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2월 21일, 단재 신채호 투쟁을 멈추다
어느 나라든 어느 민족이든 마찬가지겠지만, 특히 한국인들은 ‘변절자’나 배신자를 싫어하는 정서가 강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세조 때 신숙주가 아무리 유능한 명신이었다 해도 단종 임금을 복위시키려다가 죽은 성삼문에 비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숙주나물’로 남거나 가깝게는 초롱초롱하게 빛나던 김민석이 2002년 대통령 선거 때 노무현을 버리고 정몽준에게 달려갔던 이후 완전히 맛이 가버린 일은 그런 정서를 드러낸다고 하겠습니다. 하여간 참 일편단심 독야청청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딴에는 그런 생각도 듭니다. 현실 속에서 그렇게 곧고 꼬장꼬장했던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늘상 패해 온 역사 때문이 아닐까 하는 거죠. 한국 현대사에서 평생을 그렇게 꼬장꼬장하게, 비타협적으로 또한 열정적으로 살다 간 사람의 리스트를 작성하자면 1936년 2월 21일 차가운 감옥 바닥에서 죽어간 이 사람을 빼놓을 수 없을 겁니다. 단재 신채호.
역사가이자 독립운동가요 아나키스트이자 무장투쟁론자였던 이분의 생애를 몇 글자로 줄이는 것은 무망한 일입니다. 다만 그분이 어떤 성품이었는지는 지금도 잘 알려진 몇 가지 일화에 생생히 담겨 있습니다. 1910년 잃어버린 나라를 떠나 망명길에 오르던 단재는 잠시 오산학교에 머물렀는데 그때 오산학교 교사 하나는 단재 신채호의 행동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습니다.
“단재는 세수할 때에 고개를 숙이지 않고 빳빳이 든 채로 두 손으로 물을 찍어다가 바르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마룻바닥과 자기 저고리 소매와 바짓가랑이를 온통 물투성이로 만들었다.”
그 이유는 일제가 이 땅을 지배하는 한 어느 방향으로든 허리를 굽히지 않겠다는 뜻이었다지요.
솔직히 그게 일종의 기벽인지 아니면 정말 그런 깊은 뜻이 숨어 있는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오산학교 교사는 이 신채호에게 이런 인물평을 남깁니다.
“단재는 결코 뉘 말을 들어서 제 소신을 고치는 인물은 아니었다. 남의 사정(私情)을 보아서 남의 감정을 꺼려서 저하고 싶은 일을 아니 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요즘 말로 하면 참 까칠한 사람이었던가 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신채호의 단면을 기록으로 남긴 사람이 “뉘 말을 듣고 제 소신을 고쳤던” 고쳐도 많이 고쳤던 춘원 이광수라는 점이죠.
영어도 자기 소신대로
어렸을 적부터 천재 소리를 들었던 신채호는 영어도 기이하게 배웁니다. 영어에 능통한 우사 김규식을 선생 삼아 영어를 배우는데 김규식은 그만 답답해서 미칠 지경이 되고 맙니다. “문법과 철자를 꼼꼼히 익히란 말이오.” 라고 가르치려는 김규식에게 신채호는 “단어는 뜻만 알면 되는 거 아니우?”하고 대들었을 뿐 아니라 “I am a boy”를 읽으면 꼭 우리말처럼 조사를 넣어 ”I는 am a boy”라고 읽었고 한문을 해독하듯 한 문장을 읽은 뒤에 ‘하여슬람’하는 추임새를 넣었다기 김규식의 복장이 터질 밖에요.
neighbour를 읽으면서는 네이그후부어라고 읽어서 묵음을 빼고 읽으라고 하자 내가 영어 읽는 데 영국 법 따를 것이 무엇이냐면서 대들었다니 뭐 더 볼 것이 없겠죠. 하지만 그는 그 고집에도 불구하고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멸망사 같은 것을 줄줄 읽어대는 실력을 쌓았다니 천재는 천재였구나 싶습니다.
어이없다 싶을 만큼 고집이 세지만 그 고집에 이유가 있었고, 그 이유에는 타협이 없었던 인물이 신채호가 각별히 관심을 기울인 것은 역사 문제였습니다. 김원봉의 부탁을 받아 쓴 조선혁명선언에도 이런 대목이 나오죠.
“(학교에 가면) 조선 사람으로 혹 조선사를 읽게 된다 하면 ‘단군을 무(誣)하여 소잔명존(素棧鳴遵)의 형제’라 하며, ‘삼한 시대 한강 이남을 일본 영지’ 라 한 일본 놈들이 적은 대로 읽게 되며”. 소잔명존은 일본의 전설에 나오는 ‘천황’이고 한강 이남은 임나일본부쯤을 얘기하겠죠. 일찍이 성균관 박사를 지낸 신채호가 이런 일본의 왜곡에 분통을 터뜨리는 것은 당연했고 “애국심의 원천은 역사”라는 믿음으로 우리 역사에 드리운 그늘을 걷는 데 노력을 다하게 됩니다. <조선 상고사>를 비롯한 그의 역작들은 그 결과겠죠.
학문적 시각에서 보면 <조선 상고사>는 한계가 눈에 보이는 저술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반도에 갇혀 있던 역사 인식을 만주로 확대했다는 점에서, 그리고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우리 역사를 재해석하고 그 체계를 수립했다는 점에서(신용하 교수) 그의 업적은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가운데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역사는 역사를 위하여 지으라는 것이요 역사 이외의 다른 목적을 위하여 지으라는 것이 아니다. 좀 더 자세히 얘기하자면 사회의 유동 상태와 거기서 발생한 사실을 그대로 적은 것이 역사요 저작자의 목적에 따라 그 사실을 좌우하거나 더하거나 혹은 고치라는 것이 아니다.”
사실 저는 이 말을 “1만 년 전부터 내려온 찬란한 우리 고대사”를 외치는 분들에게 들려 드리고 싶기도 합니다.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
역사란 “인류사회의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이 시간부터 발전하며 공간부터 확대하는 심적 활동의 상태의 기록이니, 세계사라 하면 세계 인류의 그리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며, 조선사라면 조선 민족의 그리되어 온 상태의 기록”이라고 써내려가는 그의 앙다문 입매를 그려 보면 그의 일생이 얼마나 고단하였을까 싶은 생각이 절로 납니다.
“이승만은 이완용보다 더한 역적”이라고 선언하며 치열하게 싸웠고, “외교를 의뢰하여 국민의 사상을 약하게 하는 놈은 댕댕이 지옥에 둬야 하며 의병도 아니요 암살도 아니요 오직 할 일은 교육이나 실업 같은 것으로 차차 백성을 깨우자 하여 점점 더운 피를 차게 하고 산 넋을 죽게 하는 놈들은 어등 지옥에 가야 한다”(신채호의 소설 『꿈하늘』 중)면서 열불을 내던 그에게도 그 평생은 ‘아와 비아’의 부단한 투쟁의 과정이었을 테니까요.
꼿꼿이 서서 세수를 하고 영어를 자신의 방식으로 읽었던 괴팍하기까지 한 선비. 자신을 포함하여 그 신념에 위배되는 행동을 하는 누구도 용납하지 않았던 비타협적 독립운동가. 우리 역사의 지평을 넓히는 데 공헌한 역사가 신채호는 일제에 체포되어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복역하던 중 1936년 2월 21일 사망합니다.
그는 일제 강점 이후 호적을 만들지 않겠다고 하여 평생을 무국적자로 살았고 해방 이후로도 60년 동안 무국적자로 남아 있었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호적에 등재된 사람에게만 대한민국 국적을 부여했기 때문이죠. 신채호 선생의 후손은 이 고집 센 할아버지 덕에 외가 호적에 이름을 올리고 살아야 했습니다.
신채호의 말 하나를 곱씹어 봅니다.
“우리나라에 부처가 들어오면 한국의 부처가 되지 못하고 부처의 한국이 된다. 우리나라에 공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공자가 되지 못하고 공자를 위한 한국이 된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예수가 아니고 예수를 위한 한국이 되니, 이것이 어쩐 일이냐! 이것도 정신이라면 정신인데, 이것은 바로 노예정신이다.”
원문: 산하의 오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