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병욱 사건’을 통해 드러난 한국교회의 일베스러움
최근 몇 년간 사회에서 물의를 일으켜온 ‘일베 현상’을 보면서 낯익은 기시감을 느꼈다. 일베들은 왜곡된 성(性) 의식으로 여성을 비하하고, 사회적 약자나 소수자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고 그들을 조롱하며, 오직 체제수호의 극우적 논리를 이용해 비뚤어진 강자의 시각으로만 세상을 바라본다. 내가 지난 몇 년간 생생하게 봐온 한국 기독교인들의 보편적 모습이었다.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가 터졌다. 나는 또 한 번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세월호 참사를 대하는 대다수 기독교인의 태도에서 ‘전병욱 목사’ 면직운동을 하면서 봐왔던 낯익은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목격하고 확인했기 때문이다.
아마 나도 내 신앙에 커다란 균열과 혼돈을 가져온 이 사건을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지 않았더라면, 대다수 기독교인들과 같이 강자의 논리로 다수의 이익을 위해 소수의 피해자는 조용하고 잠잠하라고 외쳤을지 모른다.
부끄럽게도 나는 마흔이 다 되어갈 때까지, 직장생활 충실히 하고 교회 일만 헌신하면 ‘신앙인으로서 올바르고 균형 잡힌 삶’을 사는 것으로 생각했다. 교회 밖의 세상 돌아가는 소식은 ‘세상 일’이라는 단어로 간단히 무시하며, 세상 일을 무시하는 신앙이 더 경건한 신앙이라고 여겼다.
내 주변의 사랑하는 후배들이 충격적 성범죄의 피해자들이었고, 내가 존경하고 따랐던 목사가 가해자였다는 잔인한 현실을 마주하지 않았다면, 난 아마 계속 그렇게 ‘경건한 신앙인’으로 살았을 것이다.
혼돈 속, 상식이 기적이 되는 교회
2010년 가을 처음 사건이 불거졌을 때 ‘삼일교회 당회’는 우왕좌왕했고, 온갖 소문들은 떠돌았다. 전병욱 목사는 급작스럽게 사임하였다. 삼일교회의 가장 구심점에 있는 중요한 지도자가 불미스런 소식에 갑자기 사임했는데도 게시판에 올라온 전 목사의 사임을 알리는 글에는 고작 ‘교회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한 사실이 있어’ 사임한다는 표현이 다였다. 교회 측에서도 역시 아무런 공식적인 발표도 없이 새로운 담임목회자를 뽑는다며 2년이란 시간이 흘러갔다. 교회에서 오랫동안 ‘진실’을 공식적으로 이야기하지 않는 모습은 충격이었다. 게다가 대다수 교인들의 태도는 ‘위에 있는 분들이 알아서 할 테니 우린 침묵하고 기도하며 기다리자’는 분위기가 주를 이루었다.
2년의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 교회 내부에서는 피해자들을 ‘이단’이나 ‘꽃뱀’으로 매도하는 루머들이 끊임없이 양산되었다. 피해자들이 누구누구라고 구체적인 이름까지 거명되며 간사나 리더, 교인들에게까지 소문이 확산되어갔다. 보다 못한 교인 중 일부가 모여 대책을 논의하고 기도하며 여러 가지 사실관계를 알아본 후 교회게시판에 글을 썼다. 교인들 67명 명의로 전병욱 목사 사건의 사임 이유인 성범죄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전별금의 액수와 내용, 전별금을 주게 된 경위와 과정 등을 구체적으로 밝혀달라는 ‘공동요청문’이 그것이었다.
‘공동요청문’은 수백 건의 댓글이 달리며, 상당한 호응을 얻었다. 언론의 주목도 받게 되었으며 전병욱 목사의 성범죄가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계기가 됐다. 당회는 교인들의 공동요청문에 반응하여 ‘제직회’를 열었고, 사임의 직접적인 사유가 된 전병욱 목사의 구체적인 성범죄를 밝히며 13억 4천 5백만 원이라는 거금을 전별금으로 준 사실을 밝혔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삼일교회 교인들은 성범죄를 일으킨 전병욱 목사에 대해 징계와 치리의 책임이 있는 예장합동교단 총회에 직접 가서 면직청원을 접수하기도 하고 기자회견도 했다.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교단 차원의 적절한 치리와 권징을 요구했지만, 예장합동교단과 삼일교회 소속노회인 평양노회는 온갖 구실과 절차를 핑계 대며 삼일교회 교인들과 당회의 수차례의 면직청원을 거듭 반려하고 외면했다.
그렇게 지지부진하게 4년을 끌었던 상황은 2014년 평양노회에서 드디어 ‘전병욱 목사 재판’이 결정되면서 실마리가 풀리는 듯했다. 어렵사리 마련한 평양노회 재판국에는 피해를 입은 피해자가 직접 나와서 증언을 하기도 했다. 피해자의 증언 당시 그 통곡소리가 다른 방에까지 들릴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피해자들의 통곡 어린 증언에도 불구하고 석연찮은 이유로 ‘재판국’은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해체되었고, 평양노회는 두 개로 분립되며 삼일교회와 전병욱 목사는 서로 다른 노회로 갈라졌다. 이에 삼일교회에서는 다시 총회에 전병욱 목사의 면직을 요구하며 상소했지만 총회는 타 노회에 소속된 목사의 성범죄를 다루는 것은 법리적으로 맞지 않다며 상소를 두 번이나 반려했다.
※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는 것이 ‘왜 전병욱 목사를 사법처리하지 않는가?’이다. 2013년 6월 19일 ‘친고죄 폐지’가 되기 전까지는 성폭력과 관련한 고소는 피해자가 직접 고소를 해야 하는 친고죄였고, 공소시효가 사건발생 이후 1년이었다.
전병욱에게 피해를 당한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믿고 신뢰했던 목사에게 끔찍한 피해를 당한 충격에 당황하고 고심하다가 공소시효를 놓친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현재는 교단법으로 ‘전병욱에 대한 목사 면직’만이 현실적으로 가장 강력한 징계다.
게다가 홍대새교회(전병욱 목사) 측은 면직운동을 꾸준히 주도해온 인터넷 카페 <전병욱 목사 진실을 밝힙니다> 운영자 이진오 목사를 비롯, 삼일교회 신자, 장로, 네티즌들 17명을 무더기 고소했다. 그것도 전병욱 목사 본인의 명의가 아니라 홍대새교회 부목사, 교인, 전 목사의 매제 등의 명의로 진행한 고소였다.
나는 몇 년 동안 면직운동을 해오며, 이런 모든 현상의 이면에는 일반사회 수준보다도 현격하게 떨어지는 교회의 성 평등 의식, 충격적이리만치 왜곡된 신앙이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공감 능력을 상실한 기독교인들
면직운동을 해오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요한복음 8:7)는 성경구절이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맥락’을 벗어나 엉뚱한 해석을 하며 피해자를 위로하기는커녕 가해자를 옹호했다. 가해자의 회개와 피해자의 회복을 돕는 정당한 성경적 권징과 치리의 개념을 모르는 이들이 너무 많았다. 이런 성경 오독과 잘못된 적용은 한결같이 ‘가해자의 편을 드는’ 경향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한 영혼의 아픔과 상처에 주목하기보다 맹목적인 ‘집단수호’ 의지만 불태우며 “교회를 흔들지 마라” “잠잠하라” “네가 희생하고 교회를 떠나라”는 망언과 언어폭력을 무수히 목격했다. ‘피해자’들을 ‘교회를 흔들고 미혹하는 세력’으로 치부하며, ‘꽃뱀’이라거나 ‘이단’에서 파송되어 우리 교회를 흔들려는 목적으로 ‘전문적으로 유혹’하는 ‘사탄의 하수인’으로 매도하였다. 심지어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바로잡으려는 교인들조차 ‘교회를 흔드는 세력’이자 ‘불온한 세력’이라는 비난을 목회자들과 교인들로부터 받기도 했다.
전병욱 목사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교회는 오직 교회가 흔들리거나 시끄럽지 않기만을 바라고, 교인들은 자신의 평온한 신앙의 안위만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고, 권징과 치리의 책임이 있는 교단 목회자들 역시 자기의 기득권이 흔들리지 않기만을 바라는 이기적인 반응들만 차고 넘쳤다. 사태의 본질과 진실은 희석되어갔다.
심지어 현재 평양노회 임원 중 한 명의 아들은 전병욱 목사의 성범죄 문제가 한창 불거진 2012년에 홍대새교회로 부임했다. 게다가 총회 상소가 반려된 상황에서 예장합동교단 총회장인 백남선 목사는 “전 목사 사건이 계속 논란이 되는 건 한국교회에 덕이 되지 않는 일이고 누워서 침 뱉는 꼴이다. 좋은 일이면 몰라도 안 좋은 일은 빨리빨리 덮고 지나가야 한다”는 말까지 했다. 피해자들의 아픔과 공교회의 거룩함을 지키는 권징과 치리는 안중에도 없이 그저 빨리 덮는 것만이 급선무라는 식의 무책임한 발언을 한 것이다.
성범죄 사건은 그 무엇보다 ‘피해자’들의 입장과 시각에서 다루어야 한다. 피해자의 인권이 가장 우선해야 하며 그들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한 지속적인 관심과 돌봄이 필요하다. 더구나 상습적인 성범죄를 저지른 가해자의 경우 다시는 유사범죄가 발생하지 않도록 일정 기간의 격리적 징계와 함께 회복적 정의의 차원에서 치유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그러나 면직운동을 하면서 알게 된 충격적인 사실은 한국교회에서 이와 유사한 성범죄가 발생했을 경우, 조용히 사임하거나 사건 자체를 덮는 경우는 많아도 교단 측의 정당한 권징과 치리가 이루어져 면직이나 징계가 있었던 사례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피해자들 역시 개인의 문제로 방치되어 교회 측으로부터 아무런 돌봄이나 치유를 받지 못하고 도리어 꽃뱀이나 이단 등으로 매도되어 2차, 3차 피해를 당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여기에는 여성만을 ‘성적인 유혹의 주체이자 원인’으로만 바라보는 교회 안의 왜곡되고 편향된 성 의식도 한몫했다.
사건이 불거진 지 4년이 넘어가고 있다. 삼일교회 앞에서 전병욱 목사 사건의 실체를 다룬 책 <숨바꼭질>을 몇 주에 걸쳐 팔았지만, 최근에도 “그 여자들이 이단 아니었어?” 하고 묻는 교인들이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기 가족이 당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공감하고 관심 갖기보다, ‘내 일이 아니니까’ 하는 태도로 일관한다. ‘교회체제 수호’의 시각에서만 사건을 본다. ‘내 안온한 신앙’에 균열이 나지 않도록 온 신경을 집중한다. 이런 기독교인들을 너무나 많이 보게 되면서 자연히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번영과 축복의 복음 뒤에 숨은 그늘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이 사라진 교인들이 양산된 배경에는 한국교회에서 무분별하게 울려 퍼지는 ‘번영과 축복의 복음’의 영향이 크다. ‘오중복음과 삼중축복’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잘되는 나’ 등의 단어로 대표되는 번영과 축복의 복음은 철저히 ‘나’에게만 집중할 것을 요청한다. 물론 하나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단계에서 ‘자존감’이 회복되고 ‘나에 대한 그분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가치 있는 일이지만 한국교회에서 선포되는 복음은 ‘거기까지만’ 그친다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는 오직 ‘우리 교회 부흥’의 교회 일에만 에너지를 쏟는다.
이상하리만치 한국교회는, 규모가 작은 개척교회든 규모가 거대한 대형교회든 ‘자기축복의 복음’을 벗어나지 않는다. 한국교회 강단에서 선포되는 복음은 모두가 번영과 축복의 약속으로 잘되는 ‘나’를 꿈꿀 뿐 ‘고통 받는 이웃’을 향한 사랑과 관심의 단계로 넘어가지 않는다.
하나님이 ‘나만을 사랑하는 단계’에서 한 치의 성장도 못한 ‘유아기적 사랑’에 머물러 있는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세상 또한 그렇게 유치한 수준으로 단순화하여 보기를 좋아한다.
‘자기가 몸담은 교회는 천국’ ‘교회일은 가치 있는 것, 세상일은 무가치한 것’ ‘세상은 경건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 악하고 속된 것들의 집합’… 이런 시각으로 자기가 사는 세상과 교회를 양분화해 단순하게 왜곡해서 보기 때문에 ‘교회를 시끄럽게 하거나 흔드는 것’으로 추정되는 일에는 ‘무관심’과 ‘침묵’으로 대응하는 게 최고의 미덕이다. 빨리 덮고 넘어가는 것만이 상책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런 교인들의 이원론적인 사고방식 뒤에는 ‘세속적 성공’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생각하며 그것만을 간절히 원하는 욕망이 숨겨져 있다.
맹목적인 강자숭배의 신앙
전병욱 목사가 사임한 이후 채 2년도 안 되어 개척한 ‘홍대새교회’로 따라가는 교인들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사람들이 많다. 나 역시 그들이 ‘전 목사 성범죄’의 실체를 모르거나 순진해서 따라가는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관련 기사와 지인들을 통해 알게 된 것은 그들 중 상당수가 이미 사건의 실체를 정확하게 아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병욱 목사가 완전히 회개했다고 믿으며, 여전히 그의 설교가 매력적이어서” 교회를 다닌다. 전병욱 목사의 피해자들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가 일절 없었고, 지금까지 그의 행보를 보면 진실한 회개 여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다 알면서도 그들은 맹목적으로 전병욱 목사를 추종하고 따른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이런 맹목적인 추종을 하게 만든 것일까?
그것은 전병욱 목사가 소위 ‘성공한 목회자’로 ‘대단한 부흥’을 이끌었던 경험이 있으며, 그들의 세속적 성공의 욕망을 자극하며 동기부여 하는 데 능한 설교가이기 때문이다. 홍대새교회 교인들은 ‘양적 부흥’을 ‘하나님의 임재와 축복’으로 생각하며, 목회자의 도덕성에 흠이 있든 없든, ‘내 귀에 듣기 좋은 설교’를 하는 그 중독성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심지어 전병욱 목사를 대신해 면직운동하는 사람들을 고소한 홍대새교회 부목사와 교인들의 논리 역시 동일한 가치관을 담고 있다. 그들은 고소장에서<숨바꼭질>이나 언론에 보도된 피해자들의 증언은 전부 거짓이며, “삼일교회가 교인 숫자가 줄어드니 우리 목사님을 비방하려는 목적으로” 면직운동을 하고 있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성범죄 사건의 진실 여부도 ‘교인을 뺏기지 않으려는 밥그릇 싸움’으로 바라본다.
전병욱 목사는 한때 청년들에게 ‘쉽고 귀에 들리는’ 설교를 잘한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그 이면에는 기독교의 신앙원리를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청년들의 성공 열망을 자극해 세속적 성공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포장해, 복음을 값싸게 전락시키는 부작용도 컸다. 심지어 그는 “늙은 여자는 야한 옷을 입어야 시집을 갈 수 있다”는 등 약자와 여성들을 비하하고 웃음거리로 조롱하는 설교를 즐겼다. 약한 것들을 노골적으로 싫어하며 약자와 여성에 대해 언어폭력에 가까운 말들을 강단에서 거침없이 내뱉던 그는 책 제목에 유독 ‘파워’라는 말을 붙이기를 즐겨했다. <파워 로마서>, <파워 전도서>, <파워 인생>, <파워 크리스천> 등. 명목상으로는 믿음의 야성을 잃어버려 패배주의에 젖은 청년들을 깨워 강력한 신앙인의 삶을 살도록 독려하는 것 같지만, 그의 ‘파워 숭배’ 신앙관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단서였다.
그는 ‘강력한’ 힘과 성공을 추구했고, 그를 다시 강단으로 불러낸 홍대새교회 교인들 또한 그 ‘강력한’ 힘과 성공을 열망했다. 자기의 욕망을 채워주는 데 그의 성범죄쯤은 ‘내 가족이 피해자만 아니라면’ 눈감아 줄 수 있다. 이는 맹목적인 ‘강자숭배의 신앙’이다. ‘강자숭배의 신앙’과 ‘타인을 향한 공감 능력 결핍’은 일베의 특징 아닌가.
잃어버린 성육신의 신앙을 회복할 때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 4:13, 새번역) 이 구절은 흔히 나에게 ‘무한능력’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쯤으로 해석되어 개신교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경구절 중 하나다. 그러나 빌립보서 4장의 본문을 맥락에 따라 주의 깊게 읽어보면 그 참뜻이 금방 드러난다.
“내가 궁핍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 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굶주리거나, 풍족하거나, 궁핍하거나,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습니다.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나의 고난에 동참한 것은 잘 한 일입니다.”(빌립보서 4:11~14, 새번역)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라는 사도 바울의 고백은 자기계발서에서 말하는 ‘I CAN DO IT!’의 ‘무한능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족하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고생스럽더라도 낮은 곳을 향해 내려가는 ‘낮아지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다.
강하고 거대한 힘과 재물에 대한 욕망을 신앙으로 포장해서 합리화해온 한국 기독교는 이제 ‘개독교’라는 이름으로 ‘일베’와 다를 바 없는 사회적 재앙이 되어버렸다. 우리는 어느새 죄인들을 사랑하셔서 친히 이 땅으로 내려오신 예수의 ‘하강의 은혜’를 잃어버리고 도리어 그 예수를 이용하여 저 높고 높은 곳으로 ‘상승하려다가’ 교회다움과 기독교인의 본질을 모두 잃어버렸다.
다시 낮은 곳에 임하신 예수의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 이제는 “누구든지 하나님만 믿으면 부와 권력과 축복을 거머쥘 수 있다”는 ‘파워 복음’의 선포를 막아야 한다. 성육신하신 예수의 사랑을 기억하며 이 사회의 그늘과 불의와 억압이 있는 낮은 곳으로 가서 이웃들을 향한 조건 없는 사랑을 펼치기 시작할 때, 한국교회는 잃어버린 본질을 회복하게 될 것이다.
※현재 4년을 끌어온 전병욱 목사를 면직해달라는 삼일교회측의 두차례에 걸친 총회 상소조차 ‘예장합동총회’의 끈질긴 외면으로 또 기각된 상황입니다. <관련기사> 이에, 예장합동총회의 상습적 성범죄 목사를 비호하고 묵인하는 행태를 더 이상 두고볼 수 없다고 뜻을 같이 한, 범교단 목회자 1000여명의 서명이 적힌 서명서와 호소문을 예장합동총회에 전달하고 합동측 교단신문에 광고를 할 예정입니다. 서명을 위한 홈페이지를 공유합니다. 현재까지 600여명의 목사님들이 서명해주셨습니다. 이 글을 읽는 목사님들중 뜻을 같이하고 싶은 분들께서는 함께 서명에 동참을 부탁드립니다.
장로교 합동총회에 드리는 호소문-범교단 목회자 1천명 서명 페이지
※ 이글은 ‘복음과 상황’ 6월호 커버스토리 ‘일베와 한국교회’에도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