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여름, 여행이 아니라 ‘살려고’ 처음으로 독일 땅에 발을 디뎠다. 여행으로 왔을 때는 알아 듣지도 못하는 독일어, 베를린의 우중충한 날씨와 더러운 지하철 역까지도 모두 낭만적이고 이국적인 풍경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 나라에 살러 온다니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졌고, 새로운 독일 문화는 마냥 신기한 것이 아닌 걱정거리이자 두려움이 되었다.
독일어로 “통합은 위장을 통해 이뤄진다(Integration geht durch den Magen).”는 속담이 있다. 이는 한국에서 ‘밥 정(情)’이라는 말처럼 먹음으로써 사람들(이민자들)이 사회에 잘 통합된다는 말이다. 웃긴 건 이민자들이 독일 음식을 먹음으로써 독일화되어야 했는데, 오히려 이민자들이 많아지면서 독일 식당은 없어지고 터키 음식, 인도 음식, 중국 음식 등 외국 음식점들만 잔뜩 생겼다. 거꾸로 독일인들이 외국 음식을 먹음으로써 세계화된 新 독일 사회에 적응하게 된 것이다.
나는 새로운 독일 친구들을 한국 문화에 적응시키겠다는 거대한 사명감에 엄마가 한국에서 직접 만들어 준 귀하디 귀한 ‘김치’로 김치찌개와 김치 볶음밥을 만들었다. 독일 친구들이었지만 베트남, 타이 음식에 길들여져 매운 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문제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졌다.
“나 채식주의자인데, 김치에 육류나 어류 안들어가지?”
“그럼 당연하지, 김치는 야채만 있어, 몸에도 엄청 좋다고~”
그런데, 아뿔싸!!! 김치 찌개 한 입을 먹고 친구가
“신기하다, 야채만 넣었다고 했는데, 왜 김치에서 해물 맛이 나지? 진짜 신기하다, 그래도 맛있어.”
라고 하는 것 아닌가!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 김치에 “젓갈”이 들어간다는 것을! 그리고 아무리 소량이라도, 아무리 작은 생선이라도, 젓갈이 한 방울이라도 들어갔으면 채식 음식이 아니라는 걸…. 친구는 이 말을 듣자마자 시무룩한 표정으로 숟가락을 내려 놓고 자기가 싸온 빵과 토마토를 먹기 시작했다.
이 사건은 두고 두고 기억에 남아 지금도 독일하면 ‘맥주’보다 ‘채식’이 더 빨리 떠오른다. 독일은 채식주의자가 정말 많았다. 채식주의자의 종류도 다양했다. 고기만 안 먹는 세미(Semi)나 페스코(Pesco), 고기에 어류도 안 먹는 락토오보(Lacto-Ovo), 치즈나 우유 등 유제품까지 안 먹는 비건(Vegan), 그 중에도 왕 중의 왕은 식물을 해하지 않기 위해 떨어진 과일이나 씨앗만 먹는 프루테리안(Fruitarian).
처음 이사한 집에 룸메이트 2명 중 1명은 유제품은 먹는 락토오보, 나머지 한 명은 생식만 하는 비건이었다. 집에서 고기를 요리할 때마다 돼지의 도살 과정과 지옥 같은 사육 환경을 눈물 흘리며 설교하는 비건 친구 덕분에 독일어 듣기 실력이 급속도로 향상됐으나 결국 8개월을 못 버티고 집을 나왔다. 지금도 독일 친구들을 위해 요리할 때면 채식주의자는 있는지, 비건인지 아닌지 확인부터 한다.
독일 사람들이 채식주의자가 되는 이유는 참 다양하고 그 기원은 포스트 모더니즘, 68혁명, 환경 운동, 웰빙 트렌드 동물권 보호까지 올라간다. 단편적 이유는 환경 보호, 식량 분배 정의, 동물권 보호, 생명 중심 사상, 건강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독일에 부는 채식주의 열풍과 맥을 같이 하는 유행은 바로 바른 먹거리 운동 열풍, 그 중에서도 ‘유기농(Bio)’ , ‘우리 고장 음식(regional) 열풍이다. 독일 슈퍼마켓에 가면 눈에 띄는 점이 항상 초록색으로 장식된 유기농 코너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엄격한 심사를 통과한 신선한 과일과 채소가 진열되어 있다. 유기농만 먹는 유기농족이 있을 정도다. 채식주의자 중에도 유기농족이 많다. 또 유기농 제품만 취급하는 슈퍼마켓이 있을 정도로 그 열풍은 대단하다.
그럼 유럽에서 유기농의 기준은 무엇일까? 천박한 지식의 네티즌이 그렇듯, 위키피디아에서 퍼왔다.
Bio 식료품은 친환경 농업에서 수확된 식료품으로 EU에서 그 의미를 법적으로 정의내렸다. Bio 물품들은 친환경적(oekologisch)인 공간에서 수확되어야 하며, GMO(유전자 변형 생물체)여서는 안되고, 인조 퇴비, 화학 합성 식물 보호 성분 사용이 금지된다.
육,어류 제품은 EU 기준에 따라 자연적 공간(공장형 축산처럼 밀폐되고 비좁은 사육환경)에서 생산되어야 하며, 규칙에 따르면 항생제와 성장 호르몬 사용 역시 불가하다. 이온처리되지 않아야 하며, 보통 식료품에 비해 더 적은 식료품 첨가물을 함유해야 하지만, 5%까지 non- Bio 성분을 함유할 수 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스위스의 유기농 제품 구매 비율이 각각 3.9%, 6%, 3.5%로 월등히 높다. 영국의 경우 1.8%, 남미의 경우 0.5%로 굉장히 미미하다. 독일어권 국가들의 유기농 사랑이 각별한 이유가 따로 있는 걸까?
EU의 꼼꼼한 감독 아래 화학 합성 농약도 쓰지 않고, 항생제도 쓰지 않은 채 재배되고 사육되는 유기농 제품들은 정말로 친환경적이며 건강에도 훨씬 좋을 듯 싶다. 살충제 잔량 검사 결과 비유기농 제품이 유기농 제품의 3-5배 검출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너도 나도 유기농을 사 먹고 싶을 텐데 과연 얼마나 비쌀까? 소비자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대부분 유기농 제품은 비유기농 동일 제품에 비해 30% 비싸다.
하지만 독일 식료품 가격 자체가 워낙 낮기에 가끔은 한국 일반 채소에 비해 독일 유기농 제품이 더 쌀 때도 있다(다만 육류의 경우 거의 2배 정도 비싸다). 한국 유기농 제품이 비유기농 동일 제품에 비해 거의 두 배 가격인 100%임을 고려하면 비교적 저렴하게 유기농 제품을 즐길 수 있다.
아무리 싸다고 해도 저소득층들에게는 20-30% 역시 엄청난 부담으로 다가올 것이다. 저소득층일수록 비만 문제가 심각하고 요즘에는 심지어 고기보다 야채값이 더 비싸다고들 한다. 누가 유기농 제품을 먹고 싶지 않아서 안 먹겠는가? 돈이 없어서 못 먹는 거라는 볼멘 소리가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한국도 마찬가지지만 유럽 다른 국가에서도 닭장에 가둔 닭, 유기농 닭, 야외에 풀어놓은 닭의 달걀을 나눠서 파는 곳은 흔하지 않다. 야외에 풀어놓은 닭에게는 적어도 닭 1마리 당 4제곱미터의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어야 한다.
독일은 아래에서 보듯 닭장 닭이나 야외 닭이나 달걀 가격이 그렇게 차이 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야외 닭 달걀을 먹는 것이 더 좋을 듯 하다. 닭에게도, 나에게도.
이에 몸에도 좋고 환경에도 좋은 유기농, 채식주의 열풍이라지만 유기농과 채식은 부유계층의 전유물, 선진국 국민들만 누리는 사치품이라는 비판도 거세게 일고 있다. 일각에서는 유기농 제품이 다른 제품에 비해 꼭 더 건강하지도 않을 뿐더러, 식량 정의에 반하는 일이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니나 페도로프(Nina Fedoroff) 박사의 주장이 그렇다. 유기농 식품은 합성 비료를 사용하지 않아 비유기농 제품에 비해 2배에 해당하는 면적의 땅을 필요로 하기에 비효율적이며, 지구 인구가 70억명에 달하는 지금 선진국들은 가난한 나라들의 굶주림을 제물로 삼아 유기농 제품을 애용한다고 주장한다. 선진국들은 사료 등 완성된 식재료를 얼마든지 돈으로 구입할 수 있다.
페도로프 박사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유기농, 채식주의, 공정 무역(Fair trade) 제품 열풍에서 느껴지는 공통된 시각이 있다. ‘깨어있는 소비를 하는 나는 무지한 혹은 가난한 너보다 더 낫다.’라는 식의 계몽주의이다.
아래는 독일의 한 유통 체인 프로 플래닛(Pro planet)에서 광고한 벌을 보호하는 등의 친환경 방식으로 재배된 사과다. 이 회사는 공정 무역, 윤리적 소비 제품 또한 권장하고 있다.
하지만 청년이 프로 플래닛 종이 가방에서 꺼낸 사과를 먹는 모습을 보고는 “맞아, 요하네스는 언제나 착한 청년이었지.”라며 순식간에 찡그린 얼굴을 지우고 미소 짓는다(갑자기 바베큐할 때 이로 인해 발생하는 이산화탄소 발생량이 얼마나 되는지, 고기가 몸에 얼마나 안 좋은지 잔소리하던 친한 친구가 생각난다). 프로 플래닛 제품을 이용하는 순간 반항, 비뚤어짐의 이미지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좋은, 착한 청년의 이미지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유기농이 아닌 것, 인스턴트를 먹는 것, 농약을 사용한 과일을 먹는 것은 “나쁜 것, 옳지 않은 것”이라는 암묵적인 메세지를 던지며 프로 플래닛 제품만 사 먹으면 환경도 아끼고, 지구 정의에 헌신하고, 불공적 무역을 없애는 정의의 사도 파워 레인저가 될 수 있다는 최면을 건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열풍이 고소득층의 전유물로 단순히 ‘소비’만을 통해 세상을 바꾸고 개선할 수 있다는 헛된 희망을 심어준다고 비판한다. 소비 그 너머의 사회 구조나 시스템에 근본적이고 비판적 질문을 던지기보다는 오히려 현 시스템에 순응하는 수동적 소비자에 머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소비자들은 채식이 왜 꼭 철학적인 하부구조와 목적, 의식을 동반한 운동이어야 하느냐고 반문한다. 채식과 유기농은 그냥 패션, 유행, 삶의 방식일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이다.
독일에서는 채식 힙스터, 자전거족 힙스터, 베간 힙스터 등 친환경 생태주의 패션이 유행이다. 패션감각이 없기로 유명(?)한, 좋게 말해서 실용성을 중시하는 독일인들의 유행 패션은 쌔끈한 자전거, 자전거 바지, 명품 백이 아닌 면 가방이다.
유기농 제품을 먹고 채식을 함으로써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세상을 구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하고 위험한 생각일 수 있다. 하지만, 일상 행위인 ‘소비’를 통해 작게 나마 환경에 보탬이 되고, 정의와 양심을 위해 한 푼을 더 지불할 용의가 있는 의식적인 소비자가 있다는 걸 알리는 것만으로도 기업들의 행동 변화에 일조하지 않을까 싶다. 유럽 내에 채식, Bio 열풍이 얼마나 긍정적인 변화를 몰고 올 지 기대가 된다.
원문 : MultiKult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