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전 이전
태평양에서 주간에 항공기의 존재는 너무나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미 해군의 거의 모든 수상함 전투는 야간에 벌어졌다. 사실 전쟁 이전 미국 순양함-구축함들의 ‘야간 탐색 및 공격’ 전술은 동시대 일본의 개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1931년을 전후해서 미 해군은 그들의 수상함이 어뢰를 발사할 수 있을 정도의 근거리까지 적 함정에 접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예상을 근거로 중순양함에서 어뢰 무장을 제거하기로 결정한다. 이러한 전투는 결국 난전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미 해군은 구축함에서 제공되는 조명을 활용한 포격전에 집중하고자 했다.
야간 전술의 발전을 위한 공식 연구는 1932년 시작되어 1937년경에는 꽤 정교한 수준으로 발전했다. 그 결과로 미 순양함들은 주포를 사용하는 야간 포격전을 연습하기 시작했다. 이에 반해 1926년 이후 미 전함들의 야간 포격연습은 구축함을 격퇴하기 위한 부포 사격훈련에 국한되었다. 개전 이전 상당한 수준의 연습에도 불구하고 개선의 여지는 많이 남아있었다.
전간기의 전술은 적 함대의 진영을 탐색하기 위해 구축함 집단을 활용했다. 구축함들은 아군 순양함이 장거리 포격으로 적 함대 경계망의 외곽을 파괴할 수 있도록 조명을 제공할 것이었다. 그 후 구축함들은 외곽의 돌파구 사이로 파고들어 적 주력함을 공격할 것이었다.
조명탄은 이런 전술에 이상적인 것으로 간주하였는데, 조명탄은 서치라이트에 비해 조명을 제공하는 함선의 위치를 쉽게 노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조명탄은 효과적인 표적획득에 충분한 조명을 제공했다. 1938년 5인치 조명탄의 사정거리는 12,000 야드였다. 구축함의 위치를 효과적으로 작전 테이블 위에 작도할 수 있다고 가정하면, 순양함은 상당히 장거리의 표적과 교전할 수 있었다.
충분한 조명 아래 포격의 테크닉 자체는 협차(straddle)를 활용하는 주간 사격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명탄의 사용에도 불구하고, 탄착으로 발생하는 물보라(splash)는 관측하기 어려웠다. 전간기 연습에서 통상적인 명중률은 8~11%로 주간의 성적을 크게 밑돌았다.
따라서 효과를 높이기 위해 미 해군은 포격의 밀도를 강조하게 되었다. 전쟁이전 미 해군은 약협(cartridge case)을 사용해서 분당 10발의 발사속도를 낼 수 있는 6인치 47구경장 포가 이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1930년대 후반 브루클린급 순양함은 마치 기관총처럼 분당 150발을 사격할 수 있었다. 약포로 된 장약을 사용하여 분당 2~3발의 발사속도밖에 낼 수 없었던 기존 중순양함들은 이와 필적할 수 있는 화력을 발휘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실전 경험
이러한 개전 이전의 개념들은 실제 야간 전투와는 거의 관련이 없었다. 아마도 전간기 사상의 가장 중요한 유산은 순양함들이 야간에 그들의 포를 사용하도록 훈련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순양함들은 적 어뢰의 사정거리 밖에 위치할 것으로 기대되었다. 불행하게도 1943년 까지 미 해군은 일본이 개발한 93식 산소어뢰 – Long Lance –에 대해서 거의 아무런 정보도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리고 이 어뢰의 사정거리는 순양함 주포의 그것과 견줄 수 있을 정도였다.
미 순양함들은 포격 통제 및 피아식별(야간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에 가장 효과적인 전열(battle-line) 대형을 채택했다. 그러나 전열에서 발사되는 포의 섬광은 일본 해군이 다수 목표에 대해 어뢰의 일제사격을 할 수 있는 충분한 정보를 제공했다. 게다가 일본 해군은 일정한 진로와 속도의 유지를 요구하는 포술과 달리, 주로 파이어 앤 포겟(fire-and-forget)이 가능한 어뢰에 주로 의존하고 있었다. 이는 미 해군이 93식 어뢰가 도달하기 이전 일본 해군 함정을 격파할 수 있는 확률을 크게 감소시켰다.
개전 이전 그리고 전쟁 초기의 훈련에서, 전장 상황파악은 기함의 작도(plot)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유효한 작도를 전제로 함대 지휘관은 휘하 함정들에게 기동과 사격에 대한 명령을 내릴 수 있었다. 이론적으로 단종진(line-ahead formation)은 여러 문제들을 단순화했다. 왜냐하면 지휘관은 자동적으로 자기 휘하의 함정들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대략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자동 작도기는 이 프로세스에 필수적이었다. 작도기는 개별 함정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추적하여 상대적 위치를 보고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전쟁 초반 포격시의 충격으로 DRT(Dead-Reckoning Tracker)의 작도가 튀어버리는 버그가 발생한다는 것이 발견되었다. 각 개별 함정들은 전체적인 작도의 정보를 유지할 수 없었고 기함의 지휘에 의존해야 했다. 1942년 11월 12-13일 벌어진 과달카날의 야간해전은 개전 이전 시스템의 최악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기함인 샌프란시스코는 수상 탐색 레이다를 보유하고 있지 못했다. 따라서 작도는 레이다를 보유한 헤레나가 색적하고 보고한 정보에 의존하고 있었다. 일본 해군은 3열 종대로 접근하여 더욱 혼란을 가중시켰다. 이 대열은 레이다 스코프에는 명확히 보였을 지 모르나, 기함에서 작성되는 작도상에는 그렇지 못했다.
전장 상황파악 기능을 기함에 집중했기 때문에 다른 함정들의 반응은 느리고 둔할 수밖에 없었다. 이 체계는 혼란스러운 전술 상황에서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급격히 변하는 전술 상황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주고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이 체계는 개전 이전 순양함과 구축함의 편제가 고정되고 수년간 같이 훈련을 했을 때는 어느 정도 작동했다. 각 함의 지휘관들은 서로 어떤 상황에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대한 상호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불행히도 전시의 요구는 편제를 이리저리 나누어 개편했고, 그 결과로 전투는 빠르게 변하는 야간전투에 어떻게 상호 대응해야 하는 지 알 지 못하는 지휘관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전통적으로 해군은 자율적 판단 아래 전투를 수행하는 것을 선호했다. 이는 각 함의 지휘관들이 전술적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야전의 특수한 환경은 이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중앙의 유일한 지휘관이 전반적인 전술상황을 파악하는 것에 책임을 지고, 자신이 파악한 상황에 근거해 명령을 내리게 되었다. 이러한 중앙집중식 지휘체계는 위험요소를 내포하고 있었다. 중앙의 지휘관은 분산된 함정들로부터의 보고에 의존했다.
그가 의존해야 하는 전장의 상황은 취합에 시간이 소요되었으며, 각 함이 언제나 정확하게 보고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오류에 노출되어 있었다. 기함에서 파악된 상황에 따라 내려지는 명령은 현실과 부합하지 않을 수 있었다. 전투 행동이 빨라질수록 그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따라서 전술은 전장상황 파악을 위한 지휘관의 부담을 경감시키는 쪽으로 설계되었다. 이것이 바로 단종진(line-ahead formation)을 야간 전투의 기본 대형으로 선택한 이유이다. 종대의 좌우 어느 쪽 방향에 있는 물체는 적으로 간주될 수 있었고, 지휘관의 승인 이전에 교전에 돌입할 수 있었다.
과달카날의 야전은 개전 이전 설계된 중앙 지휘 체계의 한계를 드러냈다. 함대 중 단 한 척, 순양함 헤레나(기함이 아님) 만 이 효과적인 수상 탐색 레이다를 보유하고 있었고, 스콧 제독은 기함 샌프란시스코에서 지휘하고 있었다. 개전 이전의 방식에 따라 제독은 그의 기함이 작성한 작도에 근거해 전술적 의사결정을 내렸다. 이 경우 가장 효과적인 센서는 헤레나에 있었다. 그리고 제독이 헤레나로부터 수신하는 정보는 때때로 정확하지도, 일관성이 있지도 않았다. 심지의 헤레나의 정보가 완벽하게 전달 되었다고 할 지라도, 다른 함정의 레이다를 전술 상황 인지를 위한 주 센서로 사용하는 것은 급격히 변하는 상황에 대해서 용납할 수 없는 지연을 초래했다.
CIC(Combat Information Center, 전투 정보 센터)
이러한 상황은 모든 함정들이 효과적인 수상 탐색 레이다 뿐 만 아니라, CIC(전투 정보 센터)를 갖추게 되자 급격히 변화했다. 효과적인 작도기가 제공하는 충분한 전장상황 파악으로 인해 각 함들은 야간에도 상당한 자율성을 가지고 작전에 임할 수 있게 되었다. CIC 도입 이전에는 각 함들이 야간에 함대 전체의 집단적인 기동을 작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른 함정들로부터 그들의 위치와 관측결과에 대한 충분한 정보를 수신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CIC에 정보를 입력하는 레이다가 이제 이 일을 대부분 분담했다. 이제 작도팀은 레이다가 제공하는 연속적인 정보를 통해 다수의 아군과 적함의 위치를 추적했다. 함선끼리의 통신은 최소한의 필요만으로 감소되었다. 전술은 따라서 훨씬 유동적으로 변했다. 그 주된 원인 중 하나는 각 함정이 더욱 자율적으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었고, 다른 하나는 관측과 의사결정을 내리는 주기가 극적으로 단축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치라이트와 달리 수상 탐색 레이다는 각 함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표적을 탐지할 수 있었다. 따라서 레이다와 CIC를 사용하는 수상전력은 발포 이전까지 기습의 요소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CIC를 장비한 전력이 유연한 전술을 사용할 수 있는 잠재능력은 1943년에도 잘 실현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미 해군의 전술은 일본 93식 산소어뢰의 제원을 충분히 이해하기 전에는 성공이 보장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42년 11월 30일 타사파롱가 해전에서 미 순양함의 전열은 일본의 구축함을 장거리에서 사격하면서 고속으로 돌입했고, 그들의 포구 섬광은 위치를 노출시켰다. 일본의 장거리 어뢰는 매우 이상적인 야전용 무기였는데, 어뢰라는 무기 체계의 특성 상 정확한 거리 제원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척의 미 순양함이 명중되었고, 그 중 미네아폴리스에는 두 발이 명중, 노댐프턴은 격침되었다.
93식 어뢰의 심각성은 8개월 후에도 여전히 인지되지 못했고, 유사한 전술은 1943년 7월 5-6일 야간의 쿨라 만(Kula Gulf) 해전에서 경순양함 헤레나의 손실로 이어졌다. 93식 어뢰의 성능 제원을 설명한 공식 정보 문서는 1944년 3월에서야 배포되었다.
레이다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미 해군 병기국(BuOrd)는 첫 제품(대공용)이 시연되자마자 지대한 관심을 표시했다. 최초의 중요한 포술용 세트는 Mk3 레이다였고, 대형 함정을 거리 15,000~30,000 야드에서 탐지할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한 문제점 중 하나는 고속으로 이동하는 목표가 레이다 스코프에서 사라지는 것이었다. 이는 뇌격을 위해 고속으로 접근했다가 급반전한 일본 구축함들이 격침된 것으로 잘못 보고된 원인이기도 했다. 레이다 영상이 탄착점의 물보라로 가려졌기 때문에 레이다 오퍼레이터는 이런 급반전을 추적할 수 없었고, 심지어 진짜 목표에서 물보라로 레이다의 지향점을 변경하기도 했다.
1943년 중반 이전, 속사가 가능한 6인치 순양함들은 그들의 포격으로 발생하는 거의 연속적인 물보라는 목표와 구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연속적인 고속 사격에서 기인하는 문제였다. 따라서 1943년 배포된 미 순양함 포술 매뉴얼은 탄착 구분이 수월한 일제사격(salvo)을 선호하는 쪽으로 변경되었다.
전함 워싱턴이 1942년 11월 14-15일 야간에 일본 전함 키리시마와 교전했을 때, 워싱턴은 레이다로 정확한 거리를 획득할 수 있었지만, 레이다는 전열을 구축하는데 있어서는 제한적으로 도움이 됬을 뿐이다. 전투는 전함 워싱턴(기함)과 사우스다코다가 각각 거리 18,500야드, 16,700야드의 레이다로 획득된 표적과 교전을 개시하면서 시작되었다. 표적은 진짜였지만 탄착점의 물보라로 인해 때때로 사라지는 것처럼 보였고, 따라서 그들은 격침된 것으로 잘못 간주되었다.
두 전함이 일본의 주 전열에 접근할 때 사우스다코다의 전기회로는 단절되었고, 이로 인해 레이다와 사격 통제 시스템은 불능이 되었다. 사우스다코다는 기함 워싱턴 레이더의 사각지대에 위치하고 있어서 상황파악 능력마저 상실했다. 워싱턴의 승무원들은 자신들의 사격이 사우스다코다에 명중될까봐 우려했다. 사우스다코다는 키리시마에 거리 5,000야드 까지 접근했으며, 14인치 이하의 포탄 42발의 명중으로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동함은 전함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으나, 주요 방어구획은 관통되지 않았다.
사우스다코다를 명중시키기 위해 조명을 사용하다가, 일본 함대는 워싱턴에게 자신의 수상 탐색 레이다에 나타난 대형 영상이 그들의 전함이라는 사실을 노출시켰다. 워싱턴은 레이다로 오분간 키리시마를 추적했다. 포격 제원 산출을 위해 충분한 데이터를 얻자마자 워싱턴은 즉각 발포했으며, 첫 번째 또는 두 번째 일제사격(salvo)부터 명중탄을 획득할 수 있었다. 사격은 표적이 격침되었다는 잘못된 보고로 1분 30초간 중지되었다가 다시 재개되었다. 워싱턴은 총 75발의 주포탄을 발사했으며 그 중 9발이 명중했다. 사격은 거리 8,450야드에서 시작되었으며, 사격은 포탐 중 어느 하나라도 사격준비가 완료되면 즉시 이루어졌다. 주포의 평균적인 문당 발사속도는 분당 1.3발 이었다. 키리시마는 불타오른 채 반전하여 전장을 이탈하려 했으나, 이후 침몰되었다.
일본의 어뢰와 포격은 4척의 미 구축함 중 3척을 격침시켰으며, 네 번째 구축함에 손상을 입혔다. 사우스다코다는 자신에게 뇌격을 시도하던 일본 구축함들 중 한 척을 격침시켰다. 일본 함대는 화력 통제를 위해 서치라이트에 과도하게 의존했고, 이는 미 함대의 조준점이 되었다. 일본 함대는 연막으로 스크린을 만들기도 하였으나, 이는 물론 레이다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레이다는 워싱턴에게 커다란 이점을 제공했다. 전투 보고서에서 미 해군은 레이다의 독점을 전제로 ‘우리의 화력관제와 사격의 효율성은 기대 이상이었으며, 앞으로 야전을 회피하기 보다는 적극적으로 교전의 기회를 활용해야 한다’라고 기술했다. 그러나 레이다는 표적까지의 거리와 탄착점의 물보라가 얼마나 표적에서 떨어져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할 수 있었으나, 아직 레이다의 빔은 포격의 사각 오차를 산출하기에는 너무 넓었다.
1943년 다음 세대의 S-band Mk8 레이다가 도입되자 이 문제도 해결되었다. 이 레이더는 더 좁은 빔을 사용해 빠르게 탐색할 수 있었고, B-Scan은 표적과 탄착점의 물보라를거리와 사각의 조정이 가능할 정도의 충분한 해상도로 보여줄 수 있었다. 표적이 정확하게 표시될 수 있었기 때문에, 화력관제 시스템은 목표를 고정한 체 탄착점의 물보라를 탐색할 수 있었다. 이렇게 목표 추적과 탄착점 관측의 동시 수행이 가능해지다, 레이다는 비로소 측거의와 각종 광확장비를 완전히 대체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제 완전한 맹목사격 시스템이 갖추어진 것이다.
수리가오 해전
신형과 구형 시스템의 대비는 1944년 10월 24-25일 밤 스리가오 해협 전투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과달카날 인근 해전의 특징이었던 야전에서의 혼란은 사라졌다. 일본 함대는 두 척의 전함, 한 척의 중순양함, 여섯 척의 구축함으로 구성되었다. 이에 대해 미 해군은 레이테 만 상륙을 지원하기 위한 전력이었던 전함과 순양함들에 이를 지원하는 구축함들과 PT보트들로 접근하는 일본 함대를 맞이했다. 미 해군의 6척의 전함은 3개 전대에 소속되어 있었다; 제2전대(캘리포니아, 테네시, 펜실베니아), 제3전대(미시시피), 제4전대(웨스트버지니아, 메릴랜드). 이들 전함을 통해 전쟁초기와 전쟁후기 시스템의 비교가 가능한데, 왜냐하면 이 전함들에 탑재된 시스템은 초기 화력 관제 레이다(Mk3), 그리고 완전히 현대화된 시스템(Mk8 레이더)로 구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 제4전대의 지휘관은 이 전투가 신형 화력관제 시스템과 효과적인 CIC의 이점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전투라고 기술했다. Mk8 레이더를 사용하여 웨스트버지니아는 두 개의 거대한 표적을 거리 42,000야드부터 추적할 수 있었다. 추적을 통해 획득된 데이터는 매우 좋아서 동 함은 거리 22,800야드에서 발포를 시작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동함은 약 10분간 철갑탄 98발을 사격했으며, 모든 일제 사격은 협차했다. 그리고 1차, 2차, 6차 일제 사격에서 사격의 효과로 보이는 화염을 관측할 수 있었다. 웨스트버지니아와 유사한 시스템을 탑재한 캘리포니아와 테네시의 교전도 성공적이었으며, 각각 63발, 69발을 발사했다.
상대적으로 구형인 Mk3 레이더를 탑재한 전함들의 성과는 이에 미치지 못햇다. 메릴랜드는 거리 22,000야드까지 식별 가능한 표적을 획득하지 못했다. 동함의 레이다에서 일본 함대는 22,000야드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것처럼 보였는데, 이는 그때 일본 함정들이 횡전해서 더 큰 레이다 이미지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동 함은 6분 동안 철갑탄 48발을 발사했으며, 2차, 4차 일제 사격에서 명중탄을 획득한 것으로 추정된다. 미시시피는 적 함대를 거리 43,000야드에서 탐지할 수 있었으나, 동함의 레이다는 일본 함대 각 함의 상대적 크기를 분별해 낼 수 없었다. 미시시피는 거리 19,000야드에서 한 번의 일제사격만을 했을 뿐이다. 펜실베니아는 인근의 섬으로 인해 발생하는 레이더 전파의 반사로 인해 목표를 추적하지 못했다. 동함의 CIC는 적함과 뇌격을 위해 전열을 벗어난 아군 구축함을 혼동하기도 하였다. 결론적으로 펜실베니아는 주포 사격을 실시할 수 없었다.
전체적으로 포격은 14분 동안 실시되었으며, 일본 함대의 주력은 그들의 전함과 함께 전멸했다. 비록 미 순양함 몇몇은 협차 되었으나, 일본 함대는 포격을 실시한 미 함정 중 어떤 것에도 피해를 주지 못했다.
결론
레이다는 정보를 수집하는 장비이다. 이 레이다의 위력을 최대한 발휘하기 위해서는 레이다를 사용해서 정보를 수집하고, 이 수집된 정보를 활용하여 전투를 수행하는 시스템의 구축이 전투를 원활 하게 수행하기 위해서 필요했다. 이렇듯 미 해군 야간 수상전투 능력의 진화는 효과적인 수상 탐색 레이다의 개발 뿐 만이 아니라, 전장의 대량의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분석하여 빠르게 의사결정을 내릴 수 있는 CIC(전투 정보 센터)의 발달로 인해 가능했던 것이다.
원문: Orca
[참고문헌]
Norman Freidman (2008), “NAVAL FIREPOWER”, pp. 208-224
학습연구사 편집부 (2005), “오키나와 결전”, PP. 122-125
학습연구사 편집부 (2006), “태평양전쟁 해전 전사”, PP. 89, 17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