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영향인지 또는 참말로 다른 방도가 없었던 것인지 우리 군에는 ‘육탄 돌격’의 신화가 많다. 그 효시라 할만한 것이 바로 1949년 오늘 일어난 육탄 10용사들의 돌격. 6월 25일 전면전을 개시한 것이 북한이라는 것은 이제는 움직이기 힘든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6월 25일 이전의 38선이 평화롭고 고요하지는 않았으며 전면전에 진배없는 맹렬한 포격전과 고지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즉 전쟁이 6월 25일 별안간 뻥 하고 터진 것은 아니었다.
육탄 10용사의 신화는 6.25가 터지기 전 송악산 전투에서 피어났다. “고지를 장악한 인민군들이 총탄을 퍼붓는 가운데 서부덕 상사 이하 10명의 대원들이 포탄을 안고 고지로 기어올랐고, 벼락같은 포효와 함께 적진에 뛰어들어 장렬하게 산화”했다는 것이 신화의 골자다.
그런데 좀 묘한 문제가 있다. 육탄 10용사의 소식이 대서특필되고 서울운동장에서 성대한 장례식까지 열렸으며 가신 님들 뜻 이어받아 괴뢰도당 물리치고…… 각오도 다졌는데 북한에서 서부덕 상사 등에 대한 대대적인 환영식이 열린 것이다. 그들은, 아니 최소한 몇 명은 살아 있었고 가족들에게 소식을 전해 오기도 했다고 한다. 육탄 10용사가 전원 폭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당시의 국방부도 인정하는 사실이긴 했다. 그럼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인가.
당시 1사단 13연대장이었던 김익렬의 증언을 듣자면 너무나 황망하여 실소가 나올 정도다. 그에 따르면 육탄 10용사의 신화는 이렇게 만들어진다.
“송악산에서 격전중인 일선부대에 박격포탄을 보급하기 위하여 공병소대장 박모로 하여금 10명을 공동 지휘하여 박격포탄을 짊어지고 송악산으로 출발시켰다. 그러나 박 소위는 지형을 숙지하지 못하여 이동도중 적과 불의에 조우하게 되자 부하들을 수습지휘하지 못하고 혼자서 탈출하였다.
대원 10명은 박격포탄을 진채 모조리 적에게 포로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사단장은 박 소위를 총살하라고 노발대발했다. 이때 박 소위와 친했던 제11연대장 최경록 중령이 거짓말을 한다. ‘사실은 대원 10명이 모조리 포탄을 안고 적진에서 자폭한 것’이라고 말이다.
이 보고를 들은 사단장은 그 자리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일본군에는 육탄 3용사가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육탄 10용사가 나왔다고 하면서 이 사실을 대통령에게까지 보고하였던 것이다.”
이 사단장은 일본군 출신의 김석원 장군. 육탄돌격의 감동 (?)을 알만한 양반이다. 파주에서는 매해 육탄 10용사 추모식이 열리고 육군은 각 군단의 모범 장병들에게 ‘육탄 10용사상’을 수여하고 있다.
부사관학교는 평양방송에도 나온 서부덕 이등상사를 모범으로 모사고 있고 1사단 예하 부대는 육탄 10용사를 저마다 기리고 있다. 그들이 정말 ‘용사’였기를 바라지만 껄쩍지근한 마음을 금할 수는 없다.
그리고 같은날 대한민국 육군의 흑역사가 동부전선에서 열리고 있었다.
원문 : 산하의 오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