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말하는 이공계 위기론의 골자는 이런 것인데
이전에는 이공계 학과에 진학해 연구자가 되던 최상위권 학생이 이제는 의대에 가고 남은 떨거지만 이공계에 진학하거든? 우린 망한거여 ㅠ.ㅠ
여기에는 ‘대학 진학 시절의 학업성적 최상위권인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연구자로써 우월한 자질을 가질 것이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물론 연구자로써의 성공 여부를 가늠하는 것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당연히 지적 능력을 우선적으로 평가하지 않을 수 없으며, 학업 성적의 성취도가 지적 능력과 비례하는 건 당연하다고 간단하게 치부해 버릴 수도 있겠지만, 과연 이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인지는 좀 생각해 볼 일이다.
연구와 학습은 다르다
근본적으로 대학 학부과정 까지의 학업 성취는 개인의 학습능력에 의해 결정되는데, 여기서 말하는 학습능력이라는 것은 결국 누군가가 미리 다 풀어둔 문제의 단계를 따라하는 능력이다. 즉 교과서에 나오는 내용을 잘 이해하고, 응용하는 정도로 해결이 되는 것이 대학 학부과정까지의 교육. 게임에 비유하자면 스타크래프트의 켐페인을 잘 하는 능력이랄까?
그렇지만 ‘연구’의 단계로 들어서면서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은, ‘연구는 근본적으로 해법이 제시되지 않은 문제를 푸는 것’ 이기 때문이다. 즉, 인류 역사상 누구도 여태까지 풀지 못했던 무엇인가를 해결하는 것이 ‘연구’ 이고, 그게 아니라면 ‘연구’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보다 한 단계 더 나아가서 ‘구체적으로 제시된 문제를 해결하는 것’ 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지금 무엇을 모르는가, 탐구해야 할 만한 가치가 있는 문제가 무엇인가’ 를 찾는 것이 궁극적인 연구자로서의 성공을 가늠하는 자질인 것이다.
즉, 남이 제시하고 해법을 만든 문제를 푸는 방법을 잘 수행하는 자질은 ‘아직 답을 모르는 문제를 푸는 방법을 찾는 것’ 혹은 ‘무엇이 과연 풀 수 있는 문제인가’ 를 찾는 자질과 꼭 일치한다고만은 볼 수 없다. (물론 그 두개를 동시에 겸비하는게 불가능하다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연구에는 순발력보다 지구력이 필요하다
또 하나 생각해야 될 요소는 ‘문제에 주어지는 시간’ 이다. 결국 시험장에서의 수초, 수분, 잘해봐야 학교 테이크 홈 시험에서 며칠 정도의 고민을 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학습능력을 결정한다면 연구에서의 문제는 최소 며칠, 몇 주, 몇 달, 심지어는 몇 년, 몇십년이 걸려도 해결되지 않는 것이 흔하다. 즉, 학습능력을 평가할 때 중요한 것이 ‘순발력’ 이라면 연구 문제를 해결하거나 연구의 주제를 발굴하는 능력은 결국 ‘지구력’ 이다. 어떻게 보면 단거리 스프린터로써의 자질과 마라토너로써의 자질과의 차이라고나 할까?
물론 미지의 문제의 해법을 찾거나 ‘무엇이 문제인가’ 를 찾는 데 당연히 어느 정도의 학습 능력이 필요한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특히 ‘그닥 어렵지 않은 연구 문제’ 의 경우에는 남이 이전에 수행한 방법론을 그대로 적용해서 풀 수 있는 경우가 많으니까. 그러나 그런 순수한 ‘학습능력’ 만으로 풀 수 있는 연구의 문제는 사실 내가 아니더라도 세계의 누군가는 언젠가는 손쉽게 해결할 문제. 즉, 중요한 연구과제가 아니라는 이야기이다.
이공계 위기론을 이야기하면서 여기까지 나왔는데, 나는 결론적으로 이공계 위기론의 “머리 좋은 넘들은 이제 연구를 안 하니까 우린 다 망한 거야”를 믿지 않는다. “그 머리 좋은 넘”들이 사실 그닥 “연구에 적합한 머리”가 아니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여태까지 ‘국가의 가장 뛰어난 인재들이 이공계에 몰려갔으면서도’ (대학입시 자연계 수석은 대개 모 대학 물리학과로 가는 것이 유행이었던 때도 있었다) 그다지 대단한 자연과학적 성과가 나오지 못한 이유와도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 우사인 볼트를 42.195 km 마라톤 경기에 보내놓고 왜 일등을 못하냐고 불평
차라리 지금처럼 학습능력은 국가적으로 가장 뛰어난 사람이 그만큼 학습능력은 필요한 직업인 의사, 변호사가 되는 것이 어쩌면 그리 나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