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중국인 이름의 표기법이 원어 중심으로 바뀌면서 내 머리 속에서는 중국인들의 이름이 마치 홍해바다 동쪽과 서쪽처럼 갈라져 틀어박히게 된다. 대충 ‘강택민’ 이전의 중국인들은 어김없이 우리 식 이름으로 기억된다. 마오쩌뚱이나 떵샤오핑보다는 모택동 등소평이 더 친숙한 것이다.
구한말 조선을 들었다 놨다 한 원세개는 귀에 익지만 위안 스카이는 좀 어리둥절하고 진독수라면 고개를 끄덕여도 천뚜슈라면 누구? 하게 된다. 주은래는 쉬워도 저우언라이 하면 라이라이? 하며 반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의 중국인들의 이름은 정반대다. 시진핑은 알아도 그의 우리식 한자 발음은 모르며 원자바오는 알아도 우리 식으로 ‘온가보’라고 부르면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온가보, 즉 원자바오는 한 2년전 까지 중국의 총리였다. 자식 농사를 잘못 지은 탓에 자식들의 비리에 휘말려 스타일을 있는대로 구기긴 했으나 그는 중국 역사상 가장 인기 있는 총리 중의 한 사람이었다. 기실 그는 도저히 그 자리에 오르지 못할 처지였다. 기억에도 새로운 1989년 천안문 사태 때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할 것을 주장했던 조자양 (이 사람도 자오쯔양이라고 부르긴 뭐하다)의 측근으로서 천안문에서 조자양을 근접 수행하던 것이 이 원자바오였다.
군 투입 소식을 듣고 “제발 이곳을 떠나라 당신들 죽는다.”고 울부짖던 조자양은 이후 실각하고 죽을 때까지 연금됐지만 무슨 영문인지 원자바오는 함께 숙청되지 않았고 능력을 인정받아 총리에 이른다. (이런 게 중국적이라는 생각은 든다. 적이든 반동이든 인물은 인정하는. 한국 같으면 꿈도 못 꿀 일)
총리로 재임하던 2008년 5월 12일, 중국은 쓰촨 대지진이라는 대참사를 맞는다. 사망, 실종자 8만6천여명. 22조원이 넘는 재산 피해를 낸 엄청난 자연 재해였다. 피해지역은 남한 면적에 해당하는 넓이였다. 약 5천만 명이 쓰촨 대지진의 직간접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며 국제적으로 적용되고 있는 산출법을 적용하면 이 중 230만명이 정신적인 후유증을 앓고 있을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일설에 따르면 대규모 지진의 징후가 예감되었지만 베이징 올림픽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경보 체계를 발동하지 않았다고도 한다. 이에 따르면 공산당 지도부 9인 가운데 1인을 제외한 8명 전부가 경보 체계 발동에 반대했는데 경보 체계 발동 찬성자는 윈자바오 총리였다고 전한다. (사실로 확인된 것인지 여부는 모르겠다. 아마도 루머이지 싶다)
하지만 이 루머는 지진 직후 윈자바오가 보여 준 영웅적 행동이 거꾸로 낳은 전설일 것이다. 지진 직후 윈자바오는 실로 영웅적으로 행동했다. 그는 일곱 시간은 커녕 7분도 지체하지 않고 여진이 가시지 않은 현장으로 날아갔다. 구조대를 독려하고 무너진 건물 더미를 헤집으며 메가폰을 들고 소리 질렀다.
“내가 왔다 총리가 왔다. 조금만 참아라.”
뒤늦게 현장을 찾았지만 의전에만 신경쓴 후진타오에 비할 때 그는 위기 시의 지도자란 어때야 하는지를 명징하게 보여 주었다. 인민해방군이 현장 진입을 꺼리자 그는 이렇게 호통을 친다.
“누가 당신들을 먹여 살리고 있는지 기억하란 말이다!”
그가 붕괴되는 건물의 낙석에 부상을 입은 후 “이 돌에는 아직도 이 건물에 묻힌 어떤 이들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읊조렸을 때 15억 중국이 울었다. 무릎 꿇고 사정하는 부모 앞에서도 뻣뻣하고 울부짖는 유가족들을 웃으며 외면했던 동방의 어떤 나라 정치인들과는 한 마디로 질이 다르고 결이 달랐다.
그로부터 1년. 2009년 쓰촨 대지진 1주기 추모식에 윈자바오는 참석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그 연단의 상석에 올라야 할 사람이지만 그는 눈에 띄지 않았다. 그 활약과 공적을 개인에게 돌리지 않고 당에게 돌리겠다는 배려가 아닐까 하는 추정만 남긴 채 ‘윈자바오 할아버지’는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
“내가 구조해 봐서 아는데…..”라고 나대지도 않았고 “재앙 준비 태세 미비”를 준엄하게 질책하지도 않았고 인민해방군 해체를 선언하며 “다 옷 벗겨 버리겠다.”고 엄포도 놓지 않았다. 그의 부재는 그래서 감동이었다.
쓰촨 대지진을 기억하면서 재난에 임하는 지도자의 격을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지도자의 언어를 곱씹어 본다. 최소한 그는 이렇게 말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우리 중국 인민의 핵심목표는 올해 복구해야 될 것은 이것이다 하는 것을 정신을 차리고 나가면 우리의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걸 해낼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셔야 될 거라고 생각한다.”
원문 : 산하의 오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