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5월1일 일본군 위안부 훈 할머니 완전 귀국
네덜란드 사람 하멜이 제주도에 표착한지 얼마 후 하멜 앞에는 뜻밖의 인물이 나타난다. 조선 옷을 입었지만 눈 파랗고 수염 노란 서양 사람이었다. 또 하나 하멜 일행이 기절초풍했던 것은 그가 더듬더듬 네덜란드 말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역시 화란 사람으로 하멜과 비슷한 경로로 조선에 표류한 화란 선원 벨테브레였다.
원래 표착한 외국인의 경우 교분이 있는 나라인 경우 바로 송환하고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를 경우는 명나라로 보내는 것이 관례였지만 벨테브레 일행이 표착한 건 정묘호란이 일어난 1627년. 중국 대륙의 정세가 매우 혼미할 때였다. 조선 조정은 일본과도 접촉을 해 보지만 일본 역시 뜨뜻미지근하게 나오자 그냥 송환을 포기해 버린다.
벨테브레 일행은 조선 사람으로 살아야 했다. 벨테브레의 동료 두 명은 병자호란 때 전사했다. 그리고 26년 뒤 하멜 일행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는 네덜란드 말을 거의 잃어버리고 있었지만 하멜 일행과 더불어 지내는 과정에서 자신의 모국어를 거의 회복했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그는 하멜 일행과 대화한 후 바닷가에 엎드려 소매가 젖도록 울었다고 한다. 아마 잊고 살던 고향과 조국에 대한 그리움과 자신의 기구한 생애가 겹쳐져서 그랬으리라.
1998년 5월 1일 한국 국적을 회복하고 완전 귀국했던 훈 할머니의 심경도 그랬을 것이다. 경남 마산 진동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열대여섯까지 자라날 때까지 그녀는 평범한 경상도 가시나였다. 그러나 어떤 경로로든 그녀가 일본군 위안부가 되어 수만리 밖 캄보디아 땅에 처박힌 뒤 그녀의 운명은 뒤틀렸다. 고국으로 돌아오지도 못한 것은 물론, 캄보디아 사람의 아내로 수십년을 살아야 했고 자신의 모국어마저 완벽하게 잃어버렸다.
사연을 안 한국인 사업가가 그녀를 알리기는 했으나 제대로 된 한국어 한마디 모르는 그녀로서는 한국인임을 증명하기도 쉽지 않았다. 가족인 것 같다고 나선 이들과 유전자 감식을 했지만 수포로 돌아갔다. “어떻게 근 20년 쓴 한국말을 저렇게 완전히 잃을 수 있단 말인가? 가짜 아닌가?” 의심의 눈초리도 날카로와졌다. 하지만 캄보디아 어 통역을 거친 할머니의 기억은 희미하지만 명료했다.
“내 고향은 바다 가까이에 있었어요. 집에서 걸어나가면 바다가 있고, 거기엔 고기배가 오고 갔던 기억이 납니다. 바다에는 방파제가 있었는데. 집 가까이 절도 있었어요. 나는 절에 빠지지 않고 다녔어요. 동네 할머니들이랑 다른 아이들도 다 가니까…….내가 한국말을 다 잊어버렸지만 고향이 진동이라는 것은 기억에 남아있어요……
당시 처녀들은 머리를 길게 땋았고 결혼하면 비녀를 꽂았습니다. 명절에는 제일 큰집에 모여서 먹고 놀고, 어린 우리들은 오후나 다음날 다른 집에 인사를 다녔습니다. 인사를 하고 돈을 받으면 과자를 사먹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큰집은 아니었어요. 고모도 계셨는데. 어디에 사셨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요. 겨울에 눈이 내리면 아이들끼리 썰매를 만들어서 타고 놀았습니다.”
그녀의 말 중에 가슴에 와 박히는 한 마디는 이것이었다. “고양이나 개만도 못하게 살아 내 이름도 부모님 이름도 똑똑히 기억을 못하네요.” 마당에서 실신할 듯 통곡하는 어머니의 기억, 일본인에게 주눅든 아버지의 모습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동남아시아로 끌려갔다. 거기서 일본군들의 위안부가 되어 죽지 못할 고생을 했고 캄보디아에 남겨졌다.
캄보디아도 만만한 땅은 아니었다. 격렬한 내전이 있었고 폴포트 군에 의해 아들은 죽음을 당했고 할머니 자신 외국인으로 죽음을 당할까봐 모든 사진들을 땅에 파묻고 공포 속에 숨죽여야 했다. (모르긴 해도 이때 한국어는 일부러라도 뇌 속에서 사장시키지 않았을까)
고국에서 자신의 증언을 들으러 찾아온 사람들에게 할머니는 이렇게 말했다. 능숙한 캄보디아어로.
“다음생에 태어난다면 쥐띠해에 남자로 한국에서 태어나고 싶어요. 모국 외에 다른 곳에서는 태어나고 싶지 않아요. 고국에서 태어났으니 당연히 한국국적을 가져야지요. 외국인으로 캄보디아에 살아도 괜찮아요. 이제는 한국사람이 많으니깐. 내가 한국에서 태어났고 한국사람이지 캄보디아 사람이 아니예요. 당연히 한국국적을 가져야지요. 한국에서 살 것인지는 확실치 않아요. 한국에서 살고 싶지만 혼자 살아야 해서. 손녀가 있어야 도와주는데. 아플 때 옆에서 거드는 사람이 없잖아요.”
할머니의 가느다란 기억을 끈 삼아 그녀의 과거가 밝혀져 가족들과 상봉하게 되는 데에 이른다. 나머지 모든 가족들은 거의 세상에 없었지만 할머니의 동생은 살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소원대로 ‘대한민국’의 국적을 받아 1998년 5월 1일 완전 귀국한다. 할머니가 그렇게 간절하게 고국의 국적을 원했던 이유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다. 혈육에 대한 그리움과 고국에 대한 추억이 되살아난 것인지 아니면 그래도 캄보디아보다는 잘 사는 한국에서 방송이다 신문이다 대문짝만하게 내 주고 대접해 주는 듯 하니 안심하시고 들어오신 것인지. 나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하고 생존에 급급해야 했던 처지로서의 안타까움이었는지.
그러나 할머니는 끝내 반세기 전 떠난 고국에 적응하지 못하셨다. 벨테브레는 하멜 일행과 대화하면서 며칠만에 화란 말을 회복했으나 훈 할머니는 끝내 한국어를 되살리지 못하셨던 것이다. 결국 할머니는 한국 생활을 접고 캄보디아로 돌아가셨고 10년전 기구함으로 점철된 세상을 등지셨다.
추억의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주인공 여옥은 좀 과하다 싶을 만큼 다양한 삶을 산다. 위안부가 되었다가 첩보원이 되기도 하고 능숙한 사무직원이었다가 시골 아낙으로 빨치산으로 변모하곤 한다. 그걸 드라마니까 가능한 얘기라고 치부하기엔 우리 현대사는 너무 기구했고 좌충우돌이었으며 사람들의 삶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었다.
1998년 5월 1일 생애 최초로 모국의 국적으로 모국에 입국한, 경상도 마산 출신의 한 할머니는 비행기 트랩 위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해진다
원문: 산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