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이 시사회를 연 뒤부터 ‘물건이 하나 터졌다’는 소문이 이어졌습니다. 물론 간간이 ‘재미있는데 와 닿지 않는다’는 평도 섞여 있었지만, 아무튼 최근에 개봉했던 수많은 영화들에 비해 ‘베를린’이 ‘급이 다르다’는 느낌은 확실히 전달됐습니다.
사실 직접 보기 전에 오는 이런 호평은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이런 호평들에 발맞춰 기대치도 그만치 급격하게 상승하기 때문입니다. 기대치가 오른 상태에서 영화를 보면 실망하기도 쉽고, 사소한 꼬투리도 크게 보이는 면이 있죠. 반면 많은 사람들이 ‘너무 기대는 안 하는 게 좋겠다’고 말하는 영화에서는 의외의 장점이 보이곤 합니다. (그래서 요즘 홍보사 직원들은 시사회에 오는 기자들에게 ‘너무 기대는 하지 마세요’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고도 합니다. 무조건 걸작이라고 칭찬하는 게 능사는 아니라는 거죠.)
아무튼 결론부터 말하자면, ‘상당히 큰 기대를 하고 봤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물건’이라는 데 동의합니다. 사실 그 정도를 넘어서 최근 수년 내 개봉했던 한국 영화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영화였습니다.
베를린의 한 호텔. 러시아인 무기상과 아랍 테러리스트, 그리고 북한 요원 표종성(하정우)이 한 객실에서 비밀리에 모의를 하고 있습니다. 북한산 무기를 아랍 조직에 팔기 위한 비즈니스 미팅인 것이죠. 호텔 밖에는 이 미팅을 감시하는 정진수 반장(한석규)의 국정원 요원들이 대기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현장을 덮치려는 순간, 스스로를 모사드(이스라엘 정보기관) 요원들이라고 밝히는 무리가 먼저 방을 습격합니다. 이들은 북한 요원인 표종성에게 ‘너에겐 관심 없으니 자리를 뜨라’고 요구하죠. 정진수 팀은 방을 떠난 표종성을 추적해 결국 머리에 총을 겨누기까지 하지만 현장에서 놓쳐 버리고 맙니다.
국정원 베를린 지부는 초상집. 반면 베를린 주재 북한 대사 리학수(이경영)은 대체 어디서 정보가 샌 것일까 의아해하고, 북한은 베를린 대사관에 뭔가 문제가 있다는 판단 아래 군부 실세의 아들이며 엘리트 요원인 동명수(류승범)를 파견합니다. 이 과정에서 대사관 통역요원이며 표종성의 아내인 련정희(전지현)에 대한 의혹이 발생합니다.
‘베를린’은 굳이 강점과 약점을 말하기가 힘든 영화입니다. 우선 시나리오 단계에서 완결성이 압도적으로 뛰어납니다. 한마디로 ‘말 안 되는 장면’, 그리고 감정선을 강화한답시고 영화의 스피드를 떨어뜨리는 지루한 장면이 없습니다. 액션이 화면을 지배하고, 질주하는 스포츠카에서 물건을 떨구듯 관객에게 액션 틈틈이 사건을 툭툭 던지는 진행이지만, 그렇다고 뒤에 가서 설명되지 않는 장면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한마디로 빈틈이 거의 없습니다.
이야기 부분이 이럴진대 액션에 대해 할 말이 있다면 거짓말일 겁니다. 그 부분은 이미 10년 전에도 국내 일인자였던 류승완 감독의 작품이니 말입니다. 배우들은 더더욱 할 말이 없죠. 많은 사람들이 한석규-하정우-류승범-전지현이라는 라인업에서 이미 사기 라인업이라고 생각했을테니 말입니다. 여기에 이경영 곽도원 최무성 김서형 같은 조연진들까지, 짜임새로는 ‘도둑들’을 능가하는 올스타팀입니다.
특히 90년대의 최강 멜로드라마 주역에서 ‘색깔 있는 악역’ 중심으로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짜고 있는 한석규의 모습도 흥미롭지만, 이 영화에서 하정우와 류승범이 뿜어내는 에너지는 21세기 이후 한국 영화 최고의 대결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듯합니다. 전부터 류승완 감독의 능력 중에서 ‘류승범이라는 동생을 갖고 있다’는 점이 적잖은 부분으로 작용한다는 생각을 했는데, ‘베를린’에서 이 생각이 더욱 굳어집니다.
(얼마 전 ‘무비위크’에 ‘왜 돈 들인 영화일수록 촌스러워질까’ 라는 식의 글을 쓴 적이 있는데, 아마도 ‘베를린’을 보고 난 뒤에는 그런 글을 쓰기 힘들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아랫부분, 스포일러라고 할 수 있는 내용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영화 보시는 데 방해될 것 같진 않습니다. 혹시나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영화를 보는 게 좀 불편하신 분이라면, 미리 보시는 것도 좋을 정도 수준입니다.
이번엔 알아서 판단하시길.
그리고 어쩌나 저쩌나, ‘베를린’은 강추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한국판 본 시리즈’ 라고 말합니다. 물론 이 영화를 보고 제이슨 본이 생각나지 않은 사람이라면, 아마도 ‘본 시리즈’를 단 한편도 보지 않은 사람일 겁니다. 하이테크 시대에 걸맞지 않은 맨손 격투 위주의 액션 신, 그리고 숨 쉴 새 없이 흘러가는 진행 속도, 마지막으로 개개인의 의사와는 아무 상관 없이 국가와 조직 사이의 ‘큰 그림’ 속에서 희생자가 되기를 거부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라는 점 등에서 이 영화는 ‘본 시리즈’의 그림자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하지만 과연 ‘본 시리즈’가 한 획을 그은 뒤, 스파이 액션 장르의 영화 가운데 그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영화가 얼마나 될까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일단 본 시리즈보다 훨씬 더 긴 역사를 갖고 있는 007 시리즈가 아예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린 채 ‘007판 제이슨 본 시리즈’로 간판을 바꿔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점을 두고 다니엘 크레이그 시대의 제임스 본드 무비들을 비판하는 사람은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몇몇 국내 관객들은 ‘베를린’을 가리켜 ‘본 시리즈의 복사판’이라고 맹렬히 비난하는 듯합니다. 몇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이런 생각을 가장 강하게 하는 분들은 본 시리즈와 ‘베를린’ 외에는 본 영화가 거의 없는 분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마도 미국 드라마’24’와 ‘베를린’만을 본 사람이라면 “이거 뭐야. ’24’의 복사판이잖아?”라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죠.
(이런 예는 사실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음악 쪽 얘기지만, 한 10년 전에는 “모든 애시드 재즈 뮤지션들은 스티비 원더의 표절”이라는 농담이 유행하기도 했죠. 90년대에는 신해철이 “오오 듀스는 서태지의 표절이구나”라는 말로 댄스 뮤직에 무지한 사람들을 비꼬기도 했고. 또 일부 관객들은 ‘한국판 본 시리즈’라는 말을 칭찬으로 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밖에 의외의 반응 중에는 ‘와 닿지 않는다’ 는 것이 있었는데, 오히려 이 영화의 강점으로 ‘불필요한 감정선을 제거했다’는 점을 꼽는 저로서는 참 이해하기 힘든 반응입니다. 하정우와 전지현의 묘한 부부 관계는 많은 부분에서 구체적인 설명을 담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불필요한 설명은 생략한다’는 입장인데, 그 부분이 더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어떤 이유에서든 당과 국가의 명령이 인생에 있어 최우선인 ‘공화국 영웅’ 표종성과 부부로 살기 위해서 련정희는 많은 것을 희생했을 겁니다. 이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부부로 맺어졌는지, 그리고 첫 아이는 어떻게 되었는지 같은 쪽은 관객의 상상력이 채워 줘야 할 부분이죠. 영화상으로는 전지현의 쓸쓸한 눈빛이면 충분하지 않았나 합니다.
(이 부분에서 전지현의 발전은 참 놀랍습니다. 이미 인생에서 많은 것을 기대하지 않게 된 여자. 수많은 상처를 안으로 향하게 해서 가슴 속 응어리가 천근은 될 듯한 여자의 눈빛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청승맞으면서도 강인함을 품은 이런 여자의 역할을 전지현이 제대로 연기하는 날이 올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역시 세월과 경험은 많은 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생각이 다시 한번.)
엄밀히 말해 가장 동기가 불분명한 인물은 한석규가 연기하는 정진수 반장인데, 이 부분은 표종성의 대사인 “난 외려 당신(정진수)이 왜 이 일에 목숨 거는지 이해가 안 되오”로 만사 OK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사실 어디에나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죠. (영화 보면서 엄청나게 웃었던 장면.)
그밖에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는 평에 대해서는 감히 반박하기 쉽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모사드와 CIA, 아랍 테러 조직이 한 자리에 있으면 대략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 북한의 해외 대사관이 외화벌이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등에 대해 사전 이해가 없는 사람(더 단적으로 말해 모사드가 이스라엘 정보기구의 이름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에게 이 영화의 도입부는 그리 친절하지 않습니다. 아니, 아마도 이 영화 전체가 그리 친절하지 않게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영화 앞부분에 ‘모사드’ ‘슈퍼노트(자막에는 그냥 ‘위조지폐’라고 나왔죠)’ 같은 단어들이 아무 추가 설명 없이 등장하는 걸 보면서 ‘이거 말 좀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아니나다를까, 여기에 대한 불만이 적잖이 있는 듯합니다.
이 맥락에서 더 많은 관객을 위해서 좀 더 친절한 영화를 만들었어야 했다는 의견은 일리가 있습니다. 아마도 이런 부분은 감독보다는 제작자가 더 강력한 입장을 내세웠어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하지만, 아무튼 이런 ‘불친절함’이 약점이라면 약점일 수 있겠습니다.
(뭐, 그런데 “대체 블라디보스토크는 생뚱맞게 왜 가는 거냐?”는 수준의 관객들도 적지 않은 것 같고… <- 영화를 보신 분이라야 무슨 말인지 아실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리하자면, 한국 영화가 발전하는 데 있어 이미 세계적으로 성공한 작품들을 벤치마킹하는 과정은 당연히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베를린’과 본 시리즈의 관계는 ‘R2B’와 ‘탑 건’의 관계 혹은 ‘타워’와 ‘타워링’의 관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전적이고 깔끔한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취향도 있겠지만 ‘베를린’을 보지 않고 2013년에 영화를 봤다고 말씀하시면 참 곤란할 듯 합니다. 초대형 배급사의 극장 싹쓸이 만행이 불쾌하신 분들이라도, 그런 어마어마한 힘이 이런 영화를 만드는 데 쓰인다면 고개를 끄덕이실 수 있지 않을까요.
P.S. 많은 분들의 생각과는 달리 속편이 만들어질 가능성은 별로 없다고 하네요.
P.S.2. ‘세계에서 가장 밥을 맛있게 먹는 배우’ 하정우의 솜씨는 그 짧은 시간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