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4월 29일 홍코우 공원 막전막후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는 일종의 노철광과 같다. 땅을 팔 필요도 없이 관심만 두고 찾는다면 광맥이 널려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방대한 역사의 광산 위에 시멘트가 덕지덕지 덮여 있어서 우리 발 밑에 어떤 역사들이 묻혀 있는지 모르고 살아가는 게 사실이다. 당신이 아는 독립운동가를 전부 대 보라고 할 때 열 명을 넘길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래도 그 질문에 절대로 빠지지 않을 사람이 몇 있다. 그 중의 하나가 윤봉길이다.
1932년 4월 29일 그가 상해 홍코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 천황의 생일이라는 천장절 기념식장을 도시락 폭탄과 물병 폭탄으로 쑥밭으로 만들어 버린 이야기는 초등학교 애들도 주워 섬기는 일인지라 구태여 다시 상세히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윤봉길은 그 폭탄 한 방으로 역사를 바꾸었다. 윤봉길은 안중근과 달리 고향도 충청도고 해서 최소한 남한에서는 그 기념사업이 가장 잘 되어 있는 인물 중의 하나이며 그 사람됨과 일화도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오늘은 그분보다는 홍코우 막전 막후의 일들을 좀 돌아보고 싶다.
우선 홍코우 공원에 일본군 대장 시라카와를 비롯하여 일본 군대가 잔뜩 몰려와 있었던 것은 1차 상하이 사변에 기인한다. 1932년 1월 28일 일본군은 상하이를 공격하는데 그 이유는 중국인들과 상해 거주 일본인들의 충돌로 말미암은 무력 충돌이었다.
그런데 이 충돌 전에 또 한 사건이 자리잡고 있다. 그건 1월 8일 일어난 이봉창의 의거였다. 이봉창은 천황을 향해 폭탄을 던졌으나 폭탄의 질이 나빠 실패했다. 이걸 중국 신문이 “한인(韓人) 이봉창의 폭탄이 적중하지 않았다.(未中)”고 기사를 쓰자 일본 군부가 격노했던 것이다. 원래 한 사건의 원인은 대개 중첩되게 마련이다.
중국군은 처음에는 잘 싸웠으나 무력에서 우세한 일본군에 밀려 후퇴하고 마는데 정전협정이 맺어지기 전 일본군은 히로히토 천황의 생일을 맞는다. 이름하여 천장절. 그들은 이를 기념한 열병식과 더불어 상하이 전승 기념식을 홍코우 공원에서 연다. 1부 열병식이 끝나자 거기에는 단상(壇上)이든 단하이든 거의 일본인들만 남았다. 세상에서 가장 만들기 쉬운 국기인 일장기를 흔들던 일본인들 사이에는 잘생긴 청년 하나가 물통과 도시락을 매만지고 있었다. 윤봉길이었다.
도시락 폭탄의 나비효과
그 도시락과 물병을 가져온 사람은 왕웅이라는 가명으로 중국군에 복무중이던 김홍일이었다. 그는 이봉창의 실패가 폭탄의 성능 때문이라는 말에 절치부심 중국인 향차도 (백범일지에는 왕백수라고도 한다)와 함께 폭탄을 제조했는데 사실 성공 가능성은 반반이었다. 한 번의 실험에서 폭탄이 터지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 국가가 거의 끝날 즈음 윤봉길은 앞으로 내달았다. 그때까지 부동자세로 서 있던 우에다 일본군 9사단장이 갑자기 움직였다.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낀 것이다. 그러나 윤봉길의 폭탄은 용서가 없었다. 단상은 쑥밭으로 변한다.
소식을 듣고 만세를 불렀을 김홍일. 그는 우리 역사에 ‘오성장군’으로 기록된다. 중국군에서 계속 복무하여 별 두 개를 달았고 이후 한국군에 복무하면서 별 셋을 추가했다. 윤봉길의 의거에 결정적인 공훈을 세움으로써 장개석으로 하여금 한국의 독립운동 진영의 역량을 재평가하도록 했던 김홍일은 대한민국이라는 신생국가가 살아남는 데에도 지대한 공헌을 세운 사람이다. 지리멸렬의 방어전 끝에 서울을 3일만에 빼앗긴 후 패잔병들을 그러모아 한강 방어선을 치고 6일을 버텨 낸 사람이 그였다. (3일을 버티지 못하면 미군측은 상륙조차 못한다고 경고했었다)
“김홍일 소장이 자기 책임 아래 부서진 군대를 재편성하고 있었다. 내가 만난 중 가장 멋있는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인 김 장군은 미소로 그어지는 잔주름과 반백의 머리칼로 인해 어디서나 눈에 띠었다.” (해롤드 노블, Embassy at War)
한편 윤봉길의 폭탄을 맞아 죽은 사람은 두 명이다. 우선 시라카와 시게노리 일본군 중국 주둔군 사령관이 죽었다. 그 자리의 최고 지휘관이었으니 윤봉길의 폭탄은 제대로 임자를 찾아들어간 셈이다. 그리고 일본 거류민단장이 죽었다. 중상자는 많았다. 그 가운데 두 명을 들어 보자. 일본 3함대 사령관이자 해군 중장이었던 노무라 기치사부로는 파편에 한쪽 눈을 잃었다. 이 노무라는 후일 외교관으로 변신하는데 일본이 파멸로 치닫게 되는 결정적 계기, 즉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는 진주만 기습 당시 미국 주재 일본 대사였다.
흔히 일본군이 비겁하게 선전포고 없이 진주만을 기습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건 아니었다. 일본은 진주만 기습 전에 선전포고를 전달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복잡한 암호를 번역하고 외교 문서로 다듬는 가운데 그만 진주만 공격은 행해지고 말았다. 미국은 루스벨트가 분노에 차서 말한 바 “Day in infamy” 측 치욕의 날을 선전포고 없이 맞았고 노무라 기치사부로는 악당의 사도가 되어 뒤늦은 선전포고를 전달한다.
이 선전포고장을 들이민 후 돌아나오는 그 앞에서 무수한 플래쉬가 터졌다. 아마도 남은 한쪽 눈을 질끈 감고 싶었겠지만 그래도 외교관으로서 그는 웃음을 띄운다. 부드럽고 온유하게. 하지만 이미 그 웃음은 왜놈(Japs)의 비열한 미소에 불과했다. 윤봉길에 의해 한쪽 눈을 날린 노무라는 그렇게 일본의 파멸의 문을 열어젖히는 역할을 담당한다.
전쟁이 끝났다. 히로히토 천황이 “참을 수 없는 일을 참아야 한다”며 무조건 항복을 발표한 뒤 일본 제국의 정식 항복 조인이 미국 군함 미주리 호 (스티븐 시걸이 주연한 오락 영화 언더 시즈를 기억하시는지? 그 무대가 바로 미주리 호다) 선상에서 이루어진다. 기록 영화를 보면 절뚝거리는 다리로 지팡이를 짚은 항복 사절의 대표가 등장한다. 그 이름이 시게미쓰 마모루. 윤봉길의 의거 당시 중국 주재 외교관이었다. 그는 윤봉길의 폭탄에 왼쪽 다리를 잃은 사람이었다. 그는 당시 일본의 외무 대신이었고 거만하게 도열한 미군 장교들 앞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한다. 일본 제국의 몰락의 상징이었다.
윤봉길의 의거는 시라카와 대장을 죽이고 가와바타 일본 상해 거류민단장을 죽인 사건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과 전력과 후일이 담긴 사건이었고 우연의 일치 같지만 결국 그 폭탄을 만든 사람은 신생 대한민국을 지키는 데 공을 세웠고 그 폭탄 맛을 본 사람들이 태평양 전쟁을 열고 닫는 역할을 한다. 우연같지만 우연이 아니다. 역사는 레고도 아니고 퍼즐도 아니다. 분리되어 있는 것 같지만 결국은 유기체처럼 이어지고 우연같은 필연을 이끌어 낸다. 1932년 4월 29일은 그래서 쉽사리 잊혀지는 날이 아니다.
원문: 산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