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피할 수 없다
난 고등학교에서 실업 과목으로 상업을 배웠다. 대형 입시학원의 전국모의고사 상업과목 출제위원이신 열정적인 선생님 (심지어 나중에 내 결혼식 주례를 서주신 각별한 선생님)께서 특별 보충수업까지 해 주시는 바람에 많은 친구들이 학력고사에서 상업을 선택했지만, 난 프랑스어를 선택했다.
입시제도가 왜 그 모양이었는지 모르겠지만 당시는 실업 과목과 제2외국어를 같은 바구니에 섞어 놓고 한 과목을 선택하게 할 때였다. 물론, 내가 외국어를 좋아하기도 했지만, 상업 과목에서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부기(Book keeping)였다. 인문계 고등학교 상업시간에 배우는 것이 3급부기, 상고에서 배우는 건 2급부기, 상대에서 배우는 것이라야 1급 부기 정도가 된다던데, 난 왜 3급도 이해를 하지 못했을까?
바로 부기 첫 시간부터 분개(journal entry)를 이해하지 못 해서 그랬던 것이다. 분개라는 것이 무슨 거래(transaction)가 생기면 이것이 회계적 거래냐 아니냐를 따져서 회계적 거래면 정해진 약속에 따라 차변과 대변을 나눠 적어두는 것이다. 여기서부터 모든 회계처리가 시작되는 것이며, 이것들을 모아서 일계표(또는 월계표)가 되고, 총계정원장으로 옮기고, 시산표를 작성한 후 대차대조표와 손익계산서를 만드는 것이다. (물론, 이론적으로 이렇다는 얘기고, 실무에서는 분개만 하면 컴퓨터가 알아서 집계한다.)
그런데, 분개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생각해 보라. 총을 쏘지 못하는 병사에게 각개전투, 소대 공격과 방어 뭐 그런 것들을 죽어라 가르치면 뭐하겠나? 입만 아픈거다… (첫 직장인 육군에서 7년을 보냈더니 무슨 예를 들 때 군대 얘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이해해 주시길…)
중학교 때 실업과목으로 공업을 배운 나와 달리, 고등학교 동기생 가운데 꽤 많은 친구들이 중학생 시절에도 상업을 배웠다고 하더니, 부기 시간에 분개를 묻는 선생님 질문에 척척 대답을 했다. 선생님은 애들이 분개를 잘 아는구나 생각하셨는지 다음 단계로 넘어가셨고, 내 상업 과목은 거기서 안녕을 고했다.
그러나, 난 고민하지 않았다. 어차피 학력고사는 프랑스어로 보면 되고,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부기 따위가 내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겠냐 하는 생각에서였다. 대학에서 포르투갈어를 전공한 나는 대다수 어학 전공자들이 선택하는 부전공인 경영, 무역이 아니라 법학을 선택해서 부기를 또 한번 멋지게 피해갔다. 하하하…
피한 것 같아도 피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진짜 피한 걸까? 꼭 그런 것은 아니었다… 군생활 하는 동안, 선배의 조언을 따라 외대 무역대학원 입학한 나에게 첫번째 반격이 있었다. 주로 무역회사 대리, 과장급이던 동기 형님들에 비해 전혀 무역에 대해 경험이 없던 나는 모든 수업이 따라가기 힘들었다. 실무적인 것들은 이미 다 아는 것으로 전제를 깔고 시작하기 때문이었다. 키 183cm에 체중이 64kg밖에 되지 않을 정도로 매일 밤낮이 전쟁인 상황이었다.
그래도 다른 과목들은 나은 편이었다. 문제는 ‘선수과목’에 있었다. 무역대학원이라는 것의 설립취지에 맞춰, 무역 일을 실무에서 하고 있지만 전공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보니 커리큘럼에 기본 중에서도 기본과목을 설정해 둔 것이다. 학부에서 부전공이든 교양선택이든 상경대학에서 같은 과목을 수강한 사람들은 면제를 받았지만, 나처럼 뺀질(!)거린 학생들은 추가 수강을 해야 했다.
선수과목은 모두 3과목으로 수업을 듣고 시험을 치뤄 기준 이상 점수를 받으면 학점을 주는 것이 아니라 ‘P’라는 등급을 성적표에 찍어 준다. 그냥 Pass했다는 뜻이다. 그러지 않아도 과정 자체가 벅찬 나에게는 학기마다 남들보다 한 과목씩 더 수강해야 하는 부담이 덧씌워진 것이었다. 경제학원론, 경영학원론 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문제는 ‘재무회계’ 과목이었다.
미국에서 회계학 박사과정 지도교수를 하다 그 얼마 전에 귀국하신 교수님은 어차피 회사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이니 기본적인 회계지식은 있을 거라고 판단하신 모양이었다. 재무회계 시간에 ‘기업가치평가’를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웬만한 회계지식을 다 갖춘 다음 실전 단계에서 M&A를 한다든지 할 때나 적용하는, 그야말로 회계수업에서 마지막 단계에 있는 내용을 선수과목에서 감행(?)하신 것이다.
분명, 현직에 있는 동기 형님들도 무척 당황하고 고달파 했었다. 하지만, 자존심에 말은 못하고 묵묵히 따라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나는 어떠했겠는가? 지금도 기말고사 시험문제가 기억난다. ‘롯데칠성’의 재무제표 한 세트를 나눠주면서 내건 문제는 단 한 줄, ‘롯데칠성의 기업가치는?’이었다. 물론, 문제만 기억나고 답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진정한 시련은 실전에서 찾아온다
그래도 대학원 때는 옆 자리에 형님들이나 있었지… 두번째 시련은 오롯이 나 혼자 감당해야 했다. 1999년 예편하고 나서 민간인으로서의 첫 직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강원도에 있는 수산물 가공공장과 임가공계약을 맺고 반가공품을 일본에 수출하러 본사에서 혼자 파견을 나간 것이다.
당시 전임자는 모 그룹에서 엑셀 사내강사를 지냈다는 과장님이었는데, 모든 문서를 엑셀로만 만들 정도로 귀신 같은 실력을 가졌었다. 파견후 한동안은 그분이 만들어 놓은 양식에 매일매일의 원자재, 제품 재고와 매출, 수금현황만 잘 기록해서 넘기면 되어서 별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본사에서 월별 손익계산서를 작성해 올리라는 것이 아닌가?
남이 만들어 놓은 손익계산서를 보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런데 그걸 만들어 내라고? 하늘이 깜깜했지만, 맞아 죽는 것보다 더 아픈 것이 쪽 팔려 죽는 것 아닌가. 과장 후임으로 (나이는 비록 다른 신입들보다 두어살 많았지만) 신입사원을 내려 보내면서 사업부장님이 ‘예비역 육군 대위’라서 보내는 것이니 잘 하라고 하셨는데…
하여간 그때부터 밤을 새워가며 공부를 했다. 처음으로 손익계산서를 뚫어지게 보기 시작했고, 그제서야 손익계산서 하나를 만드는데 수 많은 계정과목의 정의를 익혀야 하고, 제조원가보고서라는 것을 먼저 작성해야 하는지를 알았다.
첫번째 손익계산서를 본사에 보고하니, 회계팀에서 두 분이 공장에 내려왔다. 도대체 어떤 놈이 이 따위로 보고를 하냐고… 처음에는 잡아먹을 듯이 난리였지만, 24시간 돌아가는 공장에서 새벽에 원자재 받으랴, 제조공정 살피랴, 수출 선적하고 내수 판매하랴, 대금 회수하랴… 혼자서 정신이 없는 현장을 보더니 며칠 동안 함께 여관에 묵으면서 차분히 관련 지식을 가르쳐 주고 떠났다. 책에서 말하는 한줄 한줄이 실제 현장에서 무엇과 대응하는지 알게 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한번은 끝을 보자
세번째 도전은 내 스스로 만들었다. 2000년에 종합상사에 입사하여 하던 일이 전통적인 상품교역(trade)이 아니라 사업개발(project development)였기 때문에 별의별 사업들을 접하게 되었다. 사업개발자(developer)는 각종 사업계획을 제안 받아 검토하기도 하고 자기가 사업계획을 수립하여 제안하기도 하는 일이다. 핵심은 결국 ‘사업성’을 파악하는 것인데, 사업성을 검토하고 나면 간단하게 IRR[1], NPV[2], 회수기간 등의 형태로 재무적 타당성을 보고해야 한다.
이런 것은 남이 만들어 준 엑셀 파일에 약간의 기초적 재무관리 지식을 어깨너머로 배우고 엑셀 함수 몇 개만 익혀두면 흉내내기 정도는 일단 가능하다. 중요한 것은 어떤 사업에 대해 한번 깊이 있게 이해하려면 Free Cash Flow, 예상 재무제표 등을 엑셀 파일을 열어서 고치거나 아예 새로 만들어야 하는데, 회계를 모르면 어디서부터 손을 댈지 모르는 난감한 상황과 종종 맞닥트리게 된다.
그럴 때마다, 입사할 때부터 무슨 T/F니 Desk니 하는 허접스런 조직에만 속해 있던 나는, 심봉사 젖동냥 하듯 이 팀 저 팀 선배들에게 물어보러도 다니고, 이 책 저 책을 찔끔찔끔 참고하고는 했었다. ‘재무제표를 하룻밤 새 이해하는 법’, ‘회계 일주일만 하면 누구만큼 한다’류의 책들을 꽤 보다가 지쳐 버렸다.
도대체 어디까지 알아야 회계를 안다고 할 수 있는가? 영업하는 사람이 회계 쪽으로 전문가가 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영업에 필요한 회계 정도는 화끈하게 끝내 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여러가지 방법을 알아봤지만, 내 고민에 딱 맞는 맞춤 과정이나 책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무리수를 두기로 했다.
어떤 분야에 대해 어디서 어디까지 공부해야 할 지 잘 모를 때, 자격증이란 것이 유용하다. 자격증 자체가 유용한 것이 아니라, 자격증을 만들면서 정한 공부의 범위와 수준이 대체적으로 공감할 만한 것이기에 유용하다.
군문을 나설 무렵, 무역대학원을 졸업했지만 무역실무를 전혀 모르는 남모를 고충을 타개하기 위해 국제무역사, 무역영어 자격증 공부를 했다. 지금까지 단 한번도 그 자격증을 활용해 본 적은 없지만, 자격증 공부의 유용성에는 확신이 있었다.
이번에는 미국 공인회계사 과정으로 선택했다. 미국 공인회계사 과정은, 일종의 고시인 우리나라 공인회계사와는 달리, 몇 년씩 죽어라 공부해도 될까 말까 하는 수준이 아니다. 대학에서 회계 수업을 착실히 듣고 웬만한 정도의 시험 준비를 하면 합격하도록 만들었다. 즉, 최소한의 자격만 갖추면 회계사라는 직업에 입문하게 하되, 현업에서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진정한 실력자들만 살아남으라는 미국식 제도다.
한 달 월급보다 많은 돈을 고스란히 털어 넣어서 경영대학원의 온라인 과정을 들었다. 1년 동안 42학점을 취득했다. 1년에 42학점이면, 학부 시절에 수강신청 할 수 있는 한도였다. 학부 시절에 생활비와 학비를 벌면서도 나름 열심히 공부한다고 했었는데, 이 때 돌이켜 보니 학부시절은 신선놀음이었다.
그 해는 그렇게 지샌 밤이 많았다. 마지막에 괌에다 시험 접수를 하고 기다렸지만 2달에 걸친 장기 출장과 딱 맞아 떨어지는 바람에 접수비만 수백 달러 날리고 말았다. 결국, 자격증을 딴 것은 아니다. 하지만, 1년을 애쓴 끝에 웬만한 회계지식은 확실하게 내 것으로 만들었다. 최소한 업무를 하면서 회계 관련한 일이 생기면 당당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되었다.
회계는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회계는 경리부서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회계는 기업을 표현하는 일종의 ‘언어’다. 그 옛날 프로그래밍이라면 배워야 했던 포트란, 코볼과 같이 ‘언어’로 부르는 게 맞다. 요새 미국에서는 외국어 대신 ‘코딩’을 가르친다고도 하는데, 같은 언어라는 측면에서 보면 ‘회계’도 같은 수준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본다. (그렇다고 모 대학에서 하듯이 아무런 동의도 없이 막 밀어붙여야 한다는 얘기는 아니다. 오해 마시라)
사업개발자로서 중요한 자질 가운데 하나는 회계사, 변호사, 엔지니어, 컨설턴트 등 다른 분야 전문가와 소통하는 것이다. 회계사에게 뭔가 위탁할 때 원하는 내용을 회계 용어로 적확하게 표현하며 오해 없이 원활하게 의견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수준이어야 한다. 출장지에서 회계와 관련된 1차 자료를 받았을 때, 그 자료가 전체적으로 완결성이 있는지, 혹시 빠진 것은 없는지 정도는 대략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곳에 항상 회계전문가를 대동하고 다니지도 못할 뿐더러, 그 회계전문가가 기획,영업,마케팅,사업개발 등의 전문가는 아니기 때문이다.
해외에 지사를 설립하면서 회계사에게 ‘전체적으로 잘 알아봐 달라’는 식으로 의뢰를 하면 비싼 가격에 영양가라고는 별로 없는 ‘Doing Business in Kenya’같은 뭉텅이 서류를 받을 뿐이다. 실무에서 모든 회계, 세무 규정이 골고루 필요한 경우란 별로 없다. “이러이러한 기업이 어떤 목적으로 특정 분야에 요만한 규모의 투자를 하고 싶다. 기존 파트너의 특성은 어떻고, 거래는 어떤 특징을 가진다.
이런 환경에서 우리는 어떤 유형의 법인을 설립하고 싶은데, 다른 유형 또는 투자방식과 비교해서 세무적으로 가장 유리한 방식은 무엇인가. 기존 법인을 인수 합병하는 방식으로 진출시 피합병기업의 이월결손금을 인정받을 수 있는가? 받을 수 있으면 어느 범위까지 인정받는가?…. 등등을 구체적으로 물어봐야 한다. 그렇게 묻는 고객을 기피할 것 같은가? 천만의 말씀. 전문직은 말 통하는 고객을 가장 좋아한다.
회계와 관련한 어떤 이슈가 등장했을 때, ‘아, 이 문제는 뭐에 관련되는 문제이고 어떻게 접근해야 하겠다’라는 생각이 나면 문제는 절반 이상 해결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상세한 기업회계기준이나 세법 조항까지 달달 외울 필요는 없다. 답을 찾아서 이해할 수 있으면 충분한 것이다. 전문가들도 모든 것을 시험 답안 외우듯 달달 외우지 않는다. 특히 세법은 해마다 개정되는 부분이 많아서 세법 전문가를 ‘세법전 빨리 찾는 전문가’라 하지 않는가.
어떤 업종이든, 어떤 직무를 맡았든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면 회계는 피할 수 없다. 인사든 홍보든 회계를 몰라도 된다는 소리는 하지 마시라. 인생에 진짜로 중요한 것은 결코 피할 수 없다는 진리를 너무 늦게 깨닫지 마시라. 회계들 하시라.
원문: 개발마케팅연구소