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성능 좋은 휴대용 랜턴을 샀다고 하자. 근데 랜턴이 별로 어둡지 않을 때는 필요 이상으로 밝게 비추고, 정작 칠흑같이 어두울 때는 전혀 빛을 비추지 않는다면 그 랜턴을 불량품이라고 생각하지 않겠는가?
시장에서 건강에 좋은 비싼 소금을 샀다고 하자. 그런데 이 소금도 음식에 이미 소금이 뿌려져 있을 때는 굉장히 짠맛을 내는데 소금이 전혀 뿌려져 있지 않은 음식에서는 전혀 짠맛을 내지 못한다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기독교인들은 자신의 신앙이 시대와 역사를 초월해 영원히 변함없는 유일무이한 진리를 믿는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상한 건 그들의 신앙은 자신이 살아가는 동시대인의 삶과 역사에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고, 반응도 없는 철저히 분리된 신앙이란 것이다.
난 한국에서 목회자들이 거의 ‘칼빈’급으로 존경하는(때로 이분들의 칼빈 사랑과 존경은 예수의 권위보다 앞서는 듯한 느낌이 든다) 신학자들이나 유명한 목회자들을 볼 때 그런 이상한 생각이 든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던 우리 근현대사의 식민지배, 군부독재 같은 수많은 비극과 권력의 폭압, 학살, 야만과 광기의 시대에 어쩌면 아무런 목소리도, 빛도 비추지 않고 침묵과 방관 속에 그런 현실들을 외면하면서 연구실이나 목회에만 전념하며 탁월한 학문적 업적과 목회적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서 그들이 ‘역사적 재평가’없이 어떻게 그렇게 변함없이 후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지 그게 무척 궁금했다.
심지어 가장 가까운 가족의 가슴아픈 고백과 폭로를 통해 드러난 저명한 신학자의 인격적 결함에도 그건 모함일 뿐이며 설사 그런 허물이 있다하더라도 그의 업적과 광채는 더욱 빛을 발한다며 맹목적인 존경을 보이는 목사들과 신학자들을 볼때 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세례요한은 왜 죽었을까?
저들은 시대와 삶과 분리되어 ‘시대와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완벽하게 그 자체만으로 존립하는 진리’라는 게 가능하다는 것을 믿는다는 생각에 경이로운 마음까지 든다(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경악’에 가깝지만).
그들은 세레요한이 왜 죽었는지 모르는 걸까? 세례요한은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드는 헤롯왕실의 도덕적인 부패를 비난하다가 옥에 갇히었고 결국 죽음까지 이르게 되었다(막6:17~29). 세례요한은 그저 오지랖이 넓어서 ‘헤롯왕실’의 정치에 주제넘게 간섭하다가 죽음을 당한 것일까?
그가 부패하고 혼란스런 세상사를 멀리하고 산속에 들어가서 ‘성경필사’만 하거나, 동굴에서 뜻 맞는 사람들을 모아 조용히 ‘제자양육’만 했다면 죽을 일은 없었을 것이다. 이런 유사한 예들은 특히 선지서들을 보면 비일비재하게 나온다. 많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왕들과 지도자에게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며 ‘바른 말’을 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개인의 삶과 개개인의 삶들이 모여 영향을 주고받는 시대와 사회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는 복음이라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장난 랜턴, 맛을 잃은 소금이 어떻게 진짜 복음일 수 있을까?
이런 궁금증은 세월호 참사를 비롯해서 이 시대의 수많은 불의와 아픔과 비극에도 여전히 침묵하고 (말을 차라리 안 하는 게 나은 목회자들도 있지만) 잠잠히 연구와 목회에만 전념하는 유명한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을 볼 때 더욱 증폭된다.
예수님의 경고
내 궁금증이 너무 수준이 낮아서 고매하신 신학자들과 목사님들께서는 코웃음을 칠지 모르겠으나 난 성경에 기록된 이 말씀이 더 상식적이고 납득 가능한 진리를 말한다고 생각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그 짠 맛을 되찾게 하겠느냐? 짠 맛을 잃은 소금은 아무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세운 마을은 숨길 수 없다. 또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다 내려놓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다 놓아둔다. 그래야 등불이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환히 비친다.
- 마태복음서 5:13-15 새번역
시대와 삶과 분리되어 ‘세상과 동떨어진’ 영원한 진리를 믿는 신앙이 가능하다고 믿는 그 믿음이 내겐 언제나 기묘하고 이상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런 믿음은 ‘아무 데도 쓸 데가 없으므로, 바깥에 내버려서 사람들이 짓밟을 뿐이다’. 우린 지금 그런 광경을 한국 사회 도처에서 목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