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4일. 블루스의 왕이 그의 오랜 친구들 곁으로 떠나갔다.
미시시피강 유역에서 목화를 수확하며 고달픔을 노래했던 진짜 블루스맨들은 이젠 버디가이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목화를 따며 생계를 유지하고, 길거리에서 가스펠을 부르며 푼돈을 벌던 한 흑인소년은 재능과 성실함으로 미국 내에 다섯 개의 블루스 클럽을 소유한 성공한 뮤지션이자 블루스의 전설이 되었다. 커다랗고 걸걸한 목소리로 노랫말을 내지르고는, 즉흥적인 싱글노트 연주로 뒤를 잇는 그의 스타일은 오늘날 우리가 떠올리는 블루스의 전형이 되었으며 후배 뮤지션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그가 이렇게 성공하게 될 줄은 그의 말마따나 ‘전혀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그가 음악을 하는 이유는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거리에서 노래를 하던 어린 시절부터 줄곧 그래왔다.
한 인터뷰에서 그가 이렇게 답하자 인터뷰어가 믿질 않았다. 그는 블루스의 전설에게 보다 그럴듯한 예술적 목표가 있는 것으로 생각했고 비비가 겸손을 떤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자 비비가 그 커다랗고 둥그런 눈을 치켜뜨고 진지하게 대꾸했다고 한다. “그럼 내가 거짓말하는 것처럼 보이슈?”
물론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그가 이룬 음악적 성취는 단순히 돈만 쫓는 사람이라면 도달할 수 없는, 엄청난 예술적 열망으로 벼려낸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그는 자신을 예술가라기보다는 프로뮤지션이자 노동자로서 포지셔닝하길 좋아했던 것 같다.
비비킹은 아흔이 가까운 나이에도 일년에 250회 이상 공연을 했다. 팔순이 넘어가면서부터는 그 풍만한 체구를 감당하기 힘드셨는지 주로 의자에 앉아서 연주하시기 시작했지만, 그를 원하는 무대가 있다면 어디든지 마다않고 달려갔다.
후배 뮤지션들 또한 자신들의 무대에 이 전설을 소환하길 갈망했다. 그들이 무대에 서서 비비에게서 영향을 받은 기타기술들을 바로 그에게 땀을 뻘뻘 흘리며 선보일 때, 비비는 크고 사람좋은 웃음을 지으며 넉넉한 연주로 화답하곤 했다.
라일리 비 킹으로 불리던 그의 유년시절은 블루스 그 자체였다. 1925년 9월 16일 미시시피의 한 농장에서 라일리를 낳은 부모는 그가 다섯 살때 이혼을 하고, 그를 길러주던 엄마는 아홉 살에 그를 외할머니에게 맡겨두고 저세상으로 떠났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결핍된 삶을 살아왔고, 특히 사랑에 목말라했다.
그가 1998년에 롤링스톤즈지와 한 인터뷰를 보면 이것이 그의 음악과 성격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알 수 있다.
“전 사랑을 계속 찾고 있어요. 왜냐하면 저는 저를 진실로 사랑해준 사람을 한번도 가지지 못했기 때문이죠. 어릴 때부터 저는 마음을 여는데 문제가 있었어요. 제발 누군가 내 마음을 열어주길. 내 안을 들여봐주길 바래왔죠. 왜냐하면 전 안되니까요. 그걸 어떻게 하는지 모르니까요.”
이러한 결핍 때문인지 비비는 모든 것을 게걸스럽게 탐했다. 성공한 다음부터는 그것에 맞게 욕망도 부피를 키워갔다. 음식, 여자, 도박 그리고 사운드. 그는 뭐든지 더 많이 원했다.
그는 15명의 여자에게서 15명의 자식을 낳았으며, 도박같은 경우 어찌나 빠져살았는지 1975년에는 아예 라스베가스로 이사를 갔을 정도이다.
지금은 드물지만, 옛날 뮤지션들은 그들이 살아가는 삶과 음악이 몹시 닮아있는 경우가 많았다. 비비의 경우도 그러했다. 그는 그의 블루지한 삶을 그대로 음악에 투영했다. 숱한 여자들을 만나고, 그들에게서 지독하게 사랑을 갈구하고, 잔인하게 내치고, 내쳐지면서 쌓은 감정들이 그의 기타연주와 노랫말에서 고스란히 표현되었다. 하지만 그가 여타의 블루스맨들과 달랐던 점은, 이런 결핍들에 잠식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블루스에선 묘하게도 낙담이나 절망대신 위로가 감지되었다. 그의 진실어린 목소리와 기타는 듣는 사람들의 상처를 어루만져주었다. 그는 공연에서 자주 말하곤 했다. 블루스에는 블루(우울)만 있는게 아니라고, 부기우기도 있는 법이라고..
비비킹의 연주에는 스티비 레이 본이나 게리 무어처럼 혹은 동세대의 알버트 킹처럼 후끈한 사운드도, 현란한 기술도 없었다. 게다가 할로우바디 기타의 프론트 픽업만으로 만들어내는 비비 특유의 둥그스름한 톤은, 나에게는 다른 영웅들의 것보다 덜 화끈하고 덜 섹시하게 느껴졌었다.
그는 ‘자 이제 멋진 거 하나 들려줄께’라는 식으로 불같은 솔로를 질러대는 다른 기타히어로들과는 달랐다. 그래서 오랜 기간 동안 그는 나에게 존경의 대상이었지만, 따라하고픈 영웅적인 존재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기타를 치고 듣는 시간이 차츰 쌓여가면서, 비비의 음악을 점점 더 자주 듣게 되었다.
그의 음악은 심심할 때 들으면 참 좋았다. 귀를 대번에 잡아채는 화려한 연주는 아니라해도, 그의 기타를 듣고 있으면 마치 친근한 흑인 할아버지가 맥주 한잔을 앞에 놓고 재미난 얘기를 풀어놓는 것 같아 듣기가 좋았고 또 질리지가 않았다.
그는 훌륭한 스토리텔러가 그러하듯이 완급조절에 무척 능했고, 이야기의 본질을 호도하는 어떠한 겉멋이나 속임수도 쓰지 않았다.
그가 기타를 칠 때면 그의 신체가 사물로 확장된 듯한 느낌을 받곤 했다. 그는 말하는 것처럼 연주했고, 그의 기타 루씰의 소리는 그의 풍만한 몸집과 화통한 목소리와 몹시 잘 어울렸다. 그는 노래 소리와 기타 소리가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것처럼 공연을 했다.
돌아가시기 전에 연주를 꼭 직접 라이브로 듣고 싶다는 꿈이 있었는데, 이젠 이룰 수 없게 되었다.
아쉬운 마음에 제일 좋아하던 그의 공연을 유튜브에서 반복재생해놓고 맥주 한잔을 올렸다.
바람이 선선한게 왠지 블루스를 듣기 딱 좋은 밤이어서 늦은 시간에도 염치없이 볼륨을 살포시 올려보았다. 비비는 죽어도 은퇴같은 건 하지 않을 거라고 했는데, 왠지 저 하늘에서도 천사들을 상대로 흥을 내며 기타를 연주하고 있을 것 같다는 상상을 해봤다. 물론 그의 옆에는 먼저 떠나온 그의 블루스맨 친구들이 나란히 앉아 기타솜씨를 뽐내고 있을 것이다.
B.B. King(Blues Boy King)이라는 이름의 탄생 비화.
멤피스의 트랙터 운전사이던 라일리 비 킹은 소니보이 윌리엄슨의 라디오쇼에 출연을 하게 되면서 기회를 잡는다. 이후로 그는 여러 클럽들에서 정기적으로 연주하게 되었는데 이윽고는 멤피스 라디오 방송국인 WDIA에서 King’s spot이라는 타이틀로 본인의 쇼를 진행하기에 이른다.
귀를 잡아채는 예명이 필요했던 그는 처음에는 그가 노래하곤 했던 길거리의 이름을 붙여 Beale street blues boy라는 예명을 만들었으나 그것이 점차 줄어들어 Blues boy king. 즉 B.B. King이 되었다.
B.B. King의 기타 Lucille에 대하여.
루씰에 대한 유명한 일화. 1949년. 비비킹이 20세 초반의 청년이었던 어느날. 그는 알칸사스 주의 트위스트라는 도시의 나이트클럽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다.
엄청나게 추운 날이었기에 공연장 측에서는 댄스홀 한가운데에 쓰레기통 같은 것을 갖다놓고 거기에 등유를 반쯤 채워놓고 불을 피워놓았는데.. 두 명의 남자가 싸움을 벌이다가 그것을 자빠트려 버렸다. 불은 삽시간에 공연장 전체에 번졌고 비비킹을 포함해 모든 관객들이 허겁지겁 문으로 달려갔다.
비비킹은 밖으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는데, 다행이 몸에는 이상이 없었지만 분신과도 같았던 자신의 기타를 안에 두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불은 공연장 전체에 옮겨붙어서 건물이 폭삭 무너지기 일보직전이었는데, 비비킹은 죽음을 무릅쓰고 안으로 들어가 기타를 구해낸다.
그는 다음날 그 사고의 원인인 두 남자가 화재현장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죽었고, 그들이 싸운 이유가 클럽에서 일하는 한 여자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여자의 이름은 루씰이었고, 그 이후로 비비킹은 자신의 모든 기타에게 루씰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다.
윗 문장에서도 알 수 있다시피 루씰은 한 대가 아니다. 에릭 클랩튼의 블랙키나 스티비레이본의 넘버원같은 기타는 한 대씩 밖에 없지만 루씰은 비비킹이 자신의 손을 거쳐간 모든 기타에 붙여왔던 이름이다.
그가 생명을 담보로 구해낸 첫 번째 루씰은 당시 30달러 짜리 깁슨 L-30 어쿠스틱 기타였다.
이후로 50년대 후반이 되자 그는 깁슨의 할로우바디 일렉기타 라인인 ES시리즈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다양한 모델들을 거쳐서 결국 지금 쓰고 있는 기타의 원형모델인 깁슨 ES-355 기타에 정착하게 된다.
비비킹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f홀이 없는 검정색 할로우 바디(속이 통기타처럼 비어있는 바디)의 루씰을 얻게 된 것은 깁슨 사에서 1982년에 시그니쳐 모델을 만들어주고 나서이다. (f홀 – 기타나 바이올린, 첼로 등의 바디에 양쪽으로 뚫려있는 f자 모양의 울림구멍)
그는 깁슨 사가 그것을 만들 때 몇가지의 모디파이를 해줄 것을 부탁했는데 제일 특징적인 것이 기타의 f홀을 없애버린 것이었다. 그는 예전부터 f홀로 인한 피드백이 과도하게 발생하는 것이 싫어서, 원래 쓰던 기타들도 f홀 안을 헝겊으로 채워넣어 사용해 왔었다.
속이 비어있으면 공명은 좋아지지만, f홀의 피드백으로 생긴 하울링 때문에 날카로움이 떨어지는 단점이 있다. 비비킹은 좀 더 단단한 소리를 원했기 때문에 그걸 막아버린 것이었다. 요즘은 무게도 줄이고 공명도 살리기 위해 깁슨에선 체임버드바디라고 속을 파낸 기타를 만들어내고 있는데, 이걸 보면 비비킹은 시대를 한참 앞서간 것 같다.
루씰은 2005년에 한번 더 몸을 바꾸게 되는데.. 깁슨사가 비비킹의 80세 생일을 기념해 또 하나의 시그니쳐 모델을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깁슨 사에서는 프로토타입을 비비에게 생일선물로 주었는데 비비는 이걸 2009까지 잘 사용하다가 여름공연 때 도둑맞고 말았다.
그런데 2009년 10월 에릭 달이라는 기타 콜렉터가 라스베가스 전당포에 들렀다가 땀에 절고 때가 잔뜩 묻어있는 깁슨 할로우바디 기타를 하나 발견하고 구입하게 된다. 헤드스탁에는 시리얼넘버가 적혀있지 않고 PROTOTYPE이라는 글씨만 적혀있었는데 에릭 달은 깁슨사에 이 모델이 무엇인지 문의했다가, 그것이 도둑맞은 비비킹 본인의 오리지널 기타라는 놀라운 사실을 듣게 된다. 에릭달이 그에게 기타를 돌려주면서 수개월만에 루씰은 다시 비비킹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다.
B.B. King의 필청곡들.
The Thrill Is Gone (1970)
명실상부 비비킹의 최고 히트곡. 1951년에 로이 호킨스가 취입한 원곡을 1970년에 비비킹이 리메이크했다. 특유의 그루브가 몸을 들썩이게 만들며, 기타 솔로는 들으면 대번에 흥얼거릴 정도로 캐치하다.
공연 중에서는 역시 작고하신 게리무어와 함께 한 연주가 일품이다. 둘이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하듯이 기타를 연주하는데, 패기넘치는 젊은(?) 게리무어의 도전적인 어투를 비비가 넉넉하게 받아주면서 대화를 이끌어나가는 것이 참 재미있고 듣기가 좋다.
Chains And Things (1970)
비비킹의 곡 중에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곡이다. 대단히 멋진 분위기를 가진 곡이며, 드라마틱한 전개가 인상적이다. 중독성 넘치는 피아노리프는 캐롤 킹이 연주한 것.
When Love Comes To Town (1988)
Every Day I Have The Blues나 To Know You Is To Love You와 같은 명곡들도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전설들이 합작한 작품이기에 이 곡을 무척 좋아한다.
U2가 비비킹을 위해 만든 곡이며, 그들의 앨범 Rattle & Hum에 수록되었다. U2가 블루스곡을 만들었다는 것도 재미있지만, 그들의 하드한 락 사운드가 비비킹의 연주와 어우러지는 것을 듣는 것도 무척 재미있다.
*참조: 롤링스톤즈지 비비킹 특집, 비비킹 공식 웹사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