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5월, 신문을 펼친 사람들은 너무도 끔찍한 뉴스에 눈을 감고 말았다. 멀쩡한 청년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수십 군데 난자해서 살해하고 불까지 지르는 엽기적인 범죄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마흔 줄에 접어든 사람이라면 아마 그 범인의 이름도 어렴풋이 기억날 것이다. 박한상.
이 사건은 후일 조폭 경찰 설경구와 사이코패스 살인마 이성재의 대결을 그린 영화 <공공의 적> 모티브가 된다. 유산을 노려 부모를 수십 번 찔러 죽인 것이 같고 부모의 죽음이 알려진 뒤 크게 슬퍼하며 경찰의 눈을 속이는 모습도 유사하고 결정적인 증거가 부모로부터 나온 것도 같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영화에서는 어머니가 아들의 짓인 것을 감추기 위해 범행 도중 떨어진 아들의 살점을 삼키지만, 실제에서는 죽어가는 아버지가 아들의 발목을 물어뜯은 치흔이 결정적인 증거가 되었다는 것.
그는 수백억 재산을 자랑하는 집안의 큰아들이었다. 어릴 적 친구들의 말에 따르면 온순한 편이었다는 박한상은 공부는 썩 잘하지 못했다. 지방의 어느 대학에 턱걸이로 들어갔지만 자수성가하여 부를 일군 아버지의 눈에는 모자라도 많이 모자랐다. 아버지의 선택은 아들을 미국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에서 되지 않는 공부가 미국에서 될 리 없었다.
오렌지족, 나라를 들끓게 만들다
박한상은 도박과 마약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한다. 분노한 아버지는 한국으로 그를 호출했지만 미국에서의 버릇이 한국 와서 고쳐질 리는 없었다. 어느 날 박한상은 호적을 파 가라는 심한 질책을 들은 뒤 앙심을 품고, 또 부모 사후 재산 상속을 노리고 칼 두 자루를 들고서 부모의 방으로 뛰어들었다.
사건이 밝혀진 뒤 온 나라가 뒤집어졌다. 언론은 말할 것도 없고 피시(PC)통신의 공개토론방도 펄펄 끓었다. 나라가 어떻게 되려고 이러냐는 개탄이 드높았다. 그 가운데 핵심으로 떠오른 단어는 ‘오렌지족’이었다. “국내에서 부족한 학벌을 보충하기 위한 수단으로 도피성 유학을 떠난 수입 오렌지족이 저지른 범행”이라는 한 네티즌의 성토는 당시 이 사건을 바라보는 시선의 주종을 이뤘다.
사건 직후 과천 서울랜드(당시는 서울대공원)에는 이런 팻말이 나붙는다. ‘오렌지족 출입금지.’ 그 안내문에는 오렌지족에 대한 정의가 등장한다. ‘말꼬랑지 같은 긴 머리를 한 남자, 귀고리를 한쪽만 한 남자, 일부러 우리말을 서투르게 하는 남자, 뒷주머니에 여권을 찔러넣고 다니는 사람, 고급 외제차를 타고 다니는 20대’가 오렌지족의 정의였다.
내가 이 오렌지족이나 그들이 설치고 다닌다는 ‘압구정동’에 대해 처음 들은 것은 1992년 초였다. 예비역에 편입된 뒤 복학 준비를 하던 나는 생애 처음으로 해외 나들이에 나서게 된다. 미국에 계신 큰아버님이 한번 놀러 오너라 초청을 하신 것이다. 이미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행된 지 2년. 주변에서 가끔 배낭여행을 가네 어디 다녀왔네 하는 소리에 부쩍 귀가 당기던 차였다. 절차도 많았다. 서울에 와서 미국 대사관 인터뷰를 위해 긴 줄을 서야 했던 것은 그중의 하나였다. 아버지 은행 잔고부터 내 전역증명서까지 별별 서류를 다 내밀고 무슨 질문을 할까 조마조마했는데 장장 몇 시간 만에 마주한 미국 관리는 딱 세 마디를 말했다. “안녕.” “미국에 왜 가나요?” “행운을 빌어요.”
그 외에도 여러 과정이 있었다. 해외여행을 가는 사람들이 특정 장소에 집결하여 ‘소양 교육’을 받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해외에서 북한 사람들을 만날 때 어떻게 대처하는가 같은 안보(?) 교육도 있었다. “포크는 왼손, 나이프는 오른손, 팔꿈치는 테이블에 대지 않습니다. 호텔에선 떠들지 않습니다”는 에티켓 강의도 포함되었다. 여권을 받아든 각양각색 남녀노소 수백명이 강당에 모여 진지하게 교육을 받는 모습이란 지금으로선 상상하기 어려운 코미디다. 도대체 왜 그러고 있었느냐는 반문도 가능하겠지만 어떡하나. “그땐 그랬지”인 것을.
우여곡절을 거쳐 마침내 김포공항 출국장을 통과했을 때 나는 책 몇 권을 사게 되는데 당시에는 시사주간지의 대표주자라 할 <시사저널>도 끼어 있었다. 거기서 매우 흥미로운 기사를 읽게 된다. 바로 ‘압구정동’에 대한 기사였다. ‘욕망의 해방구 압구정- 나만의 방식 추구하는 신세대 압구정파, 돈 걱정은 안한다’가 커버스토리 제목이었다.
“압구정동은 70년대생 신세대의 해방구이면서 동시에 그 해방구의 쇼윈도이다. 그 쇼윈도는 투명해서 그 안에 있는 ‘현란한 젊음’들이 잘 들여다보인다. 안에서도 밖이 잘 내다보인다. 그러나 압구정동의 안과 밖은 서로 쉽게 소통하지는 않는다. 압구정동을 ‘눈으로’ 즐긴다면야 그만이겠지만 그 세계 속으로 편입되기란, 이른바 ‘압구정파’가 되기란 간단치가 않다. 종로나 대학로 혹은 신촌이나 이태원에 들어가던 방식으로는 압구정동에 입장할 수 없다.”
비행기 안에서 느꼈던 일종의 문화적 충격은 참으로 생생하다. 내가 종로나 명동, 신촌에서 막걸리를 퍼마시거나 누군가 선창하는 구호를 따라 외칠 무렵, 또래 젊은이들이 줄줄이 몸에 불을 댕기고 영정으로 남던 즈음, 불과 몇 킬로 밖에서는 이런 별천지가 펼쳐졌구나. 그 기사에는 누구인지 알 수 없는 학교 후배도 등장했다.
“압구정파인 고려대 2학년 여대생 한모(20)양은 ‘부의 편재가 심하다는 생각을 하지만 빈곤감이란 상대적인 것이라고 본다. 나는 나의 수준에 맞게 살아갈 뿐이다’라고 말했다.”
기사에 따르면 그의 ‘수준’은 머리도 식히고 견문도 넓힐 겸 유럽일주 여행을 다녀오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느꼈던 ‘수준’ 차이라니. 머리 식히러 춘천 소양강 가는 것도 언감생심이던 인생과 유럽일주 여행을 다녀오는 인류의 공존이 피부로 와 닿던 순간, 나는 캄캄한 밤 태평양 상공에 있었다. 어느 철거촌에서는 대학생들이 철거민들과 함께 철거 깡패와 맞서고 있었고, 후배가 잡혀갔다는 말을 듣고 걱정하며 비행기를 탔는데 “다 수준에 맞게 사는 거 아냐?”라고 쿨하게 주장하는 이들이 하나의 ‘해방구’를 이루며 그들만의 문화를 구가하고 있었다니. “당신의 와꾸를 디밀어 보면 띠- 하고 거부반응을 일으키는”(유하 시인) 그런 별천지가 존재하고 있었다니. 선곈가 불곈가 인간이 아니로세.
기사에서는 이 젊은이들을 ‘압구정파’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들을 가리키는 명칭은 곧 ‘오렌지족’으로 바뀌게 된다. 당시로서는 비싼 과일이었던 오렌지를 이성(異性)에게 건네고 그걸 받으면 이른바 ‘원 나이트’가 합의되는 풍습(?)에서 유래됐다는 오렌지족의 명성(?)은 삽시간에 회오리가 되어 한국 사회를 휩쓸었다. 외제차를 타고 다니며 맘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야! 타!”라고 호기롭게 외친다고 해서 ‘야타족’이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비단 박한상 사건이 아니더라도 이미 오렌지족은 지탄과 단속, 심하면 증오의 대상이 되어 갔다.
공공의 적이 된 오렌지족
1993년 2월10일치 <한겨레신문>을 보면 ‘오렌지족에 대처하는 당국의 자세’를 짐작할 수 있다. “외부환경 정비를 위해 불법 간판을 정비하고 야간주차구역을 설정해 고급승용차 출입을 원천적으로 막기로 했다. … 경찰과 합동으로 검문검색을 강화해 비행과 탈선을 저지를 우려가 있는 오렌지족을 선도해 나가기로 했다.” 여기까지도 좀 어이가 없지만 다음의 ‘대책’에는 폭소가 나올 지경이다. “강남구는 월 1회씩 거리 미술전, 음악회, 시낭송, 백일장, 합창, 웅변대회, 노래자랑 대회 등 문화행사를 대대적으로 벌이기로 했다.”
오렌지족은 ‘공공의 적’이었다. 1993년 2월18일치 <경향신문>에는 서울 강동구 둔촌동 한산초등학교(당시엔 국민학교) 졸업생들이 낸 문집에서 “압구정동은 외래 문화 천국”이라며 언성을 높이는 모습이 소개됐고 홍익대생들은 학교 앞으로 진출하고 있다는 오렌지족들을 겨냥해 ‘퇴폐 향락 문화가 싫어요’ 스티커 붙이기 운동을 벌였다. 내가 다니던 학교도 예외는 아니었다. 어느 날 학교 담벼락에 대자보가 붙었다. 자세한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압구정 오렌지족 등의 퇴폐적인 소비 풍조를 신랄하게 규탄하면서 이런 ‘썩어빠진’ 소비 향락 문화가 ‘민족 고대’ 주변에 상륙하는 것을 막자는 대자보였다. 그래 그럼 뭘 어떻게 막자는 것인가 살펴보니, 학교 앞에 들어선다는 압구정동식 카페 ‘보디가드’ 개점을 반대하자는 것이었다.
왜 ‘보디가드’가 문제인가. 요는 그것이 압구정동식 소비 패턴을 지향하는 카페라는 것이었다. 즉 위에서 언급한바 “쇼윈도가 투명해서 그 안에 있는 ‘현란한 젊음’들이 잘 들여다보이는” 식의 인테리어가 도입된 카페였고 테이블마다 전화가 놓여 있으며 커피 값도 다른 곳과 차별적으로 비쌌다는 것 정도. 그러나 민족 고대에 압구정식 카페를 용납할 수 없다는 이 기묘한 정의감은 매일 ‘보디가드’ 카페 앞에서 불타올랐다.
그러나 일찍이 주택가였던 그 길은 몇 년 사이 대거 유흥가로 변해 버렸고 ‘보디가드’ 이외에도 화려하고 번쩍거리는 카페와 술집들이 연속부절로 들어서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기로 ‘보디가드’ 사장이 의외로 쿨해서 학생들을 영업방해로 고발하는 따위의 찌질한 일을 하지 않고 “그럼 이름을 바꾸지요 뭐” 해서 ‘목신의 오후’로 바꾸고 학생들 요구 사항 몇 개를 응낙해 줌으로써 투쟁(?)은 끝났다.
한국 문화의 새로운 청춘이기도 했던 오렌지족
오렌지족의 엇나간 행태에 대해 허다한 이들이 혀를 차고 손가락질을 했지만, 이미 오렌지족이란 오랫동안 우리 사회를 둘러치고 있던 방죽을 뚫고 유입된 새로운 물줄기의 하나임에는 분명했다. 오렌지족은 극히 일부의 문화였을 뿐이었으나, 그때껏 보수와 혁신을 막론하고 우리 사회를 지배하던 수질(水質)은 그들의 출현 이후 점점 더 빨리 변해 갔다. ‘우리’보다는 ‘나’에 민감하고, 역사적 책임감을 공유하며 나누는 허름한 술집의 소주잔보다는 새롭게 등장한 록카페와 로바다야키에서 폼 나게 먹고 몸을 흔드는 것이 익숙한 세대. 선배건 어른들이건 무슨 말을 할라치면 “그게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를 당연하게 되묻는 아이들. 영화 <투캅스>에서 보듯 왜 경찰이 됐냐는 질문에 거창한 사명감이 아니라 “폼 나잖아요”라고 대답하는 이들이 한국 사회의 새로운 청춘들로 자리잡아간 것이다.
강남구청이 압구정동 정화를 위해 백일장 대회와 웅변 대회를 거창하게 열었다 해도, 대학생들이 ‘퇴폐 향락 문화 저지’를 목이 쉬도록 외쳤다 해도, 오렌지족 퇴폐 문화의 대학가 상륙 거부 시위를 열심히 벌였다 해도 이미 우리 사회는 변하고 있었다. ‘보디가드 반대 투쟁’이 벌어졌을 때 어느 술자리에서 한 1학년이 던진 질문에 쟁쟁한 선배들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던 것이다. “왜 ‘보디가드’는 안 되고 ‘샹2’(매우 화려하게 유럽식 인테리어로 꾸몄던 호프집)는 괜찮은 거예요?” 돌아보건대 오렌지족의 등장은 그런 변화의 신호탄이었다. 먼저 두각을 드러냈기에 집중포화를 맞았고 빗나간 부(富)의 사생아로서 그 폐해가 두드러졌을 뿐.
달포 전 어느 모임에서 대학 시절 안면이 있던 선배를 만났다. 딱히 친했던 사이는 아니어서 그의 대학 생활을 잘 알지 못하였으되 그는 지방에서 큰 사업을 하는 집의 외동아들이었기에 나름 화려한 대학 생활을 했으리라 짐작했다. 더욱이 그는 운동권 따위와도 거리가 먼 ‘일반 학우’로서 대학 생활을 마친 사람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화려하긴 뭘 화려해. 내가 경영대쯤 됐으면 모르는데 문과대는 그런 분위기 아니었어. 내 지갑에 만 원짜리 열 장 꽂고 다니면서도 새우깡에 소주 먹었다니까. 뭐랄까 돈 펑펑 쓰면 죄짓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묘하게 그런 분위기가 있었어.”
5년만 더 늦게 대학에 들어왔더라면 그의 청춘은 새우깡에 소주 정도에 매몰되지 않았으리라. 유시민 전 장관의 저 유명한 항소이유에 등장하는바 “열여섯 꽃 같은 처녀가 매주일 60시간 이상을 일해서 버는 한달치 월급보다 더 많은 우리들의 하숙비가 부끄러워”지는 경험도 할 이유가 없었으리라.
그 선배는 이제 나이 쉰을 바라본다. “70년대생 신세대”의 첫머리에 감히 들어가는 나도 벌써 마흔 중반이다. 압구정 거리를 누비며 야! 타!를 부르짖던 외제차 운전자들도, 그들을 격렬히 비판하며 퇴폐 문화 추방을 외치던 대학생들도 그 또래가 되었을 것이다. 나를 포함한 우리가 ‘기성세대’로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를 20년 전의 우리 자신이 들여다본다면 과연 어떤 생각을 할까.
1994년 말 문화체육부에서 낸 ‘94년도 청소년 육성정책 결산 및 95년도 청소년 정책방향’이라는 보고서는 오렌지족의 ‘특징’을 이렇게 분석했다. “일반 청소년들은 대학 입학이라는 지상의 과제를 향해 하루 24시간을 쪼개가며 당장의 고통을 참는 반면 오렌지족은 술·여자 등과 함께 ‘즐기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다. 월 2만~3만원의 용돈을 사용하는 일반 청소년과는 달리 오렌지족은 카드나 수표를 사용하며 버스나 지하철보다는 스포츠카와 외제차 등을 몰고 다닌다. 서로의 사랑을 조금씩 확인해가는 애틋한 연애보다는 부킹과 함께 당일로 호텔로 직행하는 벼락치기 쾌락에 탐닉한다.”
이 보고서를 낸 사람들을 흉내내어 오늘 우리 사회를 관찰한다면 이런 보고서를 쓸 수 있지 않을까.
“대학 입학이라는 지상과제를 위해 하루 24시간을 쪼개가며 고통을 참아 봐야 대학은 부모의 경제적 지위에 따라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시급 벌자고 편의점에서 밤샘 알바를 하는 학생은 해외연수를 기본으로 다녀오고 온갖 스펙을 장착한 학생과 ‘공정하게’ 경쟁해야 한다. 서로의 사랑을 조금씩 확인해 가는 애틋한 연애를 하는 이들은 모텔비가 없어서 걱정이지만 21세기 오렌지족들의 활보는 여전하다. 90년대의 오렌지족들은 규탄과 선망을 동시에 받았으나 21세기의 오렌지족들은 오로지 ‘위너’일 뿐이다.”
원문: 산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