 연구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이해하게 만드는 것 자체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중요한 연구를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도 말이다. 연구를 한다는 것은 매우 힘든 수업을 듣는 것보다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훨씬 더 어려운 법이다.
연구가 어려운 이유는, 연구라는 것이 근원적으로 ’잘 모르는 것’ 속에서 헤매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연구를 하면서 우리는 우리가 뭘 하는지 조차 모를 때가 많다. 우리가 제대로 된 질문을 묻고 있는지도 알 수 없으며 결과를 얻을 때까지 우리가 제대로 된 실험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사실 연구비를 수주하는 것이나 탑 저널에 논문을 싣는것보다, 과학 연구 그 자체가 매우 어려운 일인 것이다. 즉 과학 연구를 하는 것은 그 자체로 어렵고, 학과나 학교 혹은 국가의 과학 정책을 어떻게 바꾼다고 하더라도 과학 연구의 그 근본적인 ‘어려움’ 을 완화시켜 줄 수는 없다.
두번째로 우리는 학생들에게 얼마나 ‘생산적으로 멍청할’ 수 있는지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고 생각한다. 이 말은 우리가 연구를 하다가 ‘우리는 정말 멍청하다’ 라는 느낌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그저 제대로 연구를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멍청함’ 이라는 ‘상대적인 멍청함’ 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즉 다른 학생은 수업준비를 잘해서 시험을 잘 보는 반면 자기 자신은 그렇지 않아서 성적이 나쁜 그런 것 말고 말이다. 내가 말하는 ‘멍청함’ 은 ‘절대적인 멍청함’, 즉 과학연구를 할때 느낄 수 밖에 없는 ‘세상 누구도 모르는 것’ 을 직면했을때의 멍청함이다.
이러한 종류의 멍청함은 항상 존재하며, 우리를 미지의 세계로 이끄는 원동력이다. 박사과정의 논문자격시험이나 논문심사는 심사위원이 학생이 잘못된 답을 이야기하거나 포기하고 ‘잘 모르겠는데요’ 할때까지 밀어붙일때 의미가 있다. 이러한 시험의 목적은 학생이 정답을 이야기하는데 있지 않다. 만약 이런 상황이 된다면 학생이 아니라 심사위원인 교수가 시험에서 실패한 것이다. 이런 시험에서 중요한 점은 학생의 약점을 파악하고 노력을 해야 할 부분을 파악하고, 학생이 충분히 높은 수준에서 지식의 한계를 느낄 수 있는지를 파악해서 이들이 과연 과학 연구 프로젝트를 수행할 수 있는지를 보는 것이다.
‘생산적인 멍청함’ 은 자발적인 무지함이다. 중요한 과학적 문제에 집중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무지한 상황속에 빠지게 된다. 과학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 중의 하나라면 우리가 이런저런 실수를 하고 반복해서 헤매게 되더라도, 우리가 그 과정 속에서 무언가를 알게 된다면 괜찮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정답을 답하는 데 익숙해진 학생들에게는 적응하기 힘든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적당한 수준의 자신감과 감정적인 회복이 도움이 된다.
그렇지만 난 과학교육 자체가 뭔가 큰 보탬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과학교육 과정이 다른 사람이 이전에 발견한 것을 배우는 것에서 자신이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큰 전환과정에서 어떤 역할을 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우리가 잘 모른다는 사실에 대해서 인식할 수록 우리는 미지의 사실에 좀 더 깊게 다가갈 수 있으며, 보다 중요한 발견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