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3년 12월 16일, 보스턴의 항구 한켠에서 보스턴 시민들이 홍차 상자 342개를 바다에 던져 버리는 이른바 ‘보스턴 티 파티’ 사건이 발생한다. 많은 사람은 이 사건이 식민지배를 하는 영국에 미국인들이 최초로 ‘자유와 독립’을 위해 항거한 첫 사건이라 알고 실제로도 그렇게 교육받지만 실제로 일어난 이벤트는 쫌, 아니 아주 많이 다르다.
왜곡된 보스턴 차 사건의 진실
1773년 봄, 영국 의회가 통과시킨 이른바 ‘홍차법(Tea Act)’는 사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듯이 ‘미국인들이 즐겨 마시는 홍차에 무리한 세금을 부과’한 게 아니라 외려 가격을 낮춘 법안이었다. 이 법안은 엔드 유저 가격, 즉 소비자가를 통제한 법안이었다. 미국의 소비자들은 기존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그것도 영국 본토의 소비자들보다 반값이나 싸게 홍차를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법안은 원래 동인도회사로부터 정식루트를 거쳐 수입되는 홍차가 아니라 네덜란드로부터 밀수되어 들어오는 홍차를 비싸게 유통시키는 영국 본토와 식민지의 업자들을 통제하기 위한 법안이었다. 따라서 1767년에 통과된 ‘타운센드법(사업자 간 거래 시 1파운드 당 3펜스의 세금을 징수하는 법)’은 그대로 유지를 하고, 대신에 소비자가를 확 낮춰버린 것이다.
다만 이 법안은 두 가지 문제를 야기시켰는데, 하나는 부유한 사업가들(그리고 중간 유통상인들, 그리고 양아치들)의 반발이었고, 다른 하나는 식민지에 관련된 법안임에도 영국 의회에서 일방적으로 통과시킨 점에 대해 자신들의 존재가 무시당했다고 생각하게 된 식민지 지식인들이었다. 사실 영국의 식민 통치는 일방적이라기보다는 식민지의 각 지자체와 협의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특히 영국의 미국에 대한 식민 통치는 당시 영국의 모든 식민지 중 가장 관대한 정책으로 일관되고 있었다.
1773년 이전까지 북미지역의 식민통치는 영국의회와 식민지의 각 대표가 함께 모여 사안을 토론하고 결정하는 것이 일종의 관례였다. 식민지 출신이라 해서 특별히 차별대우를 받지도 않았고, 영국의 주요 공직이나 군의 요직에 진출하거나 지식인으로 학계에 진출한 사람들도 다수 존재했다.
전쟁으로 국고가 거덜 난 영국, 증세를 실시하다
미국 독립운동의 배경은 프랑스-인디언 전쟁에 있었다. 1755년에서 1763년까지 벌어진 이 전쟁은 북미대륙에서 오하이오 강 주변 영역을 둘러싸고 영국과 프랑스가 식민지 쟁탈을 벌인 전쟁이다. 또 영국과 프랑스가 유럽 본토에서 대결한 7년 전쟁의 일부이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영국이 승리하고 북미지역, 특히 북미 동부지역의 지배력을 강화하게 된 전쟁이기도 하지만…
문제는 7년에 걸친 전쟁 덕분에 재정이 크게 악화되어 버렸다. 영국은 7년간의 전쟁으로 인한 피폐를 도저히 자국의 세금으로만 감당하기 어려워진다. 다른 식민지에서 징수하는 세금으로도 말이다. 이런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 중 하나로 영국 의회는 식민지에 직접세를 부과하는 방향을 선택하게 된다. 1764년 설탕조례를 제정하고 이듬해인 1765년에는 인지조례를 통과시켰다.
특히 문제가 되었던것은 인지조례였는데 식민지에 유통되는 모든 종이에 3페니의 인지를 붙여야 한다는게 법안의 핵심이었다. 여기에 더해진 것이 1767년의 타운센드 법안이다. 각 식민지인들은 이에 크게 반발했는데, 특히 북미 동부지역의 식민지인들의 반발이 심했다. 이들은 프랑스-인디언 전쟁에 직접 참전했다. ‘7년간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함께 싸웠건만 그 공로를 인정받지도 못하고 전리품이나 영토를 보상받지도 못했는데 돌아오는 보답이 세금이냐’며 격분했다. 반대로 영국인들은 ‘우리는 북미지역뿐 아니라 유럽 각지와 카리브해에서도 싸웠는데 그 정도 고통 분담도 못해주냐’며 불만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작 1773년에 홍차법이 통과되었을 때 대부분의 북미 식민지인들은 이 법안에 그리 큰 불만을 품지는 않았다. 당시 미국인들은 오늘날 그들이 커피를 선호하는 것과는 달리 홍차를 즐겨 마셨는데, 그 홍차를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 건 여러모로 환영할 만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홍차로 돈을 버는 기업가들과 중간 유통 과정에서 마진을 챙기는 도매상들, 그리고 밀수꾼들을 제외하면 말이다.
1773년 12월 16일, 홍차 수입업자들은 양아치들을 데리고 원주민으로 ‘분장’해서 보스턴 항구에 정박해있는 홍차를 실은 배에 다가가 총을 쏘고 방화를 하며 홍차 상자 342개를 바다에 던져버린다.
이게 얼마나 대단한 양이냐면 자그마치 9만 2,000파운드나 된다. 환산하면 대략 42톤이라는 이야기. 42톤이다, 42톤! 이 날 동인도회사의 손실액은 지금 가치로 따지면 대략 11억 원 정도 된다. 그 양이 너무나도 엄청났기 때문에 당시 신문에서는 ‘보스턴 항 앞바다의 색이 탁하게 변했다’는 멘트를 날렸을 정도. 이 부분은 보스턴에서 시내 투어를 하다보면 가이드들이 여전히 써먹는 레파토리이기도 하다(물론 보스턴 항의 바닷물 색이 탁한 건 다른 해양생물학적 이유가 있지만 그건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루기로 하고).
애국운동으로 왜곡된 반달리즘
이 사태는 영국의 본토인들과 식민지인들 모두에게 엄청난 충격을 선사했는데, 양측의 반응은 모두 ‘뭐야 XX 미친 거 아냐?’였다. 그뿐 아니라 훗날 미국 독립운동의 상징으로 군림한 조지 워싱턴이나 벤자민 프랭클린, 패트릭 핸리 등 식민지 지식인들이 이 사태를 ‘용서할 가치도 없는 반달리즘’이라며 맹비난했다. 당시 미국의 신문들의 기사보도나 칼럼니스트들의 평론 모두 ‘이런 미친, 어이가 아리마셍’ 일색이다.
물론 미국의 역사교육에 있어 이 부분은 대학 전공자 레벨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절대 접하기가 힘들다. 공립과 사립의 초중등 교육기관에서는 모두 보스턴 티 파티가 영국의 압제에 항거한 독립정신의 발현이었으며 워싱턴이나 프랭클린, 헨리 등이 이를 대환영했다고 가르친다.
보복으로 1774년, 영국은 해군 함대를 동원하여 보스턴 항을 폐쇄해버린다. 이 뿐이 아니다. 메사추세스의 자치정부를 해산시키고 보스턴에서 잃은 손실액을 메사추세스 자치령에서 변상할 때까지 보스턴 항에서의 모든 활동도 금지시켜버린다. 그리고 대다수의 당시 미국인들은…
이게 당연한 조치라고 여겼다. 이 사태로 인하여 폭등해버린 홍차 가격에 절망했고, 저렴하게 마시지 못하게 된 것에 격분했다. 이 사태를 초래한 기업가들과 중간 유통 상인들은 사람들이 던지는 돌팔매를 피해 다녀야 했다. 죠지 워싱턴은 홍차를 바다에 처넣은 무리들을 ‘북미인들의 수치’라고 맹비난했고, 벤자민 프랭클린은 시민들에게 ‘영국에 홍차 값을 변상해주자’고 주장했다. 실제로 벤자민 프랭클린과 시민들은 지금 가치로 환산하면 약 11억 원에 달하는 금액을 모금하여 영국 의회에 전달한다.
그러나.
7년 전쟁 이후 잦아진 식민지 대표들의 불만 표출에 염증을 느끼기 시작한 영국의회가 이를 칼같이 거절해버린다. 영국은 그동안 느슨하게 통치를 해왔던 정책을 버리고 북미식민지에 대해 본격적으로 ‘직접통치’로 전환할 생각을 품게 된 거다.
1774년의 보스턴 항 폐쇄는 미국의 다른 항구도시에서 보스턴 티 파티와 유사한 성격의 폭동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에 맞서 영국은 항구 폐쇄 및 지자체 정부들의 해산으로 대응한다. 뉴욕, 애나폴리스, 찰스턴, 버지니아, 사우스 캐롤리아나 등. 사태는 점점 심각하게 돌아가고 급기야 유혈사태로 번진다. 이를 원만히 해결해보려 영국에 서한을 보내거나 직접 방문을 했던 북미의 지식인들은 모두 말 그대로 ‘문전박대’를 당하고… 결국에 이들은 첫 독립 의회, 즉 ‘Continental Congress’를 결성한다.
다만 당초 독립의회의 기본 결성 취지는 북미의 영국 식민지 이탈이 아니라 북미 식민지에 대한 영국의 직접적인 간섭을 프랑스-인디언 전쟁 이전으로 돌리고 자치권을 확보하며, 영국 의회와 식민지 대표들이 식민지 정책을 함께 풀어나간다는 것이었다. 문전박대를 당하는 처지에 놓였음에도 식민지의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은 대부분 ‘영국과 함께 간다’는 취지를 버리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식민지 지식인들로부터 등을 돌린 영국은 독립 의회의 결성에 크게 반발했다. 이들은 북미 지식인들의 행동을 대영제국과 영국왕에 대한 ‘배신행위’로 간주한다. 그리고 영국의회의 이 같은 자세는 독립 의회가 영국에서 독립을 꾀하는 계기를 마련해주게 된다. 미국의 독립운동은 이렇게 시작됐다.
p.s.
사실 보스턴 티 파티라는 명칭도 후대에 만들어진 거다. 1823년에 미국의 극우파 언론이 이 사건을 미화하면서 붙인 것이고, 영국의 일방적인 압제에 항거한다는 이미지도 1830년대부터 살이 붙기 시작하여 1840년대부터 활발하게 일어난 이른바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 미국이 영토를 확장시키는 것은 신이 허락한 운명이라는 극우파적 슬로건)’과 젊은 아메리칸 운동이 과격해지기 시작할 무렵에 공공연히 나돌게 된 거다.
원문: 김찬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