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The Modern History of Japan, Andrew Gordon, Oxford출판부>을 발췌 번역한 기사입니다.
메이지 시대를 지나며 일본 국내는 크나큰 변화를 겪었다. 철도는 토쿄, 요코하마, 오사카, 코베 등과 같은 주요 항구와 도시 지역을 연결시켰다. 메이지 시대는 또한 일본과 세계와의 관계를 변모시켰다. 19세기말까지 일본은 상대적으로 아시아에서 변경의 위치에서 주요한 장소가 되었다.
일본은 한국에 대한 지배를 추구하게 되었으며 타이완을 식민지로 지배하게 되었다. 서구 열강들과는 전에 맺었던 불평등조약의 개정을 통하여 공식적으로 동등한 관계를 획득했다. 그리고 영국과의 파트너로서의 전략적 위치를 확보한다. 상품과 사람들을 흡수하고 외부에 수출하며 자국민들을 이민 보냈다.
한국에서는 곡물을 수입하고 중국으로 직물을 수출하였으며 노동자와 학생으로서 아시아와 미국으로 사람들을 보내고 받아들였다. 일본 안의 사람들은 넓은 동아시아와 글로벌 시스템의 일부로서 자신들을 통합시켰다.
1870년대와 1880년대 일반의 가장 중요한 해외 활동의 핵심은 한반도였다. 1876년 포함외교를 통하여 한국과 “강화조약”을 맺게 된다. 이는 일본과 교역하는 3개의 항구를 개방시켰으며 일본에 치외법권을 인정하였다. 이 과정과 결과는 20여 년 전 페리제독이 일본에서 추구하였던 것과 거의 다른 점이 없었다.
일본의 상인들은 이 개방의 결과를 경제적으로 이로운 기회로 이용했다. 주로 일본으로 수입된 유럽산 공산품을 다시 한국에 판매하는 방식으로 한국에 대한 수출을 급격히 늘린 것이다. 동시에 상당한 양의 한국산 쌀과 콩을 수입하기 시작했다. 1870년대의 일본은 한국 수출품의 90%가 향하는 곳이었다.
일본정부는 1880년대에 한국과의 친밀한 정치적 관계를 구축하려 하고 있었다. 이는 수백 년간의 조공체계로 맺어진 중국과의 긴밀하고 종속적인 관계를 대신하는 것이어야 했다. 일본의 목적은 한국에 중국과 러시아로부터는 독립되며 한편으로 일본에는 공손한 정권이 수립되게 조장하는 것이었다.
메이지 지도자중 가장 중요한 지정학적 전략가 였던 야마가타 아리토모(Yamagata Arimoto)의 전략적 사고에 의하면 한국은 “이권지역(zone of advantage)”으로서 일본본토의 “주권지역(zone of sovereignty)”를 보호하는 완충지대가 되어야 했다.
이권을 확보하기 위한 근대화
이 이권지역을 확보하기 위한 첫걸음으로서 1881년 일본은 개혁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던 고종에 의해 이루어 지고 있던 근위대의 현대화를 도와주기 위한 군사고문단을 파견한다. 고종과 그의 측근들은 일본에서 진행 중인 현대화 프로젝트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나 완고한 보수주의자들과 외세를 배척하는 세력들의 반대에 직면하고 있었다.
그 후 이어진 수 년 동안 한국에서 일어난 정치적 소요는 한국을 외세의 압력에 매우 취약하게 만들었다. 일본 정부와 정치적 모험가들 그리고 정부와 은밀한 관계를 맺고 있던 폭력단원들은 모두 이러한 기회를 최대한 이용하고자 했다.
1882년 대외세력에 반대하는 세력들은 몇몇 일본 군사고문단을 살해하고 조정의 실권을 잡는다(임오군란). 일본은 새로운 정부에 대하여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일본 외교관을 보호하기 위하여 서울에 군대를 주둔시키는 것을 강요하는 것으로 이 사태에 대응했다.
일본정부와 민간인들은 모두 한국의 개화파(자주,자립을 추구하는)를 계속하여 지원했다. 그런데 한국의 개화파들은 “자주(independence)”란 개념을 일본과는 약간 다르게 해석했다. 그들은 청왕조로 부터의 자립과 더불어 일본을 포함한 다른 열강들로부터의 자립을 원했다. 그러나 또한 일본으로부터의 지원에 관심을 가졌고 지도자들 중 몇몇은 일본으로부터 교육을 받고 자금을 지원받았다. 개화파에 대한 일본의 지원은여전히 중국과의 긴밀한 관계를 받아들이고 있던 보수적인 한국 정부와 대치되는 것이었다.
1884년 개화파 중의 한 명인 김옥균은 일본 공사로 부터의 지원을 비밀리에 약속받고 쿠데타를 일으킨다. 김옥균은 몇 년전 도쿄에 있을 때 후쿠자와 유키치(Fukuzawa Yukichi)로 부터 감화를 받았다. 후쿠자와는 일본의 방식으로 한국의 민족주의와 현대화를 촉진 시키라고 충고했다.
김옥균의 반란 세력은 보수적인 주요 관리들을 암살하고 고종을 손에 넣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청의 2,000명의 군대가 개입하였고 한국의 군중들은 이 사건의 배후세력인 일본에 대해 분개하여 반격에 가담하게 되었다. 그들은 10명의 일본 군사고문관과 30여 명의 일본 거주민을 살해하였다.
일본의 정치단체와 언론들은 격노하여 복수를 부르짖었고 일본과 중국은 거의 전쟁 직전까지 갔었다. 몇몇의 전 자유당 출신 활동주의자들은(Liberal Party activists) 사적인 군사조직을 조직하기까지 했다. 그들은 한국의 “(일본 입장에서 바라본)자주성”을 위하여 바다를 건너 자신들의 군사조직을 보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입장으로서는 피투성이에다가 경제적으로는 재난이었던 사쓰마 반란의 기억이 아직 생생하였고, 주요한 군비증강은 겨우 시작단계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메이지의 지도자들은 그들의 군대가 해외로 가는것을 주저할 수 밖에 없었다.
또한 일본 정부는 민간의 모험주의자들이 통제를 벗어나는 것도 원하지 않았다. 1885년 오사카에서 발생한 사건에서 일본 경찰은 군사조직을 한국으로 원정 보내려 했던 비밀 계획을 좌절시켰다. 민중의 권리를 위한 행동주의자 오이 켄타로(Oi Kentaro), 여성 권리 옹호자 후쿠다 히데코(Hukuda Hideko) 등의 주요 공모자들이 체포되었다. 일본 정부 1885년에 이토히로부미(Ito Hirobumi)와 리홍장(Li Hongzang)간의 협정을 통하여 양 국의 군대를 한국 밖에 배치하며 한국으로 다시 들어갈 경우에는 먼저 통지를 한다는 약속을 한다.
이러한 1881년부터 1885년에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은 다음 25년 동안 일본이 아시아의 식민지를 건설할 때 몇번이고 되풀이 되는 일종의 패턴을 보여준다. 일본의 언론과 정치단체들은 한국의 중국으로부터의 자주성 회복과 아시아의 서구와의 동등한 관계등을 주장하며 범아시아 연대라는 미사여구를 사용하였다.
그들의 아시아의 결속 이라는 비젼은 일본이 군사적 주도권자이자 교사로서 주도하는 것이었다. 일본정부는 겉으로는 이런 목소리를 제지했지만 동시에 그 자신도 더욱 조심스럽게 같은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기에 이러한 여론들과 인연을 끊지도 않았다.
한국은 중요한 지역인 동시에 일본의 군사력, 외교력, 그리고 민간인 애국자들이 중국, 러시아, 영국(한반도에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던) 그리고 – 당연히 – 한국인들과 대항해야하는 장소였다. 한국인들은 일본, 러시아 그리고 다른 서구 열강들과 함께 중국도 거부하는 힘찬 민족자결주의를 발전시켜 나갔다.
일본이 확장하는 타이밍을 설명해 줄 수 있는 주요한 요인중의 하나는 국내의 질서를 유지하고 제국의 길로나아가는 도구로서의 지속적인 군비확장 이었다. 1880년대와 1890년대 초반 일본 정부는 해군과 육군의 증강을 위한 상당한 양의 자금을 제공했다. 더 나아가 야마가타(Yamagata)는 군사 지휘체제를 통합하여 대중들과 의회로 부터의 영향을 가능한 차단하였다.
독일을 모델로 참조하여 그는 오직 천황에게만 직접적인 책임을 지는 엘리트 장교 훈련소와 참모본부를 설립하였다. 이러한 군의 체계는 야전 사량관이 수상으로부터 뿐 만 아니라 심지어 육군, 해군 장관으로 부터 상당한 독립성을 가지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잠시 동안 이었지만 야마가타의 정책을 따르는 자들은 상대적으로 군사적 행동을 주의 깊게 자제했다. 그들은 무모한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강경외교론자들에 반대하였다. 그들은 오직 유리한 상황에서만 일본 국외에서 군사력을 사용했다. 결국 장기적으로는 외부의 제약 조건이 없어지자 군부 자신이 무모한 도박에 뛰어들게 될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와 리홍장의 조약 이후 일본 정부는 거의 10여 년간 한국에서 저자세를 유지했다. 중국은 한국의 군대와 통신망을 개혁하는 프로젝트에 대한 고문단을 한국 조정에 상주시켰다. 또한 러시아의 외교관들도 한국 조정에 대한 영향력을 점차 증대 시켰다. 몇몇 한국의 위정자들은 러시아를 과도한 중국의 영향력에 균형을 잡아줄 대상으로 기대했다.
이는 영국이 한국 해안의 작은 섬(거문도)을 점유하게 만들었다. 영국은 1887년 물러나기 까지 러시아가 한국의 영토 주권을 존중한다는 것을 보증하기를 요구했다. 미국또한 한국에 영향을 주기위한 경쟁대열에 참가했다. 1886년 부터 1890년대 까지 몇몇의 미국인들은 외교문제에 대한 조언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외세가 사방에서 몰려와 압력을 가하는 상황에서 한국의 지도자들은 독립과 숨쉴수 있는 공간을 찾기위하여절망적으로 노력하였으나, 이는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1890년대 초반 경제적 궁핍함과 외세의 강압에 대하여 오랬동안 부글부글 끓었던 농민들의 분노가 대대적으로 분출했다. 동학운동은 1894년 한국에서의 중국과 일본과의 전쟁에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동학은 일종의 종교운동으로서 지지자들은 그들의 곤경을 한국의 위정자들과 외세 – 특히 일본을 지목했지만 중국도 거부하였다. – 의 탓으로 생각했다. 1894년 봄까지 반역은 주요 지방 도시와 방대한 지역을 장악하기 에 이르렀고 결국 한국 정부는 중국에게 이 반역을 진압하기 위한 군대를 파병하도록 요청했다.
중국 군대의 진출은 일본 정부가 고대해왔던 호기를 제공하였고 청일전쟁(1894~95)이 발발하게 되었다. 일본의 군비증강은 이제 중국과 대등한 수준의 해군력을 지니는 결실을 맺고 있었다. 야마가타 아리모토와 일본의 정상급 지도자들은 드디어 한국에서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는 때가 왔다고 결론지었다.
“일본인 거주자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아래 8,000 여명의 군대를 한국에 파견하고 중국에는 한국의 내정문제를 운영하는데 대한 동등한 발언권을 요구하였다. 중국은 거부하였고, 이에 일본은 한국의 왕실을 7월에 장악하고 한국조정이 중국에 선전포고를 하도록 강요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다.
물론 이 전쟁은 사실상 중국과 일본과의 전쟁이었고 1895년 4월까지 일본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다. 일본의 항구인 시모노세키에서 진행된 평화회담에서 일본은 한국을 훨씬 벗어나는 영토 이권에의 그들의 야망을 명백히 드러내었다. 타이완과 근처의 섬들, 요동반도(Liaodong pennisula) 그리고 남만주에서의 철도 부설권을 획득한 것이다.
물론 종이에 서명한 것만으로 된것은 아니지만 대만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일본은 자신들의 첫 식민지 점령에 격렬히 저항하는 대만인들을 진압하기 위하여 60,000 여명의 육군을 파견하였고, 이 중 4,600 여명이 전사 혹은 병사했다. 남부 만주 철도는 만주지방에서의 일본의 영향력 확장의 기반이 되었다. 그러나 1895년의 삼국간섭에서 러시아는 프랑스, 독일 외교관과 협력하여 일본이 요동반도를 반환하도록 강요했다.
청일 전쟁의 결과는 세계와 일본에 강렬한 충격을 주었다. 서구 열강들은 중국이 우세할 것으로 예상했었다. 서구인들의 눈에는 일본이 비서구권 지역에서의 현대화의 본보기로서 엄청나게 커진 위세를 등에업고 전쟁의 포연에서 걸어나온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일본이 급격하게 세계 열강으로서의 지위로 격상된 것에 대한 전형적인 경탄의 본보기 중의 하나가 런던의 Times지가 1895년 4월에 인용한 Charles Beresford 경의 감탄이다.
“일본은 불과 40 여년 만에 영국이 800 여년 그리고 로마가 600 여년 걸린 수많은 국가운영의 단계를 통과했다. 나는 일본에게 어떠한 불가능한 일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꺼려진다.”
일본 국내에서 전쟁은 넘쳐나는 국가적 자긍심을 불러일으켰다. 정부는 전에는 논란거리였던 예산 문제를 이제는 압도적인 국회의 지지를 받으며 통과시켰다. 언론은 중국인들을 “전쟁터에서 아낙네들의 옷으로 갈아입고 도망쳤다” 며 일제히 경멸하는 합창을 하였고 문명세계의 편에서 싸운 이번 전쟁에서의 일본의 정당성을 찬양하였다. 이러한 국가통합의 효과는 일본 정부에게 결코 잊지 못할 교훈이 되었다.
전쟁의 결과는 정치적 측면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엄청난 이득을 가져다 주었다. 평화조약의 일부로서 일본은 3억 6천만 엔 이라는 엄청난 배상금을 중국으로 부터 획득하였다. 이는 전쟁 직전 일본정부 예산의 약 4배 반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이 상금의 대부분(3억엔)은 군비지출에 사용되었고, 나머지 작은 부분이 큐슈의 야하타에 있는 현대적인 국영 제철소에 투자되었다.
간접적인 경제 효과 또한 엄청난 것이었다. 군수물자 조달은 무기 제조와 같은 산업을 촉진시켰다. 그리고 배상금으로 인하여 예산의 압박에서 해당된 정부는 상당한 양의 보조금을 해운업과 조선업에 제공하게된다.
1890년대 일본 정부는 오랫동안 추구해 왔던 서구 열강과의 불평등조약의 개정을 성취한다. 1880년대의 실패로 끝난 서구열강과의 새로운 협정을 맺기위한 협상이후, 다시 1890~94년에 걸쳐 새로운 협상이 시작되게 된다. 청일전쟁 발발 불과 2주전인 1894년 7월, 일본과 영국은 새로운 조약에 서명했다. 이 조약은 1899년까지 치외법권을 완전히 폐지한다는 내용을 명문화했다. 또한 즉각적이진 않았지만 관세주권도 일본에 돌려주기로 한다. (단서 조항으로 1911년 까지는 대부분의 수입품에 대하여 관세를 15%를 초과하지 못하게 함).
1880년대에 새로운 협정을 시도할 때는 외국의 재판관들이 일본 법정에 상주하는 과도기 단계가 포함되 있었지만 1890년대의 협상에는 이러한 것도 필요없었고 다른 열강들도 유사한 새로운 조약에 따라서 서명을 하게 된다.
그당시 일본은 헌법이 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정부에 있어서 대중의 새로운 조약에 대한 지지가 더욱 중요했다. 비록 헌법이 천황에게 조약을 맺을 권한을 주고 있었지만, 또한 의회에도 “정부에 대하여 법 또는 다른 주제에 대하여 반대”할 권리를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조약 개정은 의회의 분열을 일으켜 법안이나 예산안 등의 통과가 수월하지 않게 될 수 있었다.
결과론적으로 청일전쟁을 배경으로 하여 여론이나 정치 단체들은 진심으로 새로운 조약을 환영했다. 단, 주목할 만한 한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예전의 조약은 서양인 들에게 특권을 제공한 대신에 그들의 거주지를 특정 장소로 제한하고 있었다. 외국인들은 다른 장소에서 일본인들과 같이 살거나 재산권을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치외법권이 폐지되는 대가로 일본은 1899년에 이러한 제약들을 폐지하며 이는 구속을 받지 않는 서구의 물질주의와 남녀평등 등의 해로운 사상이 일본에 해독을 끼치지 않을까 하는 우려를 야기한다.
이러한 히스테리적 반응은 곧 가라앉았다. 새로운 조약과 외국인들의 자유로은 거주는 사고없이 순조롭게 실행되었다. 비록 자본주의와 페미니즘이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지만(전자가 더욱 큰 영향) 걱정한 것처럼 일본을 타락시키지는 않았다. 메이지 시대부터 시작된 일본 대중과 정부의 생각은 새로운 세기에 서구의 제도와 과학기술을 힘의 근원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서구열강은 위협적인 존재이기도 했다.
1895년 러시아, 프랑스 그리고 독일의 삼국간섭으로 결국 요동반도를 중국에 반환하게되자 이러한 관점은 더욱 확대되었다. 유명한 져널리스트 였던 토구토미 소호(Tokutomi Soho)는 “요동반도를 포기한 사건은 그 이후 내 인생을 내내 지배했다. 그 소식을 들은 후 나는 정신적으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그것은 우리가 충분히 강하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었다. 우리가 강하지 않을 때 진실, 정의와 같은 단어는 전혀 해당사항이 없는 것이다. 일본의 진보는 궁극적으로 군사적 힘에 달려있다.”라고 그 당시를 회상했다.
이러한 관점에도 불구하고 또다른 국제적 정세는 새로운 세기에 번영과 국력의 신장이 평화로운 방법으로도 이루어 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일본의 해외무역은 청일전쟁을 전후하여 급격히 늘어났다. 1880년 부터 1913년 동안 수출입 물량은 대략 8배가 늘어났으며, 대략적으로 10년간 2배씩 늘어났다. 이는 동일기간 전 세계의 평균 증가율을 2배정도 상회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로 수출입 금액은 1885년 국가총생산의 5%를 차지하던 것이 제일차세계대전 전까지는 15%로 늘어났다. 일본은 원자재와 정밀 기계를 수입하고 공산품-특히 직물-을 수출하는 방식으로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해외이민은 일본 경제 성장에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였다. 1880년대 일본의 기업가들과 작가들은 해외이민을 가난하고 곤경에 처한 일본인들이 자신의 삶을 향상시키고 또한 그들의 수입을 가정에 송금함으로써 국가를 부유하게 할 수 있는 수단으로 통찰하고 있었다. 1890년에는 불과 하와이에는 5,000 여명 캘리포니아에는 1,000 여명 그리고 한국과 중국에도 그 정도 수준의 일본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다음 20여년간 강력한 정부의 권장정책에 의하여 해외이민은 급격히 증가하게 된다. 1907년에는 하와이에 65,000 명 그리고 미국 대륙에 60,000 여명의 일본인들이 있었다. 대부분 농장노동자로서 일했던 이민자들이 송금하는 봉급은 그 기간 일본의 총 외화획득의 3%를 차지했다.
그 당시의 몇몇의 저명한 일본인들은 이러한 평화적인 이민과 국제교역이 무력을 통한 식민지확대 정책의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본인 언론인, 지성인 그리고 정부관료들은 이러한 평화적 수단을 군사적 힘에 바탕을 둔 식민지 제국의 확대에 부수적으로 동행하는 것으로 여겼을 뿐, 결코 대안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원문: Or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