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에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보면서 가끔 등장하는 ‘박사’들에 대해서 경외감을 느낀 분도 많이 계실 것 같다. 물론 그 ‘박사’라는 사람들 중에서는 세계 정복을 획책하는 매드 사이언티스트들도 있는 반면, 주인공을 서포트하여 이들을 저지하는 ‘착한 박사’도 있다. 그러나 ‘착한 박사’ 의 경우에는 대개 조연급 이상은 되기 힘들다는 불편한 진실
물론 대부분의 착한 어린이 여러분들은 ‘착한 박사’쪽을 동경하여 ‘나도 커서 과학자가 되어서 지구를 지키는 훌륭한 과학자가 돼야지…’ 와 같은 건전한 상상을 하셨겠지만 일부 삐딱한 어린이(?) 라면 ‘에이, 난 나쁜 박사가 더 좋아. 일단 지구는 정복하고 봐야지..핫핫핫’ 이라는 상상을 해봤을지도 모른다.
저 말입니까? 꽤 현실적인 어린이었던 관계로 그런 것을 보면서도 ‘훗 저런 게 되냐? 걍 나는 크면 회사원 ㄱㄱ’ 정도의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어쩌다 보니까 박사학위라는 것을 획득한 지도 꽤 되었고, 어쨌든 ‘과학자’ 라고 불릴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참 아이러니컬한 일일지도 모르겠으나, 결국 어린 시절에 생각한 ‘장래 희망’대로 된 사람을 찾기란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다. 여러분은 회사원을 꿈꾸던 어린이가 지구정복을 노리는 매드사이언티스트가 된 현장을 보고 있습니다.
비록 필자는 소싯적 TV 만화영화를 감동하여 ‘난 이런 박사가 되서 세상을 구할거임!’ 하는 꿈을 가지고 있다가 실제로 박사가 돼서 현실에 실망한 것은 아니지만 (어릴 적에도 다 이럴 줄 알았다구 -.-;;) 어쨌든 지금 학위를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각종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박사들의 모습을 보면서 감회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그래서 이제 대중매체 속의 박사, 특히 TV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박사들에 대한 썰을 좀 해보도록 하겠다. 물론 ‘왜곡된 박사/과학자에 대한 이미지를 수정하자’ 성의 캠페인성의 글은 아니고..뭐 필자의 글 대부분이 그렇듯이 만담이라는 것에 유의 하시길 바라며.
1. 흰색 가운의 진실
대개의 영화,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박사’ 캐릭터중 흰색 실험가운을 입지 않은 박사를 본 기억이 있는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흰색 실험가운, 우리가 말하는 실험복이라는 것은 화학 물질 등을 사용하는 실험을 할 때 몸을 보호하기 위해서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몸보다는 ‘옷’일 수도 있겠다만) 입는 경우가 많음. 물론 실험하려는 대상에 조금이라도 노출되면 몹시 위험한 원자로라든지, 아니면 에볼라 바이러스라든지 그것도 아니라면 조그만 먼지라도 들어가면 실험을 망치는 경우 (반도체 생산라인 같은 곳) 등에는 단순한 가운 가지고는 안되고, 따라서 특수한 방호복 내지는 방진복을 착용해야 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
그렇지만 직접 기계를 다루거나 시약을 다루는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닌,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주로 일을 하는 공학계열의 박사 같은 사람. 아니면 높은 위치에 있어서 직접 더티 웍을 하지 않아도 되는 대빵 박사라면, 실험복을 입을 필요가 전혀 없고 실제로도 거의 입지 않는다. (“박사가 되면 무조건 다른 사람 부리면 되지 않나요?”라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겠지만 박사도 박사 나름인 것이다. 들어봤나 포스트닭)
이것은 한국이나 미국이나 거의 세계적으로 공통적. 물론 해외에는 학술적으로 매우 명망이 높은 대가 교수라도 가끔 손수 실험을 하는 경우가 있긴 하지만. 꼭 그렇다고 해서 실험복을 항상 챙겨입는 것도 아니다.
물론 사회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고 실험을 전혀 하지 않는 박사라도 실험복은 한 벌 정도 있어야 한다. 가끔 매스컴을 탈 때 사진기자가 실험복을 입고 포즈를 취하라고 할 때 필요하니까. 다 아는 이야기겠지만 신문에 등장하는 유명한 박사들이 실험복 입고 실험하는 척하는 사진은 99.9% 연출사진.
그리고 실험복을 입어야 하는 상황에 있는 박사라고 할지라도 웬만한 경우에는 실험복을 잘 입지 않는 게 보통. 귀찮으니까. 직접 일을 해야 되고 게다가 항상 여러 가지 화학 시약을 사용하여 실험을 하는 필자의 경우에도 실험복을 입는 경우는 다음의 몇 가지 경우?
- 실험실 대청소를 하는 경우
- 여름에 저온실 (섭씨 4도-10도 정도의 온도)에 들어가 오랫동안 작업을 해야 하는 경우. 실험가운을 입지 않으면 춥잖아요.
학교 난방이 꺼졌을때 - 정말 몸에 해로운 물질을 대규모로 다루는 경우 (일년에 한두 번 정도?)
물론 이것은 사람에 따라서 다르기 때문에 항상 실험을 할 때는 실험복을 입는 사람들도 있다. 주로 여성분들에게서 이런 경우가 많은 것 같은데 (그렇다고 모든 여성 박사들이 실험할 때 항상 실험복을 입는 것은 아닙니다만.) 어쨌든, 대충 어림짐작으로 봣을 때, 제가 일하는 곳인 생물학 분야의 실험실에서 실험복을 항상 착용하고 다니는 박사의 비율은 대충 30% 미만? 기관마다 틀리겠지만 이 비율은 대충 미국이나 한국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는 생각? 물론 의대쪽에서는 일상적으로 가운을 입는 것이 보통이긴 하지만.
그런데, 문제는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박사들은 대부분 화학이나 생물 실험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아니고 (90%는 기계, 전자 분야. 게다가 로봇 제작이라면 컴퓨터 시뮬레이션이나 전자회로 개발, 설계가 주겠고 직접 만드는 작업은 하청을 주겠지) 더욱이 대부분의 경우 애니메이션에 등장하는 박사는 직접 일을 하는 시다바리 박사…가 아닌 PI(Principal Investigator:연구책임자) 급의 고참 박사. 즉, 다들 ‘무슨 무슨 연구소 소장’ 내지는 최소한 ‘연구책임자’ 정도는 되지요. 다른 박사 밑에서 지시를 받아 일하는 박사의 경우에는 대개 엑스트라급 이상으로는 나오지 않겠지.
즉, 가운을 입을 일도 없으면서 모두들 언제 어디서나 하얀색 가운을 입고 있다.
가부토 쥬조 박사(강박사)가 마징가 제트를 직접 닦고, 조이고, 기름치는 것도 아니고, 아카기 리츠코 박사가 직접 피펫 들고 실험대 위에서 아야나미 레이의 DNA를 뽑는 것도 아닐텐데(말로 다 하잖아요..이부키 마야가 없으면 어떻게 일을 했을까?) 왜 가운을 입어야 할까? 게다가 실험실이나 공장에서 실험복을 입는다면 낫지만 그것도 아니고 광자력 연구소 메인 컨트롤 룸이나 네르프 본부 상황실에서 왜 가운을 입어야 할까?
그 이유는 여러분도 아마 짐작하고 계실 것이고 물론 필자도 알고 있다.
가운을 입지 않으면 박사인 줄 모르잖아요!
그렇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지만 모든 미디어 속의 박사들은 전공불문, 직위불문, 성별불문, 나이불문, 흰색 가운을 입고 있었다. 따라서 시청자의 뇌리속에 ‘모든 박사는 가운을 입고 있어야 한다’ 라는 고정관념이 박혀 있다. 만약 현실적인 고증(?)에 충실해서 애니메이션 속의 박사들이 티셔츠에 운동화, 쭈글쭈글한 바지 내지는 반바지를 입고 나온다면..시청자 중에서 그 캐릭터가 박사라고 생각할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마치 카레카노처럼 화면 속에 자막과 화살표로 ‘이 사람은 박사임’이라고 표시해야 될런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가운을 입게 되면 아무런 부연 설명 없이도 ‘아하, 이 사람은 박사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는데, 얼마나 편리한가? 사실 애니메이션 시청자 중에서 “제가 무슨 대학 연구실을 가 봤는데요, 가운 입고 있는 박사는 하나도 없던데요. 엉터리로 애니메이션 좀 만들지 마쇼!” 라고 항의 전화할 사람도 그닥 많을 것 같지도 않고.
그런데, 악역으로 나오는 ‘나쁜 박사’의 경우에는 신기하게도 거의 가운을 입지 않는다. 왜 그런 것일까 이유를 생각해 봤는데… 사실 ‘흰색 가운’은 박사의 상징뿐만이 아니라 정의를 수호하는 것을 도와주는 사람의 (앞에서 말했듯이 착한 박사는 결코 주연을 할 수 없는 것이다.)상징 같은 존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실험실에서 거의 가운을 입는 경우가 없는 나는 장차 ‘나쁜 박사’가 될 가능성도 있다는 건지도 모르겠다. 넌 이미 매드사이언티스트다 위장은 소용없어
2. 그들의 진짜 전공은?
그들은 진짜 博士 (博 자가 ‘넓을 박’자인거 모르시는 분은 없겠죠? 이명박의 박자겠지)다.
무슨 말인가 하면, 도대체 전공이 뭔지를 짐작할 수 없다는 거. 에바의 아카기 리츠코 박사만 하더라도 생물 분야도 잘 아는 척하며(그냥 휘하에 생물학 전공 포스트닥을 고용하여 일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지만.. ^^; 암튼 레이의 정체를 생각해 보면 발생공학 정도 했으려나?)마기가 해킹당했을 때를 생각해 보면 슈퍼컴퓨터 분야도 잘 아는 것 같고, 일단 생체병기(?)인 에바에 껍데기를 입힌 것을 봤을 때 기본적인 기계공학에 대한 지식도 있어야 할 것 같고.
슈퍼로봇계 박사들도 마찬가지인데. 금속공학이나 재료공학은 기본이며 (무슨무슨늄 하는 초합금을 만들려면 금속공학이나 재료공학을 모르고서는 가능하지 않겠죠) 당연히 로봇 제작이므로 기계공학에도 통달해야 하고 물론 전자공학은 말할 것도 없고, ‘자연어 인식’ 같은 컴퓨터 사이언스에도 일가견이 있어야 할 것 같음. (자연어 음성 인식 기능이 없다면 ‘무슨무슨슈퍼어택!’ 하는 파일럿의 ‘필살기 외치기’를 실시간으로 로봇이 인식하여 반응할 수 있을까? 아참, 이 글의 원글은 2000년대 초에 쓰여진 거다. 뭐 이제는 아이퐁 하나 꽂아놓고 쉬리양에게 파일럿 필살기 외치기 인식시키면 된다 ㅋ)
그뿐인가? 상당수의 경우에는 직접 군사작전을 입안하거나 지휘하는 군사적 지식도 있어야 하는데, (물론 대부분의 경우에는 박사가 입안한 작전대로 되기보다는 그냥 소년소녀 주인공의 애드립에 의해 해결되는 게 더 많지만) 아주 가끔은 다른 계열에 종사하는 박사인데도 엉뚱하게 ‘메디컬 닥터’의 역할까지 수행하는 경우도 있음 (다들 M.D/Ph.D들인지… 참고로 미국의 의과대학은 대학원 과정으로써 통상적인 의과대학의 과정을 마치면 M.D가 되지만 실험실에서의 연구와 임상과정을 동시에 수행하면 M.D/Ph.D라는 학위를 수여받을 수도 있는데 아주 어려움)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대체 학부 시절에는 무슨 과를 졸업한 것일까?
기계공학과? 전자공학과? 금속공학과? 생물학과?
아님 복수전공? 대학원 때 전공을 바꿨다? 일단 학위를 받은 다음에 또 다른 학위과정을 밟은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원래 다 잘나고 똑똑한 사람들이니 동시에 두 개의 학위를 이수했다? 군사적 지식은 그냥 밀리터리 오타쿠라고 치고..^^;
가장 현실적인 방안은 육사 내지는 해사, 공사와 같은 곳을 나오는 게 좋겠다. 농담이 아님. 육사나 해사, 공사는 단순히 군사학만 배우는 것이 아니고 많은 이공계열의 기초 학문을 수강하는데 경우에 따라서 장교로 임관된 다음에 민간의 대학에 위탁하여 대학원 과정을 이수하기도 한다. 물론 애니메이션 속의 박사들 중에서 이런 설정을 가진 사람은 본 기억이 없는 듯싶다만…
3. 그들의 연구비 정산법
세상의 모든 일이 다 그렇듯이, 연구라는 것은 ‘연구비'(=돈) 가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음. 이것은 정의를 수호하는 광자력 연구소이건 세계 정복의 야욕에 불타는 헬박사 쪽이건 마찬가지. 마징가제트용 초합금 주문하려고 하는데 견적서 넣어주시고요, 영수증은 500만원 이내로 나누어서 여러 장으로 끊어주세요.
연구에 필요한 돈이란 단순히 마징가 제트 주조용 초합금 비용, 에바 껍데기 씌우는 비용.. 뭐 이런 직접적인 재료비 및 장비 구입비만 의미하는 것이 아님. 헬박사건, 가부토 주죠 박사건 밥은 먹고 살아야 하지 않겠냐는. 실제 현실에서 연구비 중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다름아닌 연구원들의 인건비.
사실 현실 속에서의 대학 내지는 연구소의 연구원들의 보수는 다른 분야에 비해서 솔직히 많은 편이라고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르겠으나, 세계 정복을 획책하건, 악의 손길에서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건 아무튼 첨단기술을 이용한 궁극병기를 만드는 애니메이션 속의 연구원들은 다들 잘난 고급인력 사람들일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미창부과제 기준의 연구원 연구비 기준으로는 택도 없고 좀 쎈 대우를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 악의 집단 같으면 유망한 연구원을 납치해서 정신세뇌를 한다든지 해서 공짜로 부려먹는 필살 연구비 절감기법을 쓸 수도 있겠지만 그건 알아서..
그러면 이제 그들은 어떻게 연구비를 염출하여 그 거대한 프로젝트(?)를 수행하는지에 대해서 한번 상상해 보기로 할까. 일단 편의상 ‘나쁜 박사’와 ‘착한 박사’ (너무 단순한 이분법적 분류라구요?) 로 나누어서 생각해 보기로 함.
먼저 나쁜 박사부터.
사실 나쁜 박사 쪽은 매우 간단함. 어차피 그들은 합법적인 경로에서 연구비를 조달하지는 않을 것이므로 (물론 일부의 나쁜 박사들은 정부에서 정당한 연구비를 수혜받은 다음에 그것을 자신의 음흉한 연구에 전용할 가능성도 있지만, 사실 쉬운 일이 아님. 요즘 연구비 관리가 철저해져서 -.-;;) ‘자기 자신, 혹은 조상이 억만장자이거나 아니면 세계 정복을 획책하는 악의 무리들로부터 돈을 받는다’ 한 마디면 끝.
어차피 악의 조직이니까 쩨쩨하게 연구비 사용 내역에 대해서 그리 터치하지 않을지도 모름 (글쎄 그건 모르는거다. 더 쫀쫀하게 영수증 1원어치까지 맞추어야 할지.) 그렇지만 ‘착한 박사’의 경우에는 좀 골치아파짐. 일단 ‘착한 박사’는 정의를 수호하는 쪽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므로 연구비 역시 합법적인 경로를 거쳐야 할 것임.
역시 나쁜 박사와 마찬가지로 가장 손쉬운 연구비 조달 방법이라면 과학자 자신이 어마어마한 부자라던가, 아니면 정체불명의 억만장자 독지가로부터 기부금을 받는 것이겠지만 그게 말처럼 쉽겠냐는. 사실 과학자가 어마어마한 부자일 가능성은 별로 없슴. (특허 사용료라구요?..주변에 특허를 출원해서 떼부자가 되었다는 과학자가 있으면 한번 얼굴이나마 보고 싶다는.) 게다가 정의를 수호하기 위한 슈퍼 로봇 제작과 같은 것이라면 돈 몇십억 정도 가지고는 택도 없고 빌 모 아저씨 수준은 벌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그렇지 않고 민간에서 정부에서 연구비를 수혜받는 경우라면 매우 성가심. 일단 정부에서 외계인의 위협을 막기 위해 어떤 것이 필요한가에 대해서 RFP를 받게 되겠고, 이렇게 작성된 RFP에 따라서 ‘차세대2족 보행형 결전병기 개발 계획’ 같은 연구사업 공모를 하면 많은 연구자들이 제각각의 연구 계획서를 제출하게 되겠고..
정부는 이것을 각계 권위자(누구?..^^;)를 불러서 주도면밀한 심사, 즉 동료과학자들의 피어리뷰를 거치고, 연구비가 과다상정되지 않았나 등등을 엄밀하게 따져서 (가령 마징가용 초합금 주조비가 1톤에 1억 원인데 이를 10억 원으로 책정하여 9억 원을 연구자가 딴 데 쓰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도 다 검토해야지) 연구비를 확정해 수혜함.
이렇게 연구비를 받았다고 끝나는 것이 아님. 국내의 연구비는 사실 항목별로 세분화되어 있어서 항목별 전용이 매우 어렵다는. 무슨 말인가 하면, 가령 연구원 인건비로 5억원을 계획했고 마징가 제트용 콘트롤 회로 제작비로 3억원을 나누어 놨다면 연구비 결산을 할 때 무슨 재주를 부려서라도 인건비는 딱 5억원을 써야 하며 회로 제작비로는 1원도 빠지지 않는 (실질적으로는 한 100원 정도의 오차는 봐줍니다^^;) 3억 원을 써야 한다는 것임.
설령 불가피한 사유로 인해서 (대만의 반도체 공장에 지진이 발생해서 반도체값이 폭등해서 제작비가 3억 원보다 더 들었다고 해도) 연구비가 계획대로 집행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연구비를 주는 정부에서는 짤없이 이전에 계획된 것만큼 쓰도록 요구함. 허위로 연구비 사용 내역을 제출했다가 감사에 걸리면 마징가 제트고, 에바 시리즈에 들어갈 S기관 제작이건 다 도루묵이라는 거다^^; 그러므로 연말이 되면 정작 로봇 개발보다는 연구 실적 보고서라든지 정산 쪽이 더 큰일인 것이다.
그나마 연구비를 수혜받았다면 다행인데 자기가 생각하기에 훨씬 월등한 연구계획을 가지고 있다손 치더라도, 심사시에 별로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해서 (위촉한 연구계획 심사자가 사실은 말만 앞서는 엉터리 권위자였다던가…^^) 연구비를 받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나?
뭐 그럴 경우에는 앞에서 말한 ‘지구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재산을 아무 거리낌 없이 지출하는 독지가’를 찾아서 연구비를 구걸하거나, 아니면 집 팔고, 땅 팔고, 은행에서 융자받아서 연구비를 추렴하거나 (굉장한 재력가가 아니라면 불가능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합니다만..), 그것도 아니라면 현 연구계획이 끝나서 다음 연구비 공모가 있을 때 아예 포기하고 연구비를 수혜받는 사람 밑으로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서 (“제발 마징가 제트 도색용 페인트 개발에나 참여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라고 빈다든지..^^;) 그 밑의 세부 연구책임자로나 일하든지. 뭐 이건 선택하기 나름. 아니면 아예 다 포기하고 손가락이나 빨던지..(..^^;)
최악의 시나리오라면 이렇게 연구비를 수혜받지 못하는 것 때문에 비뚤어지게 되고 급기야는 세계를 저주하여 세계 정복 내지는 멸망을 획책하는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될 가능성도 있음.
물론 정부기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초법적인 조직(NERV라든지), 하다못해 CIA라든지 국가정보원이라든지 하는 비교적 외부 감사 기관에 의해 터치를 많이 받지 않는 곳에 소속되어 일하는 박사라면 좀 문제가 달라짐. 어차피 이런 경우에는 자신이 프로젝트를 수주하고 관리하는 귀찮은 일에서 벗어나, 그냥 월급받아서 윗선에서 시키는 일만 하면 되는 것임. 그런 것을 생각해 본다면 아카기 리츠코 씨는 이전의 선배 애니메이션 속의 박사들보다 훨씬 속편할지도 모르겠다는. 그럼 이런 초법적인 조직들은 어떻게 그 비용을 대는가? 뭐 이건 간단하다.
세금을 올린다.
4. 옛날과 지금의 박사들
시대가 변함에 따라서 애니메이션 속에서 묘사되고 있는 박사의 모습도 완전히 동일한 것은 아님(물론 실험가운을 입는다든지와 같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지만서도…). 여기서는 옛날 애니메이션 속의 박사의 스테레오타입과 요즘 애니메이션 속에서 그려지는 박사의 모습과의 차이를 한번 생각해보기로 하겠다.
옛날 애니메이션
- 대부분 50대 이상의 노령층.
- ‘착한 박사’의 경우에는 착실하게 하얀색 가운을 입고 나오며 대부분 안경을 착용하고 있음.
- 나쁜 박사의 경우에는 거의 대다수 하얀색 가운을 입지 않음.
- 머리는 대개 백발, 수염을 기르고 있는 경우가 많음.
- 대개 위에 아무도 없는 연구 최고 책임자(무슨무슨 연구소장이라든지).
- 전공은 대개 기계공학 (로봇공학?) 내지는 원자핵공학이라고 추정됨.
- ‘착한 박사’인 경우에는 대개 딸이 있으며 주인공과 그 딸내미 사이에는 대개 썸씽이 일어남. (..!)
- ‘나쁜 박사’의 경우에는 대개 가족이 없음.
- 고집이 세고 주변 사람들과의 인간관계는 밑바닥인 경우가 많음.
요즘 애니메이션
- 20대 후반의 여성의 비중이 높음. 남성인 경우에도 그리 나이가 많지 않음.
- 옛날과는 달리 ‘무슨무슨 연구소장’ 인 경우는 거의 없고 단순히 연구파트의 책임자 정도인 경우가 많음.
이러니 이공계 기피가 일어나지 - 역시 하얀색 가운은 죽자사자 입고 나옴.
- 여성인 경우에는 지적인 이미지의 미모임. (실제로 그렇지 않더라도 적어도 설정상으로는..)
- 전공은 다양하지만 상당 부분 생물학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 경우도 있으며 컴퓨터 공학, 물리학 등등 잡다함.
어쨌든, 이러한 세부적인 사항들에서 약간씩 변화가 있을지는 몰라도 애니메이션 속의 ‘박사’들은 여전히 예나 지금이나 근본적으로는 크게 변하지 않는 것 같음. 사실 대중매체 속에 등장하는 박사들이 제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아주 현실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면 오히려 당혹스러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적어도 만화에 등장하는 박사들이 동료 박사들과 ‘이번에 연구비 신청한 것, 될 수 있을 것 같아?’ 라든지 ‘에이, 연구소장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런 것을 하라는 거야? 짜증나게…’ 비슷한 대화를 하는 것을 듣고 싶지는 않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