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동성결혼에 반대하던 사람이다. 아내와 미드 ‘러브 바이츠’를 보던 중 게이커플의 프로포즈와 결혼을 다룬 장면이 나오자 ‘저건 좀…’이라며 고개를 돌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우연치 않게 성 소수자들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교회에 다니며 인턴십을 하게 되었고, 덕분에 동성애자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다. 이를 계기로 전엔 관심이 없던 혹은 막연히 나쁘단 선입견을 갖고 있던 동성애에 호기심을 갖고 진지하게 공부했다. 동성애에 관한 미국 여러 교단들의 입장을 접하고 퀴어신학자들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내린 결론은 신학적으로 동성애자들의 권리를 제한하고, 그들을 종교적으로 차별할 어떤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었다. 동성애 반대라는 말 자체도 이상하지만 설령 신학적으로 성 소수자를 차별할 만한 근거가 있다 한들 정교분리를 헌법적 가치로 지키는 나라에선 신학적 이유로 퀴어 퍼레이드를 중지시킬 순 없다.
퀴어 퍼레이드에 극렬히 반대하는 크리스천은 신앙의 언어를 살짝 비틀어 자신의 종교적 혐오를 도덕적으로 포장한다. 즉 “퀴어” 대신 “노출”에 초점을 맞춘다. 그들은 “성서” “하나님”이란 용어를 직접적으로 거론하는 대신 “동성애자들을 차별하지 않지만 퀴어 퍼레이드의 선정성은 문제가 있으므로 반대한다”는 식의 주장을 편다.
2014년 퀴어 퍼레이드에서 길바닥에 누워가며 퀴어 퍼레이드를 훼방놓은 보수 기독교인들의 반대 시위는 매우 극렬했다. 그런데 이런 열정이 비슷한 시기에 행해진 물총축제에선 전혀 보이지 않았다. 선정성을 이유로 퀴어 퍼레이드에 극렬히 반대하던 분들이 비키니와 핫팬츠를 입고 물을 흠뻑 적시는 선정적(?)인 물총축제엔 왜 그리도 조용했던 걸까?
TV를 켜면 아이돌 그룹들이 과도한 노출복장을 하고 나와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춘다. 연말이면 훤히 파인 옷을 입고 레드 카펫을 밟는 연예인들의 모습이 방송을 통해 보도 되기도 한다. 월드컵 거리 응원 때 등장한 노출 패션과 퍼포먼스는 퀴어 퍼레이드 저리가라였다.
이성애자들의 이와 같은 노출에 대해선 왜 그리도 관대할까? 퀴어 퍼레이드가 선정적이라며 열정을 다해 반대하는 사람들은 같은 열정으로 대형 엔터테인먼트 건물 앞에서 같은 열정으로 데모를 해본 적이 있는가?
성 소수자를 차별하는 게 아니라 퇴폐성이 문제라는 지적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습니까?(WWYD)”란 미국 프로그램이 있다. 이 프로그램은 주로 평범한 시민들이 사회적 소수자나 약자를 대하는 방식을 몰래 카메라에 담아낸다. 레스토랑에서 키스를 나누는 동성커플에게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나 몰래 카메라를 찍어봤다. 부정적인 반응을 보인 사람들은 대개 기독교인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묻자 하나같이 “성경엔…”, “하나님께서…” 란 말을 늘어놓았다.
반면 어떤 이들은 “동성커플이라서가 아니라 식당에서 키스하는 게 문제에요. 이성애자도 마찬가지에요.”라고 주장했다. 성 소수자를 비난하거나 차별하는 게 아니라 퀴어 퍼레이드의 퇴폐성이 문제라는 보수 개신교 연합단체 한국교회동성애대책위원회의 주장과 흡사하다. 제작팀은 같은 식당에서 이성커플에게도 동성커플들이 했던 것과 같은 행동을 시켜보았다. 반응은 동성커플들에게 그랬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아울러 특별한 행사에 보여지는 패션엔 대체로 사회 문화적 의미들이 함축되어 있다. 퍼포먼스도 마찬가지다. 퍼포먼스엔 예술을 통한 메시지 전달의 기능이 있다. 퀴어 퍼레이드는 이 둘 모두에 해당된다. 퀴어 퍼레이드는 일상이라기 보단 1년에 한번 있는 특별한 행사이다.
퍼레이드는 퍼포먼스며, 이 날의 패션엔 사회문화적 의미가 녹아 있다. 동물권 운동가들이 도심에서 나체 시위를 한 것을 두고 음란하다거나 선정적이라고만 평한다면 그것은 시위에 담긴 사회문화적 행간을 읽어내지 못한 것이다.
선정적인(?) 옷을 입고 무대에 오르는 가수들이 늘상 그런 패션을 추구하는 것은 아니듯, 퀴어 퍼레이드 참여자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들이 보여주는 특별한 모습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읽지 못하고, 그저 불쾌하다는 비난만으로 일관하는 것은 너무나 단편적으로 사고하는 것이다.
노출에 관한 퀴어 문화 축제의 공식 입장이 페이스북에 올라온 바 있다.
“퀴어문화축제는 사회적으로 차별받는 한국 거주 성 소수자들이 1년에 한 번, 밖으로 나아가 ‘성 소수자인 자신을 긍정하는 행사’ 입니다. 다수의 이성애자의 눈요깃거리나 인정을 받기 위한 행사가 아니라 우리 ‘성 소수자’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기 위한 행사입니다.
여기서 의복은 사회의 틀이나 약속, 혹은 관념을 상징합니다. 또한 노출이란 그 틀에 대한 거부와 저항, 대항의 의미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퀴어 퍼레이드에 등장하는 노출은 성 소수자에 억압적인 사회의 틀을 저항하는, 퍼포먼스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때문에 퀴어문화축제 내 등장하는 노출 퍼포먼스는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노출’의 의미를 생각하기보다 현상 그대로를 바라보고 ‘문란’, ‘노출증 환자’로 연결짓는 것이 안타깝고, 유감입니다.”
퀴어 퍼레이드는 동성애에 불쾌감을 느끼는 이들을 설득하는 행사가 아니다. 동성애 혐오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공간은 퀴어 퍼레이드 행사장이 아니라 학교다. 그저 보이는 퍼포먼스에 열을 올리기 전에 퍼포먼스를 통해 그들이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읽어내는 일 또한 중요하다.
지양해야 할 것은 퍼포먼스가 아니라 그 안에 행간을 읽어내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단편적 사고요, 동성애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다. 퀴어 퍼레이드를 바라보는 이중잣대와 퍼포먼스의 의미에 관심조차 두지 않는 불성실함, 행사 자체에 대한 광적인 거부반응. 이것들은 과연 노출과 선정성에서 기인한 것인가? 아니면 퀴어들의 존재 그 자체를 향한 혐오에서 기인한 것인가?
“노출”이 아니라 “퀴어”가 싫은 거겠지…
원문: Haeman의 Medi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