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도 몰라? 왓슨 & 크릭!”이라고 외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글쎄? 지금 보는 B-form의 DNA 이중나선 모델을 만든 사람은 분명 저 두 사람이 맞다. 그러나 우리가 생물학에서 무엇을 ‘규명했다’라고 할 때는 대개 어떤 가설을 실험적으로 입증했을 때이다. 이 블로그를 오래 읽어오신 분, 혹은 분자생물학의 역사에 좀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알겠지만, 사실 저 두 사람은 어디까지나 몇 가지의 정보(유기화학적 지식, 어윈 샤가프가 얻은 G와 C, 그리고 A와 T의 비율이 비슷하다는 정보, 그리고 훔쳐본 로절린드 프랭클린의 Fiber diffraction 사진)를 이용하여 하나의 가설을 세웠을 뿐이다.
궁극적으로 이러한 DNA의 이중나선 모델, 특히 염기쌍의 수소결합 등을 원자수준에서 규명하려면 당연히 단일결정에 의한 X선 결정구조가 있어야 했는데, 그게 나오기까지는 저 모델이 만들어진 후 무려 27년이 걸렸다. ㄷㄷㄷ
따라서 왓-클의 이중나선 모델을 확증할 수 있는 실험적인 증거가 미흡했으므로 왓-클 모델이 소개된 지 20년이 넘는 1970년대 중반까지도 저런 형태의 ‘alternative DNA model’ 를 주장하는 논문들이 종종 등장하곤 했다. ㄷㄷㄷ
그렇다면 왜 그리 오래 걸렸을까? 먼저 최초의 생체고분자(단백질)에 대한 X선 결정구조인 미오글로빈이 고해상도로 풀린 것부터가 1959년이고, 구조를 푸는 기술 역시 정립되는데 시간이 걸렸다. 그 이후에도 그리 쉽게 결정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라면…
① 결정이 만들어지려면 화학적으로 균일한 DNA가 다량으로 있어야 한다. 그러나…
즉 단백질이건 DNA이건 염이건 결정이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균일한 분자가 격자를 형성하는 건데,
그 당시 얻을 수 있었던 DNA는 천연 상태로 길이도 제각각이야, 염기 조성도 다 틀려, 따라서 단일 결정을 형성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로절린드 프랭클린이 얻은 X선 회절 데이터는 결정에서 회절한 데이터가 아니라 섬유상 형태로 있는 DNA 다발에서 얻은 데이터였다.)
② 당시에는 화학적으로 의미 있는 길이의 DNA를 합성하는 기술이 없었다.
따라서 결정구조를 얻고 싶어도 결정을 만들 ‘길이와 염기조성이 균일한’ DNA가 없다는 게 맹점. 즉 1953년에 발표된 왓&클의 이중나선 구조는 여러 가지 생물학적인 실험 등에 의해서 이를 보조하는 데이터들은 많이 나왔으나, 이 구조가 확실한지에 대한 증거는 꽤 오랫동안 나오지 않았다.
꿩대신 닭이 아니라 DNA 대신 tRNA
그렇다면 이제 생체고분자를 X선 결정학으로 구조규명을 할 수 있게 된 1950년대 말, 1960년대 초의 사람들은 손가락만 빨고 있었을까? 당시까지도 여전히 화학적 방법으로 매우 긴 DNA를 충분한 양만큼 합성할 수 없었지만, 사람들은 대신에 “결정을 만들 정도로 대량으로 순수정제가 가능하며”, “길이도 적당하며”, “염기조성이 균일한” 작은 핵산을 찾아냈다.
그게 바로 tRNA 되겠습니다.
효모에서 tRNA, 그것도 tRNA isoacceptor 중 페닐알라닌이 붙는 tRNA(Phe) 를 순수정제할 수 있다는 것이 1960년대에 알려진 이후 여러 그룹들이 이들의 결정화와 구조결정에 뛰어들었는데, 결국 승리한 것은 지금은 UC Berkeley에 있는 김성호(Sung-Hou Kim) 교수와 알렉산더 리치(Alexander Rich) 그룹이었다.
이 구조가 중요한 것은 단순히 tRNA가 2차 구조처럼 클로버 형태가 아니라 L자 형태로 이리저리 꼬여있다도 있겠지만, 그 당시로서는 이것이 ‘핵산’ 의 나선형 구조, 그리고 염기쌍의 수소결합을 원자수준에서 최초로 확인해 주는 구조였다는 점에서 더 큰 의의를 지닌다. 그래 봐야 RNA니까 ‘이중나선’은 아니고 한 가닥 나선 ㅠ.ㅠ
참고로 김성호 교수님의 말씀을 좀 오래전에 들은 적이 있는데, 당시에 처음 tRNA를 결정화하고 나서 나온 결정이 진짜로 RNA인지 한참 고심했다고 한다.
- 대개의 결정화 조건에서는 높은 농도의 염용액을 쓰는데, 그런 염이 잘못 결정화되는 경우가 많고,
- RNA라는 것을 그때까지 아무도 결정화해본 사람이 없어서 진짜로 이게 결정화가 되는지도 많은 사람이 의구심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생각 끝에 RNase(!)를 tRNA 결정에 쳐봤더니 결정이 스르르 녹는 것을 보고서 이게 RNA 결정이구나 확신했다고…ㄷㄷㄷ
DNA를 드디어 결정화하긴 했는데…
그리고 1970년대 후반에 들어서 드디어 화학적으로 DNA를 결정화에 충분한 양으로 왕창 합성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었다. 그래서 tRNA의 구조도 규명한 MIT의 리치랩에서는 잽싸게 DNA 결정화 프로젝트를 시작해서 5′-GCGCGC-3′ 의 DNA 이중나선 올리고를 결정화한다. 그렇게 해서 규명된 구조는…
엌ㅋㅋㅋㅋ 왓슨-크릭 모델과는 반대로 왼쪽으로 꼬인 넘이 나왔엌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렇게 해서 Z-DNA라는 넘이 발견되었다. 이게 최초로 규명된 DNA 결정구조라는 사실 ㄷㄷㄷ
그런데 결국 생체 내에 주로 존재하는 넘은 B-Form과 비슷한 형태이고(Histone에 감긴 형태로 볼 때), Z-Form은 특정한 조건에서는 존재할 수도 있는데, 어떤 생물학적인 의미가 있는지는 아직도 잘 몰러~의 상황이다.
그렇다면 왓-클의 B-Form DNA를 최초로 결정화하여 구조를 푼 것은 누구인가. RCSB PDB에 최초로 등록된 DNA 구조를 보면 이것(1BNA)인데
이게 최초로 등록된 ‘레알’ DNA 구조가 되겠음. 1980년 N 모 잡지에 이 논문을 낸 영광의 주인공은
당시 칼텍에 있던 Richard E Dickerson 그룹이다. 이 사람들은 5′-CGCGAATTCGCG-3′ 로 된 이중나선 DNA 구조를 풀었고, 그것이 왓슨-크릭이 제시했던 B-DNA 구조라는 것을 확인한다.
이렇게 생긴 양반이고, 은퇴하기 전까지 UCLA의 화학과에서 근무했던 양반이다. DNA 이중나선 구조를 ‘제안’ 한 것 말고, 실제로 실험적으로 확인하여 종지부를 찍은 사람이라는 것에 비하면 대중들에게는 참 안 알려졌죠?
하여튼,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B-Form의 DNA 구조가 실험적으로 확인된 것은
- 1980년
- 그것을 수행한 사람들은 Richard E Dickerson 그룹
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왓-클은 그런 구조를 처음 ‘제안’ 한 것이라고 봐야하고. 물론 왓-클의 이중나선 모델 제안의 영향력이 큰 것은 분명하지만, 여기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도 우리 조금은 기억해 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