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1.
많은 경우, 야구 팬이 된다는 것은 곧 좋아하는 야구 팀이나 감독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슷한 의미에서, 밀리터리 취향을 가진다는 것은 대체로 좋아하는 팀(군사조직)과 감독(지휘관) 등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도 된다. 야구의 강팀들이 많은 팬들을 몰고 다니는 것은 밀리터리 팬들에게도 적용된다.
이 바닥에서 명문 팀은 대개 세계 최강인 미군이나 화려한 전적을 가진 독일군이고, 그네들의 무기나 작전은 야구팀의 명승부만큼이나 화제가 된다. 적어도 이런 점에서 야구 팬질과 밀리터리 팬질은 완벽하게 똑같은 것이다.
나는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밀리터리 팬이지만, 이러한 흐름에서 조금 비껴나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일단 현대전이 아닌 전근대전을 좋아하기 때문에[1], 현재 있는 팀 중에서 좋아하는 팀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팀은 영국군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면, 내 지인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이들이 중세 때부터 존재한 거의 유일한 군사조직[2]인 탓이다. 비슷하긴 하지만, 정확하지는 않다. 내가 이들을 좋아하는 것에는 약간 더 깊은 이유가 있다. 오늘은 이 이야기를 좀 해보려 한다.
2.
영국군의 부대 편제를 살펴본 사람들은 뭔가 특이하다는 인상을 자주 받는다. 부대 이름만 봐서는 이게 현대 군조직이 맞나 싶기 때문이다.[3] “노스 샤이어 요먼 부대(Northshire Yeomanry)” “왕립 스코틀랜드 기병연대(Royal Scots Dragoon Guards)” 같은 고색 창연한 이름이 즐비한 데다다가 왕궁 경비를 전담하는 근위대도 있다.[4]
편제만 그런 것도 아니다. 18세기 총사들이나 달았을 듯한 깃털 장식을 군모에 붙이고 다니는가 하면 백파이프같은 원시적인 악기를 군악대에 정규 편성하기까지 한다. 이 정도면, “영국은 전통의 나라라더니, 과연 오래 된 것을 함부로 바꾸지 않는구나” 하는 말이 절로 나오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한 꺼풀 벗겨 보면 전혀 다른 진실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서, 중세 초기 유럽의 군대는 전쟁이 터질 때마다 봉건 계약에 묶인 영주와 기사들을 일일이 소집해서 구성해야 했다. 이래 가지고서는 병력 동원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돈으로 고용한 프로 군대로 진화하게 되었는데, 이걸 가장 먼저 시작한 곳이 바로 영국군의 전신 중 하나인 잉글랜드 왕국군이었다.
잉글랜드 왕국군은 기존의 노르망디 공국군이 잉글랜드를 정복하면서 성립했는데, 기존 잉글랜드의 봉건 군대가 전투력에서나 충성심에서나 영 뒤떨어진 반면 노르망디 공국 내에서는 숙련된 프로 전사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전통”을 제일 먼저 벗어던지다니,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껴지시는가? 하지만 이런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예를 들어서, 지금은 4주 훈련받는 신병도 실탄을 가지고 사격 훈련을 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하지만 19세기만 해도 이건 당연한 것이 아니었다. 실탄은 하나하나가 돈이고, 공업 생산력이 낮은 시대에는 큰 부담이었기 때문이다.
이걸 처음으로 표준으로 만든 것도 영국군이다. 실탄 사격 훈련을 반복함으로써 전투력을 크게 증대시킬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뿐만이 아니다. 현대에는 당연시되는 위장 군복[5], 탱크, 철제 전함, 공군, 특수부대… 이 모든 것이 영국군의 작품이다. ‘최초’가 아니라 ‘두 번째로 도입해서 현재의 모습으로 정립시킨 것’까지 포함하면 이 목록은 훨씬 더 늘어난다. 과장 좀 해서, 전쟁의 역사는 곧 영국군이 적극적으로 오래 된 것을 걷어차 온 역사인 것이다.
3.
흔히 ‘전통’이라는 말에는 ‘변하지 않았다.’ ‘오래 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해석이 따라붙는다. 하지만 이 말에는 교묘한 점이 있다. 세상 모든 것은 변하기 마련이고, 전투 시스템을 포함한 모든 것 또한 여기에 맞춰 적응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기존의 것만을 고집하다가는 도태되기 십상이다.
그런 점에서 전통이라는 말의 진짜 의미는 ‘변하지 않았다’가 아니다. ‘흔히 주목하는 부분을 제외한 부분이 완벽하게 적응하고 변화함으로써 변했다는 인상조차 주지 않는 데 성공한 것’에 가깝다. 예를 들어, 영국군의 기병연대는 수백 년된 이름과 군기를 아직도 사용하기 때문에 오랜 세월에도 변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이는 적절한 시기에 기존의 군마를 ‘현대의 기계 말’인 탱크로 바꾸었기 때문에 가능했다[6]. 진정으로 큰 것은 눈에 안 보이고 진정으로 큰 소리는 귀에 안 들리듯이[7], 진정 완벽한 변화는 변했다는 인상조차 주지 않는다.
밀리터리 팬들 사이에서 떠도는 농담 중에 이런 게 있다: “부자 미군. 천재 독일군. 그리고 모범생 영국군.” 영국군에게 하필 모범생이라는 별명이 붙은 데는 이유가 있다. 별로 화려한 이야깃거리도 없는 데다가 꽉 막힌 꽁생원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이다. 적을 얕보다가 대차게 작전을 말아먹거나[8] 독일군같은 막강한 상대에게 신나게 두들겨맞는 경우도 흔하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차분하고 끈질기게 상대를 물고 늘어져서 결국 승리를 얻어낸다.
비결은 간단하다: 기존의 실수를 분석하고, 새로운 것들을 실험하고, 남들의 장점을 눈여겨 관찰하고, 여기서 얻은 결론을 기존의 시스템에 적용시키고… 이 모든 것들을 천 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꼼꼼히, 그리고 부지런히 반복하는 것이다.[9] 그런 점에서 모범생이라는 칭호는 비하나 야유가 아니다. 오히려 영국군의 이 위대한 고지식스러움에 바치는 찬사와도 같은 것이다. 영국군에서 진정 변하지 않은 것은 눈에 보이는 부대 명칭이나 군기가 아니라, 눈에 안 보이는 견고한 적응력이다.
4.
경영대 수업을 듣다가 배운 개념 중 ‘핵심 역량(competency)’이라는 것이 있었다. 나는 한동안 이걸 잊고 지내다가 최근 즐겨 가는 블로그에 실린 서평을 읽고 나서 이 개념을 다시 떠올리게 됐다. 사실, 매년 관련 연구 기관에서 발표되는 각국의 군사력이라는 것은 대체로 회계 장부에 나타난 자산 목록(resources)과 그리 다르지 않다.
“항공모함 몇 대, 전투기 몇 대, 탱크 몇 대, 지상군 몇 명…” 하지만 나는 그런 눈에 보이는 자산보다 훨씬 중요한 것이 있다고 믿는다. 자산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역량이 사라지는 순간 그 조직은 끝이다. 조직은 곧 역량이다. 진정으로 강한 조직은 자산이 많은 조직이 아니라 남이 흉내낼 수 없는, 강한 역량을 지닌 조직이다.
대영 제국이라는 화려한 시절이 무색하게도, 영국은 본래 그리 부유한 나라가 못 됐다. 하지만 그 시절에도 잉글랜드의 기사들은 십자군 원정에서도 막강한 전투력을 뽐냈고, 허름한 활로 무장한 궁수들은 이웃 프랑스의 화려한 기사들과 맞서면서도 백 년이 넘게 잘 싸웠다.
조잡한 군함으로 이루어진 잉글랜드 해군은 당시 세계 최강이던 스페인 해군을 잿더미로 만들었고, 영국군의 또다른 전신인 스코틀랜드군 역시 그런 잉글랜드를 상대로 무서운 근성을 보이며 밀리지 않았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견고하고 치밀한 사람들, 그 오랜 시간동안 한결같은 역량(competency)을 보여 온 이들 – 내가 이 팀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5.
그렇다면 이 ‘역량’ 계발에 가장 성공한 곳은 어디일까? 이걸 설명하려면 내가 사랑하는 또다른 팀, 독일군 이야기를 해야 한다. 아마 멀지 않은 시일 내에 다룰 기회가 있을 듯하다. 🙂
원문 : Gorekun.log
- 훈련소 다녀오기 전까지는 총 구분은 둘째치고 잡을 줄도 몰랐으니 더 설명이 필요한지? (…) ↩
- 1707년 연합 왕국의 출범과 함께 성립한 영국군은 이전까지 존재했던 중세 잉글랜드·스코틀랜드 군의 후신이다. 내가 좋아하는 독일군 역시 중세 3대 기사단 중 하나인 튜튼 기사단의 후신이지만, 2차대전 패전 후 해체·재건된 독일군에 반해 영국군은 계속 지휘체계를 유지하고 있다. ↩
- 사실 현대 군조직의 편성이나 계급 체계 자체가 중세 유럽의 군대에서 비롯되긴 했지만… 이 이야기는 나중에 따로 하겠다. ↩
-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사격 경기가 열린 웰링턴 병영이 바로 근위사단 주둔지다! ↩
- 현재와 같은 위장무늬를 발명한 것은 독일군이지만, 주변 환경과 비슷한 카키색 군복을 착용함으로써 위장효과를 얻을 수 있음을 깨닫고 제식장비로 채택한것은 영국군이 최초다. ↩
- 기병들이 전장의 주역으로서 마지막으로 활약한 것은 1차대전 때이지만, 2차대전이 시작될 무렵만 해도 아직 상당한 수의 기병들이 기계화가 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앞에서 설명한 왕립 스코틀랜드 기병연대는 당시 팔레스티나에 주둔하고 있었고 결국 영국군에서 마지막으로 기계화된 기병연대가 됐다(1941). 그러고도 차량이 다니기 힘든 남부 러시아의 경우 여전히 기병들이 칼을 들고 정찰을 하거나 적 후방을 교란하며 돌아다녔다. ↩
- 큰 소리는 들리지 않고(大音希聲), 큰 형상은 형태가 없다(大象無形). <노자[老子]>제 41장. ↩
- 사실 영국군의 삽질 사례는 그 역사만큼이나 무지하게 많다. 특히 1차대전 당시의 갈리폴리 전투는 영국군 사상 최악의 흑역사 중 하나로 이름이 높다. ↩
- 써 놓고 보니까 하나도 안 간단하다(…). 저 짓을 천 년동안 한다는 건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